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아는 양변기의 손잡이를 내렸다. 콰르르, 소리를 내며 변기안의 물이 무서운 속도로 없어졌다. 동시에 또 금새 맑은 물이 몸부림을 치며 내려와 가득 고인다. 은아는 하릴없이 다시 손잡이를 내린다. 고여 있던 물이 소용돌이를 치며 다시 내려간다.

늦은 오후, 회사 건물의 화장실 안이다. 은아는 속옷을 제대로 끌어올리지도 않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다. 화장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그것을 휴지통에 버려야 할지, 아니면 화장지로 싸서 핸드백에 넣어야 할지, 아니면 변기안에 던져넣고 다시 물을 내려야 할지…

핸드백 안에서 띵똥, 하고 문자 메세지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들렸다. 전화기를 확인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은아는 그것을 손에 쥐고 두 팔로 머리를 감싸안았다.

경악스럽고 충격적인 순간을 두고 눈앞이 캄캄하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다면,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을 쓰는 게 맞다면 바로 이럴 때를 두고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냥 그 안에서, 하도 좁아서 몸을 마음대로 돌릴 수도 없는 좁은 화장실 칸 안에서 연기사라지듯 사라져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같이 한다.

그저 멍했다. 멍하고 멍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아니, 두껍고 탁하고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은아의 손에 들려 있는 그것, 하얀 플라스틱으로 된 길쭉한 그것은 임신테스트기였다. 그것에는 빨간 줄 두개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렇다. 은아는 임신을 한 것이다. 은아는 지금 임신 테스트기를 통해 그 엄청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언제였을까. 언제 임신이 된 것일까. 그리고 지금 몇개월 째일까.

지난 몇달 전 일을 아무리 곰곰하게 떠올려 봐도 은아는 짐작할 수가 없다.

언제 임신이 되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워낙 생리가 불규칙한 까닭이다. 그래서 서너달 생리가 건너 뛴 것도 몰랐다. 아니, 건너 뛰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건너 뛰다가 어느날 막혀있던 봇물이 터지듯 툭 터져나오곤 했었으니까.

그러나 성년의 여자가 남자와 섹스를 하면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아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 사실을 왜 몰랐을까. 임신의 가능성을 왜 간과하지 못했을까.

사실 임신에 대한 조짐은 기억은 안 나나 꽤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속이 더부룩하고 뭐가 꽉 차 있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아 위가 빈 상태였을 때도 배가 부른 것 같은 느낌이 있었던 것이다. 그 기분나쁜 느낌은 캐빈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날 부터였다. 그러나 은아는 그날 저녁 너무 과식을 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예전에 엄마가 언니 금아를 임신하고 그랬던 것처럼 소화제만 계속 복용했었다.

혹시 그 소화제가 태아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미쳤으면 어떡하지. 그러고보니 지난 달에는 감기에 걸려 감기약도 먹었고 새끼 발가락의 티눈이 덧나서 곪는 바람에 항생제도 복용했다.

은아는 머리를 짓찧고 싶은 심정이다.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은아는 변기두껑을 내렸다. 그리고 거기에 털푸턱 주저앉았다. 띵똥, 하고 다시 문자 메세지 도착 신호가 들렸다.

은아는 머리카락속에 두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몇개월 째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임신은 기정 사실이다.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고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보름전에 테스트를 했었다. 그러나 그때는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두 줄이 나타났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희미한 두줄은 임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불안과 초조로 보름을 보내고 오늘 다시 한번 테스트를 해본 것이다. 그런데 선명한 두 줄이다.

몇달 전 봄에.

선이라는 것을 보고 두번째로 은아가 캐빈을 만나기 위해 내려갔을 때 처음 섹스를 했다.

그날 캐빈은 몸을 못가눌 정도로 많이 취했었다. 물론 운전도 할 수 없었다.

