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은 냉장고를 열었다. 텅텅 비어 있다. 계란 일곱개가 문 안쪽에 나란히 줄 맞추어 있을 뿐.

냉장고 문을 닫고 이번에는 팬츄리를 열어 본다. 역시 별다른 게 없다. 라면 서너개가 찌그러진 박스 안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다.

정기훈은 한숨을 내쉬면서 허리를 굽혀 라면 한 개를 집었다.

라면이라도 끓여먹어야 할 것 같다. 계란넣은 라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영양을 생각해서 하나 넣어야지. 그런데 계란이 꽤 오래된 것 같다. 언제 사다놓은 것인지 기억이 없다. 적어도 대여섯달은 더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상했을 것 같은데.

정기훈은 생각했다. 김치가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정기훈은 냄비에 물을 받는다. 그리고 스토브 위에 냄비를 올리기 위해 몸을 돌리다가 휘청, 하고 중심을 잃는다. 다행히 얼른 씽크대 상판을 집는 바람에 냄비를 바닥에 떨어트리지는 않았다.

등에서 식은 땀이 줄줄 흐르는 게 느껴진다. 몸이 너무 허약해진 거야….

벌써 사흘 째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감기몸살이 지독하게 났던 것이다. 온몸이 으실으실 떨리고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구석구석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침을 삼킬 수 없을 만큼 목구멍이 부었고 두통이 머리를 쪼갤 듯이 괴롭혔다. 열이 백도가 넘는 것 같았다.

약을 먹었으면 했으나 운전하고 약을 사러 나갈 기운도 경황도 정신도 없었다.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죽음같은 깊은 잠에 빠져 침대에만 누워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이 사흘을 앓고 지금 정신이 좀 든 터이다.

뭘 좀 먹어야 될 것 같아서 부엌에 나오긴 했는데 라면밖에 먹을만한 게 전혀 없다.

정기훈은 더듬거리며 걸어가서 식탁에 앉았다. 귀에서 위잉, 하고 소리가 나서 정기훈은 두 손으로 귀를 꾹꾹 누른다.

왜 몸살이 났을까. 찬바람을 쐰 게 원인이었던 것 아닐까. 미연의 전화를 받은 날 새벽에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느라 오랫동안 찬공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찬바람 때문에 몸살이 났을까. 아닌 것 같다.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인 것 같다. 이제부터는죽을 둥 살둥 돈을 벌기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니 몇년동안 태산같이 무겁게 지고 있던 책임감과 활처럼 팽팽하게 당겨져있던 긴장감이 풀어져 내렸다.

정말이지 정기훈의 지난 몇년은 미연이와 창우를 다시 미국에 데려오기 위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이었다. 모든 생활을 그 목적에만 맞추고 돈을 벌기위해서 힘을 다했었다. 몸을 사리지 않았었다.

그래서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돈 한푼을 쓰지 않았었고 항상 라면이 주식이었다. 일이 없어 집에 있는 날은 삼시 세끼 라면만 먹은 날도 있다.

몸살난 이유가 꼭 그 두가지 때문만은 아니다. 충격을 받지 않으려 노력을 했지만 사실은 알게 모르게 충격을 무척 받은 것 같다. 미연이가 결혼한다는 사실에. 이제는 미연이가 남의 여자가 되고만다는 사실에. 십여년간 이어왔던 인연의 끈이 하루아침에 쉽고 가볍게 툭 끊어져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잘 살아라 하는 마음이었지만 어쨌든 충격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몸살이 난 것 같다.

미연이를 마음에서 지우고나니 빈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이 마냥 허전하고 허망하고 쓸쓸하다. 맑고 찬 물이 들어 있을 줄 알고 정신없이 건져 올린 두레박에 시커먼 구정물이 잔뜩 들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 기분이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목은 여전히 마르지만 다시 두레박을 내리고 올려야 할 열정이 다 빠져나가버린 듯하다.

내가 좀 지쳤지……

그렇다. 정기훈은 지쳤다. 미국 온 이래 단 하루도 마음놓고 쉬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디 여행이나 갈까…..

일을 위해서라면 몇시간이고 운전해 다녔지만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해, 풍치를 보기 위해 집을 떠나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여행을 간다면 혼자가야 한다. 같이 가줄 만한 사람이 없다.

은행에 있는 돈으로 집이나 보러 다닐까. 그런데 집을 사면 누구랑 같이 살지?

