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5일
우리 할머니는 옛날부터 아기들이 태어나면 강아지라고 불렀다.
기억이라는 것이 참 신비롭다. 할머니와 함께 지난 37년간 수많은 추억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추억이란 아주 어릴 적 두세 살 때의 기억이 주를 이룬다. 그때 할머니께서 자주 입으시던 한복 냄새며, 나와 마주 앉아 놀아주실 때의 할머니 얼굴 표정, 우리 둘이서 꼭 맞잡은 손의 감촉, 내가 '수리수리 마수리 가위바위보' 놀이에서 이기면 할머니께서 나의 작은 손가락이 누르기 편하도록 희고 긴 목을 가까이 낮게 늘어뜨리시던 모습, 할머니의 양산으로 새어 들어오던 햇살, 집 한편에 나팔꽃이 피면 아침 일찍 내 손을 잡고 꽃구경을 시켜주시던 할머니의 행복한 얼굴, 할머니께서 연소라 빛 플라스틱 밥공기에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주시던 '간장 빠빠'의 맛, 할머니의 구슬 핸드백, 내가 제일 많이 만진 우리 할머니의 차갑고 촉촉한 젖가슴, 할머니께서 나를 바라보시던 그 흐뭇하고 사랑 그윽한 눈 빛.
이제 이 모든 것은 나의 가슴에만 남아 살아 숨 쉴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는 정말 지혜로운 분이셨고 아주 합리적이셨다. 그리고 늘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셨다. 예의범절이나 도덕적인 면에서는 호랑이 할머니처럼 엄격하셨지만, 많은 시간을 우리와 놀아주셨고, 자주 업어주시고, 산책도 시켜주시고, 나들이도 데려가 주셨다. 그리고 꽃이 피면 피는 데로 꽃이 지고 씨가 앉으면 앉는 데로, 자연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기에, 나는 인간의 삶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첫 가르침을 할머니로부터 배웠다. 할머니께서는 똥강아지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절대로 채근하시거나 일방적으로 강요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자율성을 존중하셨고, 잠시 쉬어가는 미학도 할머니께서 가르쳐 주셨다. 장마 빗소리 가득한 여름날, 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우리 집 마루에 앉아 듣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내가 접한 첫 문학이기도 했다. 특히 우리 할머니의 입담은 최고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여행을 통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경험을 했고, 할머니의 뛰어난 인품은 내가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빛과 양분이 되어주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할머니의 똥강아지로 태어난 것에 큰 프라이드를 느끼며 살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 무한한 축복이며 행운이다. 할머니의 육신을 다시는 안아드릴 수 없다고 해서, 할머니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길마저 빼앗긴 것은 아니다. 할머니의 똥강아지로써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 당신께서 주신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내가 받은 사랑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나누며 사는 삶을 통해 우리 할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 그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먼 훗날 할머니 품에 다시 안겨 해맑게 웃으며 해후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이 사무치는 그리움은 달랠 길이 없다.
2010년 8월 20일
이번 주 수요일 오후부터 랄라가 뜬금없이 카운슬링 사무실을 차렸다. 친구들과 가족들을 상대로 심리상담을 해주고 싶다는 랄라의 마음이 대견하기도 하고, 일곱 살 랄라는 어떤 방식의 상담을 할까 궁금한 마음에 나는 흔쾌히 그녀의 첫 내담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흥미로운 발견을 몇 가지 했는데. 첫째, 랄라는 상담실 안에서는 한국말로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둘째, 랄라는 엄마, 아빠 딸로서의 랄라와 카운슬러로써의 랄라의 역할 분별이 뚜렷하다. 셋째, 랄라는 경청에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랄라와의 대화 중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잊기 전에 적어놓는다. (C- Client 엄마 / T- Therapist 랄라)
C: 선생님, 카운슬링은 어떨 때 받는 거예요?
T: 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뭔가에 Stuck 했다고 느낄 때, 마음이 아플 때나 문제가 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럴 때 카운슬링을 받으시는 겁니다.
