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7월 21일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우리 강아지' '나구 새끼' 라 부르시며 유난히 이뻐해 주시고 키워주신 우리 할머니는 지금 랄라의 증조할머니까지 되셨지만, 나는 아직도 나만큼 할머니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자란 손주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 믿으며 산다. 

어젯밤 랄라에게 잠옷을 입히다가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어제 이곳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어마어마한 비가 한때 내렸었는데, 그 비가 아무래도 나의 오랜 추억 보따리를 흔들어 놓았나 보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방에 불을 놓기 시작하면, 으레 내가 목욕이나 세수를 하고 나와 옷을 갈아입을 때 항상 당신 이불 밑에 내 속옷과 내복을 넣어 두셨다가 따끈따끈하고 보송보송한 것을 내어주시고는 하셨다. 지금은 모두 기름보일러에 방 밑에도 골고루 파이프가 깔려 있어서 온기가 균일하게 퍼지므로 윗목 아랫목의 구분이 없어졌지만, 그 당시 아랫목은 정말 절절 끓을 정도로 따뜻하다기보다 뜨거웠었던 기억이 있다. 그 뜨겁던 아랫목에서 나온 나의 속옷에서는 할머니 향기인지 우리 집 이불에서 나는 냄새인지, 너무나도 친근한 향이 배 있었고 나는 지금도 그 따뜻함과 옷 냄새를 잊지 못한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은 동네 시장을 지나 놀이터를 지나 언덕 위를 올라가야 있었는데, 절대 가깝지 않던 그 길을 할머니께서는 항상 내 손을 잡고 데려다주시곤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시장에서 팔던 막 튀겨낸 어묵을 몇 장을 반찬거리로 사 오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고, 놀이터 근처에 있는 뽑기 장사 아저씨한테 들려 맨날 꽝밖에 못 찍는 나를 위로해주신 분도 우리 할머니시다. 

할머니께서는 유난히 꽃을 사랑하셔서, 우리 집 정원 한쪽에 있는 꽃밭에는 늘 할머니께서 손수 가꾸시던, 유자, 분꽃,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 깨꽃 등이 정겹게 피어있었고, 그 당시 할머니께서는 한복도 자주 곱게 차려입으셨었다. 앨범에 보면 특별한 날도 아닌데 정갈히 한복을 입으신 할머니와 평상복 차림의 내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내 기억이 맞는 듯싶다. 

우리 할머니께서는 지금도 고우시지만, 그때는 젊어 보이시기까지 하셔서 나를 데리고 동네 밖을 외출하시면 사람들이 막내딸이냐고 하셨을 정도다. 먼 길을 할머니와 같이 다녀오는 길에는 동네 입구에 있는 약국에 들러 박카스를 한 병을 꼭 사주셨는데, 나중에는 약사 아저씨께서 "애들은 그거 많이 마시면 안 좋은데..."하고 말씀하셔서 그 횟수가 줄기는 했어도, 여전히 박카스는 할머니와 나의 추억의 음료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작년 여름 한국에 나갔을 때도 할머니께서는 내 몫으로 박카스 한 상자를 다용도실 한쪽에 놔두시고는 "아무도 주지 말고 너 혼자 다 먹어라." 하셨으니까.

어린 사촌 동생 머리를 대강 고무줄로 묶어주시는 모습을 보고, "할머니 옛날에는 제 머리 양 갈래로 따서 이쁘게 땋아주시고, 머리도 참 빛으로 바짝 댕겨서 잘 빗겨주셨잖아요." 하고 물으니, 이제는 손아귀에 힘이 없어지셔서 그렇게 옛날처럼 야무지게 머리를 못 만져 주겠다고 하셨다. 그 말이 얼마나 슬펐던지, 난 슬그머니 말꼬리를 돌려 "아휴... 할머니 요즘은 그렇게 옛날처럼 꽁꽁 묶고 다니면 촌스럽다고 일부러 자연스럽게 느슨하게 묶고 다녀요." 하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드렸다.

예쁘고 젊고 유난히 살결이 우윳빛처럼 고우신 우리 할머니께서 이제 칠순을 훨씬 넘기셨다. 하기야 그때 할머니 품에 안겨 "달강달강"을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내가 이제 아기 엄마가 되고, 랄라에게 그 노래를 가르쳐 줘야 하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다음에 환생한다면 우리 할머니는 내 색시로 나는 할머니의 늠름한 낭군으로 만나서 알콩달콩 아끼면서 살고 싶다고 할머니께 말하면, 우리 할머니는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이 할미도 참 좋겠다."라고 젖은 눈으로 나를 보고 웃으시곤 하신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다. 이번 가을에 한국에 가면 할머니 살을 만지며 한숨 달게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