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버지…불쌍한 아버지….불쌍한 나의 아버지……..

은아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몰랐었다. 정말 몰랐었다. 아버지가 많이 아팠다는 사실을. 매일 죽음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 무서운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루하루 자신의 명이 타는 촛불처럼 사그러들고 있는 것을 인지하면서,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삭여내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그리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제는 편안한 데로 가셨으니 괜찮으실 거다,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지만 아직도 문득문득 어르신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슬픔과 애통함을 주체할 수가 없어요.”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은아는 눈물이 범벅이 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도 울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작은 키에 왜소한 몸집을 가진 남자, 그러나 선하고 착한 인상을 가진 남자가 울고 있었다.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은아는 남자의 얼굴에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보았다. 그가 아버지를 많이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고..고맙습니다…..”

지금 은아가 남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살아 생전 가족들로부터 받을 수 없었던 존경과 사랑을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으로 받았던 아버지. 이 남자라도 옆에 있어 그나마 아버지가 외롭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남자가 무척 고마운 것이다.

지금 은아는 박장수라는 남자와 커피집에 앉아 있다. 아버지가 평소 속깊은 얘기를 털어 놓았다던 남자. 며칠전 언니 금아가 전해 준 쪽지속의 남자.

“난 아버지에 대해 별로 전해 들을 얘기가 없어.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은아 네가 만날 생각이 있거든 연락해 보렴.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버려도 좋고……”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아들 때만 해도 은아는 박장수란 사람에게 연락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언니 금아와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와서 괜히 듣지 않아도 될 얘기를 들어서 후회만 사무치고 가슴만 더 아플 걸, 하는 생각이 들었던 때문이다.

그러다가 불현듯 아버지가 직장에 찾아왔던 생각이 났다.

노인들이 말했다. 생전 안 하는 짓을 하는 사람을 주시하라고.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평소 안 하던 짓을 한다고.

아버지가 은아의 직장을 찾아 온 일은 아버지가 생전 안 하던 ‘짓’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몇달 후 죽었다. 사고사인줄 알았는데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혹시 우리 가족이 모르고 있는 어떤 일이 아버지에게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은아는 부랴부랴 박장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그리고 박장수라는 남자로부터 아버지가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은아의 직장을 찾아 왔을 때, 왜 그때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못했을까.

박장수란 남자의 말로는 아버지에게 암이 발병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올봄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때 아버지는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닌가.

은아는 후회로 마구 가슴을 치고 싶었다. 앞에 앉은 남자만 아니라면 마구 통곡하며 땅바닥을 뒹굴고 싶었다. 그렇게해서라도 아버지에게 속죄하고 싶었다.

아버지! 머지 않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아무런 내색도 없이 딸의 직장으로 찾아와 점심을 사주던 아버지!

뜬금없이 아버지가 은아의 직장으로 찾아온 것은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잡아온 생선으로 매운탕 파티를 벌인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나다. 은아야. 점심같이 먹으려고 하는데 시간이 어떻게 되니?’하는 문자 메세지를 받고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일식집으로 갔을 때.

점심을 하기에는 좀 이른 편이라 식당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로비에 출입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한 노인만 있을 뿐. 앉아 있음에도 키가 매우 작다고 느껴지는 한 노인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채 앉아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은아는 곧 그 노인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았다.

저 왔어요, 하고 은아가 옆으로 다가갔을 때 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이구, 우리 은아 왔구나”

아버지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쩐 일이예요 아버지? 아버지가 저랑 점심을 먹기 위해 제 직장을 다 찾아 오시고?”

은아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아버지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자리를 안내하는 웨이츄레스 뒤를 따라가며 재차 묻자 아버지는 짧게 대답했다.

“갑자기 은아, 네가 보고 싶어서……..”

테이블에 둘이 마주 앉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눈이 부신 표정으로 은아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말했다.

“은아, 너는 여전히 곱구나. 내 딸이지만 정말로 고와….”

아버지의 표정은 밝고 환했다. 그러나, 그러나. 은아는 그때 느꼈었다. 아버지가 많이 노쇠했다는 것을. 얼굴 빛이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그때 조금만 더 아버지의 얼굴을 살펴보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버지가 많이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 사실을 엄마와 언니 금아에게 알리고 병원에 억지로라도 가게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더라면 좀 더 잘해 드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은아는 당시 아버지의 심중이나 모습을 헤아리고 살펴볼 마음의 경황이 없었다. 새로 선 봐서 만난 남자, 캐빈이란 남자가 머릿속에 가득 들어와 있었으므로. 이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긴 인연을 엮어 갈 수 있을 사람인지 아닌지 분석하고 파악하느라 바빠서. 그래서 아버지에게 소홀했었다! 아버지란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은 죽은 사람을 앞에 놓고는 해당되지 않은 말이다. 아무리 후회하고 울어봐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올리가 없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나서야 은아는 왜 그때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그때 마지막으로 은아에게 작별인사를 하러왔던 것이다.