T: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C: 선생님, 사실 몇 달 전에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저는 요즘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할머니께 절도하고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매일마다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하죠?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고, 마음이 아주 많이 슬퍼요. 하지만 저에게는 딸도 있고 남편도 있고, 해야 하는 일도 있고, 늘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거든요. 어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T: 네, 알겠습니다. 슬프시겠네요. 슬프겠지만 좋은 생각들도 같이 하셔야 돼요. 그러면 제가 좋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까 잠시만 눈을 감고 여기 앉아 기다려 주세요.
(3-4분 경과 후)
T: 이제 눈을 뜨셔도 돼요. 이거 받으세요. (처방전을 전해줌)
C: 네, 감사합니다.
T: 지금 머릿속에 할머니 생각만 있거든요. 그러니까 좋은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해요. 절을 하면서도 꼭 잊지 마시라고 여기 메모지에 "좋은 생각을 하세요"라는 말을 적어놓았고요. 딸을 사랑하시죠? 딸 사진도 여기에 있으니까 같이 놓고 보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그러면 슬픔이 조금은 줄어들고 웃을 수도 있을 거예요.
C: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 처방전이랑 사진을 어디에 놓고 매일 보는 게 좋을까요?
T: 아침에 일어나서 할머니께 절하는 곳 있죠? 거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보시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요. 그러면 할머니 사진도 보고 딸 사진도 보고 처방전도 같이 보면 좋잖아요.
C: 지금 당장 내려가서 놓고 와야겠어요.
T: 다른 거는 없으세요?
C: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는 저희 딸 한데 사랑한다는 말을 참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요즘 들어 '딸이 날 사랑할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어요. 저희 딸은 저를 사랑할까요?
T: 그럼요. 딸도 엄마를 사랑하죠. 근데 그런 건 마음으로 아는 거예요. 아셨죠?
2010년 8월 20일
이번 주 수요일 오후부터 랄라가 뜬금없이 카운슬링 사무실을 차렸다. 친구들과 가족들을 상대로 심리상담을 해주고 싶다는 랄라의 마음이 대견하기도 하고, 일곱 살 랄라는 어떤 방식의 상담을 할까 궁금한 마음에 나는 흔쾌히 그녀의 첫 내담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흥미로운 발견을 몇 가지 했는데. 첫째, 랄라는 상담실 안에서는 한국말로 대화를 하려고 노력한다. 둘째, 랄라는 엄마, 아빠 딸로서의 랄라와 카운슬러로써의 랄라의 역할 분별이 뚜렷하다. 셋째, 랄라는 경청에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랄라와의 대화 중 몇 가지 기억에 남는 것들을 잊기 전에 적어놓는다. (C- Client 엄마 / T- Therapist 랄라)
C: 선생님, 카운슬링은 어떨 때 받는 거예요?
T: 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데 뭔가에 Stuck 했다고 느낄 때, 마음이 아플 때나 문제가 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럴 때 카운슬링을 받으시는 겁니다.
T: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C: 선생님, 사실 몇 달 전에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저는 요즘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할머니께 절도하고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매일마다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하죠?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고, 마음이 아주 많이 슬퍼요. 하지만 저에게는 딸도 있고 남편도 있고, 해야 하는 일도 있고, 늘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거든요. 어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T: 네, 알겠습니다. 슬프시겠네요. 슬프겠지만 좋은 생각들도 같이 하셔야 돼요. 그러면 제가 좋은 방법을 알려드릴 테니까 잠시만 눈을 감고 여기 앉아 기다려 주세요.
(3-4분 경과 후)
T: 이제 눈을 뜨셔도 돼요. 이거 받으세요. (처방전을 전해줌)
C: 네, 감사합니다.
T: 지금 머릿속에 할머니 생각만 있거든요. 그러니까 좋은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해요. 절을 하면서도 꼭 잊지 마시라고 여기 메모지에 "좋은 생각을 하세요"라는 말을 적어놓았고요. 딸을 사랑하시죠? 딸 사진도 여기에 있으니까 같이 놓고 보면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그러면 슬픔이 조금은 줄어들고 웃을 수도 있을 거예요.