물이 끓기 시작했으므로 정기훈은 라면을 넣기 위해 식탁에서 일어났다.

누구랑 같이 살지?……

정기훈의 머리에 미단이가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미단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 금아가 채워졌다. 금아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라면을 넣고 스프를 뜯고 있는데 방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사흘을 앓는 동안 예닐곱군데에서 전화가 온 것 같았지만 받지 못했다. 메세지로 넘어가게 그냥 두었다. 그리고 아직 메세지 확인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정기훈은 뛰듯이 안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진 휴대전화기를 들어 올렸다.

“형!”

석효다. 미국와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 석효.

“형, 뭐해. 지금?”

“그…그냥.. 그냥 집에 있지……”

“웬일이야. 일감이 없나 보오. 지금 이 시간에 집에를 다 있고?”

“지금이 몇신데……..”

커튼을 다 내려놓아서 실내는 어둑어둑하다. 거실에 걸린 벽시계를 흘낏보긴 했지만 지금이 하루중 어느 때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다섯시요”

“다섯시?저녁 다섯시?”

“그럼 저녁 다섯시지. 새벽 다섯시일까봐”

“………..”

“어제 전화했었는데 안 받던데? 녹음 남겼는데 확인 했수?”

“아니…. 아직…..”

“전화로 먹고 사는 사람이 제때제때 메시지 확인을 해야지. 긴급을 요하는 고객전화면 어쩌려고?”

“그..그래….그게 그렇게 됐다…..”

“나와요, 형. 오랜만에 술 한 잔 합시다”

“……….”

“여기 새로 생긴 매운탕집이야. 내가 한 잔 살테니까 나와요. 영후 형이랑 두찬이도 다 모여 있어”

매운탕이라. 생각만으로도 입에 군침이 돈다. 그러나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흘 굶어 텅텅 빈 뱃속이라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머리는 어질어질하다. 이 상태로는 운전대를 잡을 자신이 없다. 나가더라도 일단 라면으로 배를 좀 채우고 정신을 차린다음 나가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땀을 팥죽같이 흘린 터라 목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민어 매운탕이 죽이네. 얼른 와요. 지금 올 수 있지?”

“석효야……”

 

정기훈이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 번에 네가 얘기한 여자…..”

“여자?”

“네 처제 친구라던…. 화장품 가게 한다는 그 여자……”

“아, 윤애씨? 윤애씨 얘기하는 거요, 지금?”

“그으래……”

“왜, 윤애씨를 왜?”

“………..”

“소개시켜 준다고 할 때는 싫다고 하더니 갑자기 왜?”

“음….그게….그..그게…..”

“늦었어, 형…”

 

"느...늦..늦었다니?....."

“벌써 다른 남자랑 지금 열나게 데이트 중이야. 아마 곧 결혼할 거야….”

아이 없이 이혼하고 5년동안 혼자 살다가 심경의 변화가 있어 남자를 만나고 싶어한다던 여자였었다. 얼굴도, 성품도, 생활력도 좋다며 석효가 그 여자 얘기를 꺼냈을 때

정기훈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왜냐면 당시 정기훈은 여자가 있었으므로. 항상 가슴과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여자, 미연이가 한국에 있었으므로.

그러나 이제는 누구라도 만나야 할 것 같다. 만나지 않고는 헛헛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냐……”

실망에 따른 허탈감으로 가슴 한쪽이 스르르 허물어져 내린다.

“아. 영우형과 두찬이가 형 언제 올 거냐고 묻네. 지금 올 거요?”

“아니….”

정기훈은 전화기를 귀에 댄채 부엌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는 물이 바짝 쫄아붙은 냄비를 본다. 컵에 물을 받아 냄비에 붓는다.

“내가 지금 몸이  좀 안 좋다”

“왜? 어디가?”

“그냥 몸살이 좀 났어…..다음에 보자….”

정기훈은 두터운 스웨터를 꺼내다가 입었다. 등허리에 바람이 들어오는 것 처럼 한기가 들어서다.

그리고 식탁에 앉아 퉁퉁 불어터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파 한 가닥이 들어가지 않은 라면은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

두어젓가락 먹었는데 더 이상 목구멍으로 넘어가지가 않는다. 당장 때려죽인대도 더 먹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매콤하고 칼칼한 국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 밥을 말아 뜨거운 국 한그릇을 좀 먹었으면 살 것 같겠다.

