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텍사스 주립대의 ELI(English Language Institute)에서 교편을 잡은 첫 학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Listening and Speaking수업을 맡아서 첫 시간을 아주 재미있게 진행하고 교실에서 나왔는데, 한국인 학생 한 명이 따라 나와서 제게 그러더군요. 제가 한국인 교사라 불편하니 다른 반으로 가고 싶다는 거예요. 사실 순간적으로는 기분이 나빴지만 충분히 이해했지요. 한국인들은 정도 차이가 있지만 대개 다른 한국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공포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저는 같은 한국인으로서 그런 공포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고, 또 저도 자존심이 있지 제 학생을 잃고 싶지 않았던 마음에 그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Give me one week! After one week, you may change your class if you still want.

“일주일만 해보자. 일주일 후에도 네가 원한다면 반을 바꿔줄게.”

그 후, 그 한국 학생뿐 아니라 세계의 각국에서 영어를 배우러 온 그 반 학생들에게 솔직히 얘기했습니다. 나는 원어민 교사가 아니지만 오히려 영어로 인한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는 원어민 교사보다 더 잘 가르칠 자신이 있다. 그것은 학생들이 영어 때문에 겪는 문제들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개개 학생들이 겪는 영어병의 증세에 따른 치료법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한국 사람들이 영어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어가 안 되는 여러 가지 원인들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영어로 사람을 판단하려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입니다. 한국인들은 왜 다른 한국 사람 앞에서 영어 하기를 싫어할까요?

예를 들어, 영어 좀 잘하는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런데 또 발음이 어떻다, 너무 굴린다, 덜 굴린다 … 정말 말들이 많지요. 이런 분위기이니 영어에 자신이 없는 한국인들이 입을 열고 영어 한마디를 말하는 데 느끼는 부담감은 과히 공포에 가까울 수밖에요. 못해도 “우리는 원어민이 아니니까.”라고 봐주는 분위기가 아니라, 남의 실수를 낱낱이 헤집잖아요. 얼마 전 TV를 통해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서 출연자 중 한 어르신이 스위스에서 침대 두 개를 떼어 놓아 달라는 의미로 ”투베드!” “나우!”하셨잖아요. 그렇게 말하셨어도 프론트 데스크 직원이 다 알아듣고 요구사항에 맞춰주더라고요. 사실 명령조의 짧은 영어지만 만면에 미소를 띤 고령의 외국인에게 빈정 상할 사람은 없다고 봐요. 영어가 서툴러서 그런 줄 알고 다 이해하는 거죠. 꼭 영어가 아니더라도 내가 잘 모르는 언어권의 나라를 여행할 땐 누구든 한마디 말 하기도 힘들잖아요. 현지인들은 오히려 우리의 서툰 영어에 관대한데, 유독 한국 사람들끼리만 혹독하죠. 듣는 현지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 알아듣고 같이 웃어주기까지 하는데 옆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더 쪽 팔려 하면서 입을 꾹 다물죠.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인들끼리 있는 국내 환경에서는 말하기 실력 늘리는 게 더욱 만만치 않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사람들은 참 남의 일에 관심도 많고 말도 많습니다.  옷을 이렇게 입어야 한다 저렇게 입어야 한다, 다리가 두껍다 팔이 두껍다, 말이 많다 말이 적다… 내가 어떤 행동을 이런저런 말을 듣기 마련입니다. 영어를 말할 때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즐기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은 온통 ‘남들이 내 영어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걱정으로 꽉 차버리는 겁니다. 이 단어 맞아? 이렇게 말해도 되는 건가? 발음이 좀 후졌지? 강세가 삑사리 난 거 아냐? 너무 굴렸나? 좀 더 굴릴 걸 그랬나? 아예 굴리지 말았어야 했나… 이라도 하고 걱정하는 건 조금 나은 케이스지요. 지나친 경우엔 용기가 없어 아예 입도 못 뗍니다. 내 머릿속에 맴도는 그 단어, 그 문장이 맞는 건데도 말이죠.

저는요, 팔뚝 건강해도 소매 없는 윗도리 즐겨 입고, 다리 두꺼워도 짧은 치마 입고 여기저기 쏘다닙니다. 제 팔뚝 굵어서 남한테 피해준 거 없고 다리 통통한 게 무슨 죄라도 됩니까! 그런 것 보고 입 삐죽거리는 사람들의 심보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저는 나풀거리는 짧은 치마 입고 제 알통 다리에 착 감기는 봄바람을 느끼며 기분만 좋은데요. 왜 우리가 남들 눈과 귀가 무서워서 입고 싶은 옷도 못 입고 하고 싶은 말도 못 하는 희생자가 되어야 한답니까!

제가 미국대학에서만 10년 넘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전세계에서 영어를 배우러 미국에 온 학생들 중 제가 원어민 교사가 아니라 불평을 받아본 일은 한국학생한테 뿐입니다. 원어민이 아니면 영어를 못한다거나 원어민 같이 영어를 해야 잘하는 영어라는 집착을 버려야 영어로 의사소통 할수 있어요. 언제까지 같은 한국 사람들을 의식하느라 입을 안 여실 건가요? 틀려도 좋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문장마다 실수투성이라도 괜찮아요. 하고 싶은 말 영어로 팍팍 해가면서 살다 보면 몇 년 후 제대로 된 영어가 내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은 절대 원어민이 될수 없어요. 당연하잖아요. 원어민이 아니니까요. 다행인 것은 여러분이 원어민이 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영어로 내의사를 충분히 전달하고 상대방의 말을 다 이해하느냐 하는 의사소통의 기술에 초점을 두면 된다는거죠. 뻔히 한국 사람인데 미국사람인 척 하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