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6일

내 나이 서른 여섯, 혼자서 외국생활을 시작한지도 내년이면 20년째를 맞는다. 그 긴 시간동안 솔직히 향수병을 심각하게 앓아본 기억이 없다. 아무래도 뭔가에 몰두하면 외곬수가 되는 나의 성격과, 고무줄같이 유연한 적응력과 타고난 긍정적 사고 때문일꺼라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지만 천만의 말씀! 최고의 일등공신은 전화줄이였다는 것을 며칠 전 부터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나랑 친한 친구들이라면 이미 한 두 번 쯤은 우리 엄마 아빠의 끊임없는 전화 통화에 대한 푸념을 들어봤을것이다. 아침수업 준비 때문에 눈코뜰새 없을 때도, 시험공부 하느냐 밤을 지샐때도, 스톰이랑 놀기 바쁠때도, 랄라 때문에 천당과 지옥을 오갈때도, 이제는 좀 한 숨 돌렸다 싶을때도, 우리집 전화는 매일 울린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매일 울리는 전화. 물론 아빠 보다는 엄마가 더 자주 출근 도장을 찍으시지만, 아빠도 전화통화 시간에 있어서는 절대로 엄마한데 뒤지지 않으신다. 집안 대소사 부터, 부부싸움, 취미생활, 여행계획, 맛집자랑, 경제, 정치, 철학, 육아, 사회과학 등등 전화통화의 주제도 진짜 다양하다. 정말이지 통화를 하다가 전화 밧데리가 죽어버린 적도 수 차례고, 어쩔때는 귀차니즘과 짜증이 하늘을 치 솟을 때는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나는 이번 주에 들어서야 나의 무서운 "길들여짐" 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더이상 울리지 않는 전화벨.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자꾸 쌓여가지만, 엄마도 아빠도 전화가 없으시다. 이 때 쯤이면 한 번 울려줘야 되는 전화가 깜깜 무소식. 나는 불안초조 증세를 보이고 있다. 물론 우리집 전화벨이 울리지 않는 이유는 엄마랑 아빠가 지난주 유럽여행을 떠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밍해가신 아빠전화는 전화를 드려도 매번 전원 스위치가 꺼져있다고만 나오고, 하루 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이다.

이전에 강의시간에 전원을 꺼놨다가 수업후 듣게된 엄마의 강도높은 협박조 음성메시지 때문에 엄마한데 무지 퍼 부은 기억이 있다. 아니 왜 미리 알려준 강의시간표는 어쩌고, 수업중인 딸 한데 전화해서 전화 안 받는다고 그렇게 화를내냐고. 내가 뭔 죄가 있어서 수업 끝나자마자 이렇게 호된 꾸지람 메시지를 들어야 되냐고. 엄마는 '아 맞아. 깜박했다." 라고만 말씀하셨지만, 난 그때 집요하게 엄마를 추궁했다. 마치 학교 다니는게 어마어마한 벼슬이라도 되는 것 처럼. 부끄럽게도 난 이제서야 엄마의 "화" 난 목소리가 "걱정" 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뒤늦게 헤아리고 있다.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길들인다" 라는 말을 "관계를 맺는다" 라는 뜻으로 설명해 준다. 길들이기 전에는 흔해 빠지게 느껴지는 존재들이 길들여짐으로 인해 "절절한 관계" 가 되는 과정. 더 나아가 서로에게 영원한 "책임" 을 마음으로 약속하는 과정. 이런 길들여지는 과정을 지나 우리는 단지 "너" 와 "내" 가 아닌 "우리" 라는 관계를 맺게 된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잊혀진 이야기.

난 울리지 않는 전화를 바라보며 엄마 아빠 생각을 한다. 지금쯤 어느 도시에서 밤을 맞이하고 아침을 시작하시고 계실까. 두 분도 나를 생각하고 계실까? 언젠가 두 분 모두 영원히 내 곁을 떠나신다면... 열흘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엄마 아빠 목소리를 들을수 없게 된다면... 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