그러나 천지사방을 둘러봐도 국 한그릇을 끓여다 줄 여자가 없다. 애인은 아니더라도 오빠, 동생이나 누나 ,동생하는 여자라도 하나 사귀어 놓을 걸 그랬다.

석효가 있다는 매운탕집으로 가 볼까. 가서 매운탕 국물이라도 마실까. 그러나 거기까지 도저히 운전해 갈 기운이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거기 가게되면

또 술을 마셔야 한다. 석효와 영후, 두찬이 등쌀에 한두잔은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으리라…..

그러면 무얼 먹을까. 라면말고 뭐 먹을 거라도 있을까…..

정기훈은 일어나서 냉장고며 팬츄리며 부엌 캐비넷을 한번씩 열어본다. 열어본들 뭐가 있을 턱이 있나. 평소에 그로서리 쇼핑을 해야 뭐라도 남은 게 있지.

정기훈은 한숨을 쉬면서 식탁에 돌아와 앉는다. 그리고 불어서 우동국수같이 굵어져버린, 아예 국물이 없어져버린 라면을 다시 먹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무도 없는 텅빈 아파트 방, 사흘을 죽도록 앓고나서 기껏 퉁퉁 불어터진 라면이나 먹고 앉아있는 자신의 신세가 초라하고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서.

샤워를 하고 뜨거운 물을 끓여 녹차 티백을 넣어 한잔 마시고나니

정신이 조금 들고 몸이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정기훈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섯개의 메세지가 있었다. 두개는 호제가 남긴 거였고 견적을 내 달라는 고객의 메세지가 두 개였다. 형 뭐해요? 내일 저녁에 한잔 먹으려는데 전화 해요 하는 석효 목소리가 한개 였다. 그리고 마지막 메세지는 여자였다. 미단이었다.

“큰일 났어요. 메세지 받으면 바로 전화 좀 주세요”

메세지 남긴 시간을 보니 오늘 아침무렵이다.

미단이는 며칠전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눈 사이다. 큰 일 났다고 전화를 할 사이가 전혀 아니다. 그러나 궁금하다. 큰 일이란, 미단이가 말 한 큰 일이란 무엇일까.

정기훈은 전화기에 입력되어 있는 전화번호로 샌드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네 번의 신호가 갈 때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다. 2,3분뒤에 다시 시도 해보았으나 마찬가지다. 메세지를 남길까 하다가 정기훈은 그냥 전화를 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단이가 자기에게 큰일났다는 메세지를 남길 일이 없을 것 같다. 정기훈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얼굴이 굳어진다.

혹시 금아의 신상에 관계된 것은 아닐까? 정기훈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급한 몸놀림으로 금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또르르, 또르르…….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정기훈은 다시 미단이에게 전화를 한다. 역시 신호만 갈 뿐 대답을 않는 미단이의 전화. 정기훈은 목청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한 마디 남긴다.

“정기훈입니다. 전화해 줘요”

일주일 전 피트니스 센터에서 처음 본 미단이. 당돌한 표정으로 다짜고짜 시간을 내달라고 요청하던 여자.

그녀가 정기훈을 만나고 싶어했던 것은 금아때문이었다. 그날 정기훈은 미단이로부터 금아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았다. 금아에게 선물했던 피트니스 회원권의 행방을, 그러니까 금아가 잃어버렸다고 했던 피트니스 회원권의 행방도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금아가 제게 주었어요, 그 회원권. 자기는 필요없다면서….”

피트니스 회원권을 미단이에게 주기 전. 어쨌든 금아는 피트니스 회원권을 선물받은 것을 계기로 운동을 시작해 볼 용기를 내었더라고 했다. 새벽에 피트니스 센터에 한번 가보기도 했고 식구들에게 운을 떼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운동하는 것을 포기했고 자기에게 그 회원권을 넘겨주었다는 것이다.

“제가 금아를 십여년 넘게 알아요. 고등학교때 부터 알았으니까요….”