“은아씨 가지 말아요. 오늘 밤 내 옆에 있어줘요. 제발 떠나지 말아요…..”

비몽사몽 중에도 호소하듯 주절거리는 캐빈. 은아의 손을 있는 힘을 다해 잡고는 놓아주지 않는 캐빈.

클럽 직원의 도움으로 호텔 방 하나를 잡아 캐빈을 데려다가 눕혔다. 은아는 망설였다. 이 남자를 두고 돌아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져 있는 캐빈을 혼자 두고 도저히 그냥 돌아나올 수가 없었다. 은아는 거기서 밤을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시간이 너무 늦은 탓도 있었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그래서 그 새벽에 운전해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서 일단은 눈을 좀 부치고 아침에 떠날 생각을 한 것이다.

은아는 속옷만 남겨두고 캐빈의 옷을 모두 벗겨냈다. 그리고 물수건으로 캐빈의 얼굴과 손과 발을 닦았다.

은아는 원피스를 벗어 옷장에 걸었다. 그리고 속치마 바람으로 캐빈 옆에 누웠다.

하루종일 일하고 또 몇시간 운전해 거기까지 내려갔던 은아는 물 먹은 솜처럼 피곤하고 노곤했다. 은아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금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은아는 솜털같이 부드러운 뭔가가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느낌에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실내는 밝지 않았지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온 푸른 여명에 의해 사물을 대충 짐작 할 수는 있었다.

옆에 누운 캐빈이 은아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은아가 눈을 뜨자 캐빈이 미소지었다.

“깼어요?”

“지…지금 몇..몇시나 되었어요?”

몸을 일으키려는 은아를 캐빈이 제지했다.

“몇시나 됐는지 알 필요 없어요…..”

캐빈이 은아의 귀에다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속삭였다.
“지금은 우리가 사랑할 시간이예요……”
그리고 캐빈의 뜨거운 입술이, 캐빈의 뜨거운 손길이 은아에게 다가왔다. 캐빈의 손이 은아가 입은 속치마를 벗겨내고 브래지어를 벗겨내고 마침내 은아의 마지막 팬티를 벗겨냈다.

캐빈의 손길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지만 폭풍처럼 세차기도 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단 두번째 만난 남자와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이 은아의 머리를 가득 지배했다. 그러나 은아는 캐빈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거부라니. 그 표현은 솔직하지 못하다. 은아의 몸이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캐빈의 손길에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 것이다. 몸속 깊은 곳에 꼭꼭 감추어 놓았던 본능이란 놈이, 애써 억제하고 있던 본능이란 놈이 캐빈의 손길에 의해 머리를 쳐들고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침내 은아는 두 팔을 들어 캐빈을 껴안았다. 나중에 생각했다, 은아는. 외로워서, 너무 외로워서 그랬던 거라고. 외로워서 누군가가 필요했고, 섹스가 필요했고 그때 캐빈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거라고.

그렇게 캐빈과 은아는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섹스는 자연스런 절차가 되었다. 만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호텔로 갔고 그들은 섹스를 했다.

임신에 대해 걱정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으나 은아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다. 임신이란 것은 자기와는 거리가 먼 특정한 여자들만 하는 걸로.

은아의 첫 성경험은 고등학교때 부터였다. 그 이후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만난 남자들과 같이 잠을 잤다. 그러나 이상하게 임신은 한번도 하지 않았었다. 별다른 피임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은아의 몸에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래서 캐빈과 섹스를 하면서도 임신에 대한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었다.

오히려 캐빈이 어느 날 섹스를 마치고 말했다.

우리 결혼도 하기전에 임신부터 하면 어쩌지?하고. 그때 은아는 그냥 웃기만 했었다.

그랬는데,그랬는데 임신이 되고 만 것이다!

은아는 떨리는 심정으로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처음 잠을 자기 시작한 게 넉달 전, 그리고 마지막이 2주 전이다. 언제 임신이 된 것인지, 그리고 지금이 몇개월 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낳아야 하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버려야 하나…..

