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1일

임신을 알게된 그 날부터 뱃속의 아이가 딸이기를 바라고 또 바랬던 나. 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성별을 통보받던 날, 출산하던 날 만큼 떨리고 긴장했었던 나. 랄라가 딸이라는 사실에 너무나 기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나의 솔직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그 날 내가 랄라에게 쓴 편지에 적혀있다. 나는 왜 딸에 집착했을까? 아마도 우리집에는 늘 여자가 많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외유내강의 대표적인 롤모델이셨던 할머니를 시작으로, 미모와 두뇌를 모두 가진 완벽했던 엄마, 뛰어난 미술감각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던 큰이모,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았던 소녀같은 작은이모. 그렇게 네 여자들 속에서 나는 자랐다.

나는 할머니, 엄마, 이모들께 정말 골고루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뼛속깊이 여성우월주위가 자리잡아가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집 여자들은 절대 주춤거리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열정을 숨기는 법이 없었고, 각자 정해놓은 단기/장기 목표들이 뚜렷했기에, 그녀들의 삶은 치열했다. 말이 많았고, 탈도 많았으며, 웃음과 눈물이 늘 공존했다. 나에게 할머니는 신앙과 같았고, 엄마는 우상이였고, 이모들은 내가 동경하는 아이돌이였다.

할머니께서는 슬하에 아들이 없으신걸 늘 아쉬어 하셨지만, 할머니의 위풍당당함은 열 아들을 거느린 어머니의 포스에 뒤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대쪽같은 성품과 낭랑하던 음성은 떠올리기만해도 구부려졌던 허리를 곧게 펴게 만드는 위력이 있다. 여하튼 나는 내가 여자로 태어난것에 감사함보다 자랑스러움이 늘 한 발 앞섰던것 같다. 부모가 맛있는 것이 있으면 자식에게 주고싶고, 이쁜옷이 있으면 자식에게 입히고 싶은것 처럼, 내가 딸을 원해왔던 것도 이런 아주 단순한 바램에서 시작된듯 싶다. 내가 여자여서 행복했기에, 내 뱃속의 아이도 여자이기를 바랬을것이다. 그렇게 우리 랄라가 태어났고, 솔직히 딸이였기에 더욱 축복받은 출생이기도 했다.

이제 랄라가 여덟살. 초등학교 3학년도 이제 세 달만 남겨두고 있다. 랄라를 통해서 많은것을 느끼고 배우고 깨닫는 나. 그리고 마법과도 같이 랄라의 존재가 나로 하여금 과거로 여행을 떠나게 한다. 랄라에게서 우리 할머니, 엄마, 이모들과 나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랄라를 바라보다 가끔 핏줄에 대한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게 아니라, 아래서 위로도 흐르는구나 하는 묘한 걸 느낄때가 종종 있다. 랄라가 하나의 매개체가 되어 나의 현실과 과거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주고 있다.

랄라가 무도회때 입을 원피스를 사러갔다가 둘 다 이뻐서 결국 두 벌을 모두 사가지고 왔다. 랄라방문에 단정히 옷을 걸어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30년전 내가 피아노 콩쿠르때 입을 드레스를 한 벌이 아니라 두 벌, 세 벌 사가지고 와서 방바닥에 늘어놓고, 엄마와 할머니, 이모들이 둘러앉아 다급히 나를 찾으시던 일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방에 오후햇살이 가득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