이혼하고 친정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동굴속의 곰처럼 칩거중인 금아라고 했다. 그러니까 단 한번도 새로운 일을 시도하기 위해 운전해 밖에 나가본 적이 없는 금아라고 했다. 그런데 새벽에 피트니스 건물까지 갔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제가 보기엔….대단히 외람된 말씀같지만 제가 보기엔 정 선생님만이 금아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사람같아요.햇빛아래 나올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미단이의 입에서 나온 금아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는 정기훈이 대충 짐작해 온 것과 얼추 맞아떨어졌다. 이혼에 따른 충격, 그러니까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으로 크나큰 상처를 받은 여자. 그래서 세상과 등을 돌린 여자. 만사가 다 심드렁하고 의미가 없는 여자. 인생에 별 가치를 두지 않고 막 살고 있는 여자.

금아의 집에서 마루를 깔던 두번 째날, 금아의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을 보았다. 금아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바닥에 앉아 금아가 끓여온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금아가 먼저 나, 한번 결혼했었어요. 여기 사진 한번 볼래요, 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보여주던 사진이었다.

사진 안에서 금아는 활짝 웃고 있었다. 새둥지같은 머리에 여기저기 음식물 자국이 눌어붙은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친 채 촛점없는 눈을 하고 있는 지금의 금아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같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환한 얼굴로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금아 옆에 서 있는 남자,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정기훈은 깜짝 놀랐다. 그는 지금 이 동네에서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부동산 투자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던 인물. 내세울 거라고는 돈밖에 없으면서 그 돈을 바탕으로 뛰어난 미모에 실력을 갖춘 열몇살이나 어린 유학생과 결혼했다는 인물. 그래서 한국 남자들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몸에 받던 남자가 바로 금아의 전 남편이었던 것이다.

참 세상은 넓고도 좁구나!

그 남자는 석효랑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몇번 본 남자였던 것이다. 토니라 했던가, 이름이. 어디에 그런 돈복이며 여자복이 붙었는가 싶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특별한 데나 특징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을 만큼.

“형. 역시 남자는 돈이 많아야 해.”

아나운서같이 깔끔하고 잘 생긴 인물로 엄청 여자를 골라대더니 마침내 참하고 예쁜 여자랑 결혼한 석효였다. 그랬으면서도 토니가 부러웠던지 입맛을 다시면서 석효가 말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간에 일단 돈이 많아야 내 입맛에 맞는 여자를 골라잡을 수 있으니까…..”

석효가 토니를 힐끔거리며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떻게 들으면 기분이 나쁜 말 일 수 있는데도 토니는 그저 빙긋이 웃기만 했었다.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현재 부인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잔뜩 배있었다. 온 동네 남자들이 부러워하는 주인공이 바로 자기라는 뿌듯함도 숨길 수 없이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전 부인이 바로 금아였다니.

전화기의 사진을 보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정기훈은 무척 놀랐지만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내색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안타까왔을 뿐이다. 남자는 어린 여자랑 다시 결혼해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여자는 이혼의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피폐해져가고 망가져가고 있는 사실이.

“이혼하고 금아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어요. 본인의 뜻과는 무관한 이혼이어서 그랬을 거예요......”

금아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들과의 모임에도 일절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과도 접촉을 피한다는 것이다. 연락을 주고 받는 사람은 오로지 미단이 한사람이라고 했다. 다행히 미단이한테만은 아직도 이런저런 얘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이다.

“무서워요. 혹시 저러다가 잘못되기라도 할까봐…”

미단이의 얼굴에는 진심이 묻어나와 있었다. 진심으로 금아를 걱정하고 안타까와하고 있었다.

“바쁘시겠지만 제 친구를 좀 도와 주세요”

미단이는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은 금아를 예전처럼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게 하는 거예요. 그 정상적인 생활이라는 게 다름이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면 자고 때 되면 밥을 먹게 하는 것이구요. 그리고 나아가서 집 밖으로 끌어내는 일인 것 같아요.”

정기훈은 미단이의 말을 들으며 몇달전 공원에서 보았던 금아를 생각했다.

무표정했고 아무 감정이 없는 마네킹같던. 그러나 회원권을 내밀었을 때 살짝 눈물을 보이던.

“우선 전화라도 좀 자주 해 주세요”

미단이가 말했다. 미단이를 제외하고 지금 유일하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사람이 정기훈인 것 같다고.

“정 선생님과 제가 힘을 합치면 금아를 바깥으로 나오게 하는 일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래, 얘기를 듣고 보니 참 가엾고 딱한 여자다. 그 가엾고 딱한 여자에게 힘이 된다면 그 정도야 할 수 있지….

“알았습니다”

정기훈은 대답했다.

“잘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도를 한번 해보도록 하지요….”