역시 은아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엄마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있는 엄마. 튼튼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는 엄마. 엄마는 슈퍼우먼이었다. 은아가 해결 못 하는 것은 엄마가 다 나서서 해주었다.

엄마는 일단 난리부터 칠 것이다. 여자가 칠칠치 못하다고 마구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가슴을 칠 것이다.

“내가 못살아, 정말! 나이 찬 여자 남자가 자는 것은 당연하지만 임신이 되기 전에 미리 단도리를 잘 했어야지. 넌 왜 그리 생긴 것 답지 않게 맹하니?”

엄마의 기대치에 반에 반도 못미치는 은아였다. 약지 못하고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똘망똘망하지 못한 은아였다.

자신이 못다한 꿈을 은아를 통해 이루어보려고 하는 엄마. 엄마는 늘 은아를 다그치고 닥달하고 꾸중하면서 자신의 식대로 조련하려고 했었다. 사랑과 관심과 애정이란 허울을 앞 세워서.

은아는 엄마가 무섭다. 고맙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안되었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지만 그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은 엄마가 무섭고 두렵다는 것이다.

은아가 만사에 소극적이고 수동적이 된 것은 늘 엄마가 앞장서서 설치고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면 앞에 나서서 스스로 뭔가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엄마가 알아서 척척 다 해주었으니까.

그러나 엄마는 은아의 그런 점을 못마땅해 했다.

너는 왜 그것도 못하니. 넌 왜 그렇게 잘 나지 못했니. 넌 왜 옆집 누구를 닮지 않았니.

금아는 엄마에게 악다구니 치면서 싸우고 대들고 항변했다. 그러나 은아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무서워서. 단지 무서워서.

대신 그저 엄마가 시키는대로 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엄마의 꾸중이나 비난을 덜 받는 방법이니까.

어떻게 할까. 엄마에게 얘기를 할까. 엄마는 어떤식으로든 명쾌하게 결론을 내 줄 것이다. 낳든지. 지우든지.

그렇지만 엄마의 꾸중과 지청구를 또 듣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하다.

그렇다면 언니 금아에게 알리는 것은 어떨까.

은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일 지구가 무너진다는 소식을 들어도 금아는 놀라지 않는다. 언니는 분명 대수롭지 않게 말할 것이다.

“낳아. 그리고 엄마에게 던져줘 버려. 우리를 양육하던 방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우수하고 뛰어난 방법으로 훌륭하게 잘 키워 주겠지….”

그렇다. 금아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다. 살아 가는 게 벅찬 아버지이다. 엄마에게 눌려 평생 기를 못 펴고 산 아버지이다.

그런 아버지에게 시집도 안 간 딸년의 임신소식을 전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무도 없다. 임신 소식을 전하고 의논할 사람은 아무도없다!

이럴 때 의논할 수 있는 친구 하나가 없다는 데 은아의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그동안은 친구가 필요없었다. 어쨌든 엄마가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까. 비난을 하든 꾸중을 하든 엄마는 항상 은아의 편이었다.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엄마랑 의논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러나 이번 일은 혼자 해결해야 한다고 은아는 생각했다. 낳든, 지우든. 혼자 결정하고 혼자 실행해야 한다고.

지금 가슴이 떨리도록 무서운 것은 만약 아이를 낳게되면 엄마의 전철을 그대로 똑같이 밟게 될 가능성이 백프로라는 사실이었다. 팔십프로도 아니고 구십프로 아닌 백프로!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닮는다던가. 엄마가 걸어간 전철을 그대로 밟는다던가. 평소 싫어해 마지 않았던 엄마의 행동을 그대로 재현한다던가.

임신까지 했으니 어쩔수 없이 결혼을 한다치자. 곧 아이를 낳게 되겠지.

