한국을 다녀오면 늘 앓는 병이 있는데, 하나는 새벽에 일어나 혼자 집안을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 또 하나는 막상 하루가 시작하고 나면 길게는 몇 주간 무기력증을 앓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올해는 위 두 가지 증상 중에 어느 것도 겪지 않았다. 오히려 신기할 만큼 시차에 쉽게 적응했고, 일상으로의 복귀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역시 시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차의 원인이기도 한)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며칠간 초저녁에 잠들어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일과를 반복하였다. 고요한 새벽에 일어나 한국에서 손수 모셔온 책들을 쓰다듬고 있노라면, 마치 동치미 항아리에 넣어둔 넓고 편편한 돌처럼 지긋함이 느껴지곤 했다. 그렇게 차분한 마음으로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공부도 하다가, 문득 오래전부터 봐야지 하면서 계속 잊고 있었던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을 오롯이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러빙 빈센트: Loving Vincent>라는 작품이다. 참고로 이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화가 107명이 고흐의 유화를 재현해 6만 2450점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영화는 고흐의 그림 <아르망 룰랭의 초상>의 주인공이자 우편배달부 조셉 룰랭의 아들인 아르망이, 아버지의 부탁으로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한 통을 들고 그의 생전 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으로 전개된다. 아르망은 고흐가 거주했던 파리 근교 오베르에서 고흐와 크고 작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아르망의 내적 혼돈과 고뇌는 더 깊어진다. 시간이 흐르고 고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아르망은 ‘화가 빈센트의 참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과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아버지의 심부름꾼이 되어 이 여정을 시작한 아르망이지만, 여러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그들이 각각 그려낸 다채로운 색감의 빈센트 반 고흐라는 한 인간의 고유한 삶의 자세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아르망은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망자가 된 고흐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고흐의 아름다운 그림들 뒤편으로 들려오는 다양한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전해주는 고흐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는 다시 한번  ‘스토리텔링’의 힘을 깨닫게 해준다.

인생은 결국 이야기의 연속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복 시인의 “이야기된 불행은 불행이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이 설 자리가 생긴다.”라는 말도 과장된 것은 아니리라. 실제로 나는 심리치료를 업으로 삼고 살다 보니, 내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듣고 또 듣는다. 그리고 마음속 이야기 실타래가 모두 풀어질 즈음해서 나타나는 신비로운 변화를 수없이 지켜본다. 어둡던 눈망울에 빛이 돌아오고, 굳었던 입매에 미소가 스미는 모습을 바라볼 때의 감동이란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할 수조차 없다.

고흐의 예술성과 살아온 발자취는 그가 생을 마감한 지 100년을 훌쩍 뛰어넘은 지금도 많은 사람을 통해 노래로 영화로 책으로 그림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오로지 나는 그림을 그릴뿐”이라고 말했던 천상의 화가 고흐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느꼈을까? 만약 아직도 고흐의 마음에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 이야기들이 한 줄기 빛이 되어 그곳에 행복이 설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