미단이와 헤어지고 돌아온 날 저녁 정기훈은 컴퓨터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詩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무 이유와 용건 없이 불쑥 전화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보다 일단은 지난 번에 날려준 ‘날개’에 버금가는 시를 금아에게 보내주고 싶었다. 꽁꽁 얼어붙은 금아의 가슴을 따뜻하게 녹일, 감동을 일으킬 만한 시 한 편을 보내주고 싶었다.

공대출신답게 시니 소설이니 하는 부분에는 관심조차도 없고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도 없었던 정기훈이었다. 그런 정기훈이 가당찮게도 인터넷에서 시를 고르고 있다. 자신이 어이없어서 정기훈은 몇번이나 헛웃음을 웃기도 했다.

뭘까. 과연 무엇일까. 금아라는 여자에게 자꾸 관심이 가는 것은.

정기훈은 곰곰히 생각했다.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말로 아니다. 죽어도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을 걸고 사랑은 아니다. 그런데도 자꾸 마음이 간다. 왜일까. 자꾸 마음이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눈이 아플 때까지 컴퓨터 화면앞에서 몇시간을 보낸 끝에 정기훈은 마침내 마음에 쏙 드는 시 한편을 찾아냈다.

 

샬롯 브론테가 쓴 ‘인생’이란 시였다.

인생은 정말 현자들 말처럼
어두운 꿈은 아니랍니다
때로 아침에 조금 내린 비가
화창한 날을 예고하거든요
어떤 때는 어두운 구름이 끼지만
다 금방 지나간답니다

소나기가 와서 장미가 핀다면
소나기 내리는 걸 왜 슬퍼하죠?
재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인생의 밝은 시간은 가버리죠
고마운 맘으로 명랑하게
달아나는 그 시간을 즐기세요

가끔 죽음이 끼여들어
제일 좋은 이를 데려간다 한들 어때요?
슬픔이 승리하여
희망을 짓누르는 것 같으면 또 어때요?

그래도 희망은 쓰러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탄력 있게 일어서거든요
그 금빛 날개는 여전히 활기차
힘있게 우리를 잘 버텨주죠

씩씩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시련의 날을 견뎌내 줘요
영광스럽게, 그리고 늠름하게
용기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그 시라면 금아의 가슴에 미세한 변화가 일어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한꺼번에 많은 걸 기대할 수는 없다, 하고 정기훈은 생각했다.

거미줄처럼 얇고 가는 변화라도 생긴다면 일단은 성공한 셈이니까.

금아에게 시를 보내놓고 정기훈은 밤 늦게까지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혹시라도 금아에게서 답장이 오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밤이 늦도록 금아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 다음날도.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변화를 보일 여자가 아니지….

그러다가 정기훈은 몸살이 났고 사흘동안 죽도록 앓다가 지금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거다.

역시 금아에게서는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전화를 한 번 해보리라. 전화해서 뭐라고 할까. 왜 남의 성의를 무시하냐고, 그 딱딱한 돌머리로 시를 이해는 했냐고 시비부터 걸어봐야지……

금아에게는 평범한 여자 대하듯 하면 안될 것 같다. 좋은 반응이든 나쁜 반응이든 반응을 이끌어내려면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할 것 같다.

정기훈은 다짐을 한다. 미단이의 부탁을 봐서라도 시도는 해보리라. 정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고…..

꾸역꾸역 억지로 집어넣은 라면이 짰던지 목이 마르다. 찬물은 안 될 것 같고 뜨거운 물을 끓여 녹차라도 한잔 더 마셔야지.

정기훈은 부엌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때 등 뒤로 전화벨이 또르르 울었다. 정기훈은 전화를 받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이없게도 이 전화가 금아로부터 걸려온 것이었으면 하는 작은 기대가 그의 가슴에 떠 올랐다. 금아라면 지금 억지로라도 나오게 해서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고 싶다. 한국식당에 둘이 갔다가는 금방 소문 날 테니까 어디 작은 미국 식당에 가서 뜨거운 치킨 수프를 마주 앉아 먹고 싶다…..

그러보니 내가 참 많이 헛헛하고 외로웠나보다라는 생각을 전화를 받으러 가는 그 짧은 순간에 정기훈은 했다. 그러나 전화는 미단이로부터 걸려 온 거였다.

“저예요. 미단이예요”

“예……”

“금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