은아가 무서운 것은 엄마가 그랬던 것 처럼 아이를 구박하고 미워하게 될까봐였다. 결혼생활이 순탄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사건건 아이 핑계를 대리라.

“너 때문에 원치않는 결혼을 했어”

“너만 아니었더라면 재고해볼 수도 있었는데 네가 눈치 없이 쑥 들어선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

“너를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네 아버지란 사람과 엮이지 않았을 텐데 네가 내 인생을 망친거나 마찬가지야”

엄마는 결코 아버지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정말로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을까. 언니 금아 말대로라면 엄마는 반반한 얼굴이 가장 큰 밑천이었다고 했다. 그 얼굴에 혹해 들이대는 남자들도 많았지만 다 뿌리친 이유가 엄마는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할 원대한 꿈이 있었던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못했을 거란다. 집안 배경과 학력과 부모의 직업까지 따지는 괜찮은 집의 똑똑한 남자와의 결혼은 언감생심이었을 거란다. 그래서 만만한 아버지를 붙잡은 거라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가진 든든한 재산만 다 물려받을 수만 있다면 못생기고 키 작고 왜소한 몸집을 가진,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인 아버지와 결혼해도 충분히 남는 장사라고 주판을 두들겨 본 엄마의 계산이었을 거라고 금아는 단언했었다. 착하고 순진하고 양순한 아버지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뜻대로 구워삶을 수가 있었을 테니까. 그래서 임신을 미끼로 결혼까지 한 거라고 언니 금아는 단언했다.

그러나.

엄마 자신은 아버지가 가진 재산때문에 결혼한 것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속물이라고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 할 것을 염려한 때문일까.

엄마는 금아 핑계를 댔다. 걸핏하면 ‘금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했었던 것이다. 아버지랑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언니 금아가 들어서는 바람에 어쩔수 없었다고. 차마 뱃속에서 숨쉬고 있는 생명을 내처버리기가 어려웠다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고 집에 틀어박히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사모님’에서 ‘아줌마’로 전락하게 되면서부터는 억지로 한 결혼에 대한 푸념은 강도가 더 높아졌고 세졌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고 화장실 바닥을 내려다 보면서 은아는 생각했다.

언니를 임신하게 됨으로 아버지와 어쩔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는 엄마가 지금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강행되는 일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파도에 떠밀리듯 어쩔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한두가지인가.

만약 엄마가 임신하지 않았다면 엄마의 꿈대로 인기 영화배우가 되었을 것인가. 영화배우로 대성해서 돈 많고 권력 높은 실력자랑 결혼했을 것인가. 그런데 임신을 함으로 그 꿈을 포기한 것인가. 언니 금아가 엄마의 인생에 걸림돌이 된 게 맞는가.

그렇다면, 그렇다면 엄마는 왜 아이를 지우지 않았을까. 지울 시기를 놓쳐서였을까.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한번도 생리가 제날짜에 나오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열 네살때 첫 생리를 시작한 이래 폐경이 될 때까지 항상 불규칙했다고 했다. 그래서 임신 5개월이 될 때까지 몰랐다고 했다.

특히 엄마는 단 한번의 성관계에 아이가 들어설 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조차 못했다고 했다. 정말이지 임신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지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하길래 체한 줄 알고 ‘까스명스’ 만 디립다 사다 마셨다고 했다. 날이 가면서 아랫배가 도보록 하게 불러오길래 똥배가 나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목욕탕에 갔는데 ‘아가씨가 몸은 아주 날씬한테 아랫배가 임신한 사람같이 부르네,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한 아주머니의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등에 식은 땀이 쫘악 나더라고 했다. 그 길로 달려 간 산부인과에서 임신 5개월이란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꿈과 야심이 큰 사람이었던 엄마는 별로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던 남자의 아이를 왜 지우지 않았을까. 생명에 대한 존귀함이나 애정따위는 아예 없었을 터였다. 오히려 증오하고 미워했을 것이다.