C: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 처방전이랑 사진을 어디에 놓고 매일 보는 게 좋을까요?
T: 아침에 일어나서 할머니께 절하는 곳 있죠? 거기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보시는 게 제일 좋을 거 같아요. 그러면 할머니 사진도 보고 딸 사진도 보고 처방전도 같이 보면 좋잖아요.
C: 지금 당장 내려가서 놓고 와야겠어요.
T: 다른 거는 없으세요?
C: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저는 저희 딸 한데 사랑한다는 말을 참 많이 하거든요. 근데 요즘 저는 저희 딸이 날 사랑할까?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어요. 저희 딸은 저를 사랑할까요?
T: 그럼요. 딸도 엄마를 사랑하죠. 근데 그런 건 마음으로 아는 거예요. 아셨죠?
2010년 8월 15일
우리 집은 옛날부터 아기들이 태어나면 똥강아지라고 불렀다.
기억이라는 것이 참 신비롭다. 할머니와 함께 지난 37년간 수많은 추억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추억이란 아주 어릴 적 두세 살 때의 기억이 주를 이룬다. 그때 할머니께서 자주 입으시던 한복 냄새며, 나와 마주 앉아 놀아주실 때의 할머니 얼굴 표정, 우리 둘이서 꼭 맞잡은 손의 감촉, 내가 '수리수리 마수리 가위바위보' 놀이에서 이기면 할머니께서 나의 작은 손가락이 누르기 편하도록 희고 긴 목을 가까이 낮게 늘어뜨리시던 모습, 할머니의 양산으로 새어 들어오던 햇살, 집 한편에 나팔꽃이 피면 아침 일찍 내 손을 잡고 꽃구경을 시켜주시던 할머니의 행복한 얼굴, 할머니께서 연소라 빛 플라스틱 밥공기에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주시던 '간장 빠빠'의 맛, 할머니의 구슬 핸드백, 내가 제일 많이 만진 우리 할머니의 차갑고 촉촉한 젖가슴, 할머니께서 나를 바라보시던 그 흐뭇하고 사랑 그윽한 눈 빛.
이제 이 모든 것은 나의 가슴에만 남아 살아 숨 쉴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할머니는 정말 지혜로운 분이셨고 아주 합리적이셨다. 그리고 늘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우리를 가르치셨다. 예의범절이나 도덕적인 면에서는 호랑이 할머니처럼 엄격하셨지만, 많은 시간을 우리와 놀아주셨고, 자주 업어주시고, 산책도 시켜주시고, 나들이도 데려가 주셨다. 그리고 꽃이 피면 피는 데로 꽃이 지고 씨가 앉으면 앉는 데로, 자연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기에, 나는 인간의 삶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첫 가르침을 할머니로부터 배웠다. 할머니께서는 똥강아지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절대로 채근하시거나 일방적으로 강요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자율성을 존중하셨고, 잠시 쉬어가는 미학도 할머니께서 가르쳐 주셨다. 장마 빗소리 가득한 여름날, 또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우리 집 마루에 앉아 듣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내가 접한 첫 문학이기도 했다. 특히 우리 할머니의 입담은 최고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여행을 통해 나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아름다운 경험을 했고, 할머니의 뛰어난 인품은 내가 건강한 자아를 형성하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굳건히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빛과 양분이 되어주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할머니의 똥강아지로 태어난 것에 큰 프라이드를 느끼며 살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 무한한 축복이며 행운이다. 할머니의 육신을 다시는 안아드릴 수 없다고 해서, 할머니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길마저 빼앗긴 것은 아니다. 할머니의 똥강아지로써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 당신께서 주신 가르침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 내가 받은 사랑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나누며 사는 삶을 통해 우리 할머니의 사랑에 보답하고 싶다. 그렇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 보면, 먼 훗날 할머니 품에 다시 안겨 해맑게 웃으며 해후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이 사무치는 그리움은 달랠 길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