5개월, 소파수술을 하기엔 약간 늦기는 했지만 돈만 많이 주면 얼마든지 지울 수 있을 터였다. 흔적을 없애고 사뿐하고 가뿐하게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엄마는 금아를 낳았다. 그리고 평생을 애물단지로 여기면서 구박했다.

은아는 배를 양손으로 지그시 감싸안았다. 갑자기 뱃속의 아이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아는 뱃속의 아이에게 말했다. 만약 너를 낳게 된 후 결혼 생활이 여의치 않더라도 너를 구박하지 않을께……

핸드백 안에서는 다시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캐빈이다. 퇴근시간에 맞추어 그가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캐빈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데서 은아는 가슴이 막막해졌다. 아이의 아버지가 캐빈인 이상 알리긴 알려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하다 은아는 아득한 심정이 되었다. 아이까지 임신한 이상 캐빈와의 결혼은 피할수 없는 숙명같은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친 때문이었다. 몇개월일지는 몰라도 생명이다. 절대 지울 수는 없다. 낳아야 한다. 만약, 만약 캐빈과 결혼을 못하게 된다해도 일단 아이는 낳아야 한다. 절대 지우면 안 된다…….

은아는 입술을 깨물며 결심했다. 절대로 아이를 지우지 않기로.

은아는 임신테스트기를 휴지로 싼 다음 핸드백 안에 넣었다. 새 생명의 잉태를 알려준 표적인 그것을 아무렇게나 없애버리고 싶지 않았다.

은아는 화장실 문을 밀고 나왔다. 언제까지 화장실안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퇴근을 했으니 일단은 회사문을 나서야 했다. 문을 열고 나오니 서너명의 여자들이 은아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시간이었다. 데이트를 위해 화장을 고치고 몸단장을 하려는 여성들로 화장실 안이 붐비고 있었다. 은아는 그들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세면대로 다가 갔다.

은아는 비누를 풀어 꼼꼼하게 손을 씻었다. 손을 씻듯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지러운 생각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양쪽 집안과의 상견례가 일 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은아의 뜻과는 무관하게 잡힌 상견례 스케쥴.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상견례는 진행될 것이고 결혼식 날짜는 잡혀질 것이고 결혼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은아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다.

파도에 떠밀려 옮겨다니는 지푸라기처럼 은아는 지금 타의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려다니고 있었다.

타인이란 다름 아닌 엄마와 캐빈이었다. 엄마는 신바람이 나 있었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고 염원하던 의사 사위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캐빈 역시 은아와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은아 혼자만 확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은아의 가장 큰 문제는 캐빈이란 남자가 싫은 것도 좋은 것도 아니라는데 있었다. 이 사람과 죽어도 결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또한 안 한다해도 별 뾰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캐빈보다 더 나은 남자가 나타나리란 보장도 없고.

그래서 뜨듯미지근한 마음으로 강 건너 불보듯 자신의 결혼이 진행되는 것을 관망만 하고 있는 것이다.

손을 씻는 동안에도 페이퍼 타올 서너장을 빼내 손을 닦는 동안에도 은아의 머릿속은 이 사실을 어떻게 캐빈에게 알려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아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쐬지 않고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이 답답해서.

핸드백에서 띵똥, 하고 다시 휴대전화의 문자 메세지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왔다.

지금 캐빈은 몸이 단 것이다. 은아가 재깍재깍 문자 메세지에 응답을 안하고 있으므로.

캐빈은 두세시간에 한번씩 문자메세지로 연락을, 그리고 하루에 네번씩 통화하기를 원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며 차 안에서. 그리고 퇴근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처음, 캐빈이 은아에게 말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며 차안 에서. 그리고 퇴근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화할께요. 당신도 내 연락에 즉시 회답을 해요. 그리고 캐빈은 그 바쁜 중에서도 자신이 한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환자를 보는 중이라 여의치 않으면 그 이유를 대는 문자 메세지라도 보냈다.

캐빈씨. 당신은 칸트예요. 살아있는 시계라고 불릴만큼 정해진 시간에 산책을 나선 것으로 유명하던 칸트말이예요.

처음 은아는 캐빈의 그런 마음이 따뜻하고 고맙고 행복했다.그러나 그게 한달이 되고 두달이 되고 석달이 되고 넉달 째로 접어들자 조금씩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은아 자신은 허술하고 정확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엄마의 치마폭에 쌓여 엄마의 지침없이는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였으므로. 그래서

빈틈 없고 치밀한 캐빈의 배우자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혼하면 문제가 많을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은아는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심경으로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문자 메세지가 네개 였다. 모두 캐빈으로부터 온 것이다.

-오늘 하루 어땠어요?곧 퇴근하게 되겠네요?-

-집으로 바로 갈 거예요? 전화하고 싶은데, 은아씨 목소리 듣고 싶은데 나 지금 전화할 상황이 못되어요-

- 왜 대답이 없어요? –

-은아씨. 어디예요. 대답좀 해 봐요-

다른 때같았으면 예, 금방 답장 못해 미안해요. 좀 바빴어요.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어요? 시간 나면 전화 해요.하고 가볍게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은아는 급한 손놀림으로 캐빈에게 전화를 한다.

지금 은아는 캐빈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환자와 있는 중이라서 전화를 하지 못할 상황이라도 좋다. 음성메세지 녹음 한 것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다.

당장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숨이 멎어버릴 것 같다. 뜨거운 사막을 쉬지않고 달린 사람이 차가운 물을 찾는 것 처럼 은아는 캐빈에 관한 갈증이 절박하다.

“은아씨!”

놀랍게도 캐빈이 전화를 받았다. 당연히 음성 메셋지로 넘어가려니 했던 은아는 뛸 듯이 반갑다.

“캐..캐빈씨. 전...전화 받아 줘서 고..고...마와요”

“은아씨!”

“지금 상황이 어떤데요?전화 통화, 괜찮아요?”

“음… 괜찮지 않긴 하지만.. 어쨌든....그나저나 은아씨, 왜 그리 바빠요?왜 금방 문자 메세지에 답장을 못해요? 걱정했잖아요”

갑자기 코 끝이 찡해오는 은아.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무슨 말을 꺼낼 수가 없다.

그래서 침묵을 지킨다. 은아의 심상찮은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할 캐빈이 아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캐빈이 다그치듯 급하게 묻는다.

“은아씨!?”

“캐…캐..캐빈씨……”

나 임신했어요, 하는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은아는. 그러나.

“은아씨 목소리가 왜 그래요?”

“………”

“은아씨!”

“그….그..냥….”

이 엄청난 사실을 전화로 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당분간은 혼자만 알고 있겠다고 은아는 다짐한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상견례를 무사히 마치고 난 후에. 그때에.

은아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감기가…감기가 들었어요….”

“저런!”

저런,하는 캐빈의 목소리에 은아를 걱정하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조심하지 그랬어요! 어쩌다가 감기에 걸렸어요”

“예……그게…그게 그렇게 되었어요…..”

“진짜 조심해, 은아씨…몸 조심해요….”

“예에…..”

“이번 주말은 나 일 해요. 대신 월요일과 화요일을 쉬어요.”

“……….”

“ 월요일 오후에 올라 갈께요….”

“……….”

“은아씨 퇴근하고 볼 수 있지요?”

“예에…..”

몸과 마음이 끌리는대로 같이 잠을 잤다. 그래서 임신을 했다.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나 왜 행복하지가 않는 걸까. 왜 안정이 되지 않는 걸까.

은아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세찬 바람이 휘이힝, 하고 불어온다면 가벼운 검불처럼 날라가 벼랑밑으로 처박힐 것 같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