엄마의 기세에 눌려서인지 원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일에 서툰 아버지가 그날 은아에게 말했던 것이다.

“은아야. 아버지는 은아를 많이 사랑한단다….”

아버지로부터 처음 듣는 생소한 그 말에 은아는 그저 웃기만 했었었다. 그리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는 그때 혼신의 힘을 다해 그 한마디를 했던 것 같다. 평생 심중에 담아 놓고만 있었던 말, 어색하고 쑥스러워서 하지 못했던 말을 죽음을 앞두고 딸에게 해 주기 위해 찾아온 아버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버지는 그때 금아를 부탁하는 말도 했던 것 같다.

네 언니 금아를 불쌍하게 여겨 주어라. 은아 네가 금아를 잘 보살펴 주어라. 나는 항상 금아가 가슴에 걸린다, 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은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었다. 내일 죽을 사람같이 왜 그래요, 아버지?

아버지는 주문한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물만 계속 마셨을 뿐이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은 은아는 정신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을 먹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은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넓은 창문으로 들어 온 햇빛때문이었을까. 그때 아버지의 얼굴은 유난히 파리하고 창백했었다.

아버지가 암에 걸렸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못한 채 은아가 괜찮아요, 아버지?얼굴색이 안 좋아요,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을 때 아버지 역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음. 괜찮아. 전날밤 과음해서 그렇겠지. 네 엄마 매운탕 양념 솜씨가 여전하더구나. 덕분에 소주를 두 병이나 비우지 않았니, 하고. 아버지는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 날 이후 몇달동안 은아는 아버지와 얼굴을 다시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했다. 은아와 근무시간이 달라 얼굴을 마주 할 기회가 없었을 뿐더러 쉬는 날에도 아버지는 낚시를 하러가서 항상 집에 없었으므로.

어쩌다 집에 있는 날도 아버지는 뒷뜰에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겨 있거나 거실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은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상견례를 연기 시킨 후부터 말수가 없던 아버지는 더욱 말이 없어졌다. 아버지에겐 항상 우울하고 어두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지만 그 기운이 더욱 짙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잖아도 냉랭했던 집안 분위기는 아버지로 인해 더욱 냉랭해지고 있었지만 어쩔수 없다고 은아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캐빈의 마음이 돌아서게 되면 평생 미혼모의 낙인을 찍은 채 살 수 밖에 없지 않냐는 엄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할 수 없지 뭐, 하는 생각도 했다.

 

은아는 시간이 필요했다. 좀 더 생각할 시간. 미혼모까지는 괜찮은데 이혼녀는 되기 싫었으므로.

캐빈은 그때까지 그랬던 것 처럼 은아가 상견례를 연기시킨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하고 자책하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조건들이 은아의 마음을 변하게 했을 거라면서.

은아가 갖은 이유를 대며 설득하자 은아씨의 뜻이 정 그렇다면요. 그렇지만 빠른 시일내에 다시 날짜를 잡아요, 하고 마지못해 응해주었다.

그리고 은아가 몇날 며칠을 고심하다 내린 결론이 있었으니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이다. 캐빈과 결혼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처음엔 임신까지 했으니 캐빈과의 결혼은 기정사실이다 하는 마음이 앞섰었다. 그러나 날이 가면 갈수록 그런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아이 낳아 혼자 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임신때문에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어쨌든 아이의 아버지니까 이 결혼은 해야 한다로 마음이 굳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면서도 한가지 확실한 게 있었으니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낳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낙태’라는 발언을 했을 때, 그리고 언니가 임신때문에 억지로 엮어져서 평생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느니 낙태를 하는 것도 나쁠 게 없지 하는 말을 했을 때도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펄펄 뛰었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은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왜냐면 아이를 낳기로 결심을 완전히 굳혔으므로. 캐빈과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아이를 반드시 낳겠다는 신념이 생겼으므로.

처음, 임신을 확인했을 때 충격과 두려움에 휩쌓여 잠깐 낙태할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의 표현대로’ 천인 공노’ 할 생각이었다. 내가 처한 상황과 편리에 따라 귀한 생명을 지울 생각을 했다니. 이제는 옆에서 그 누가 뭐라한다해도 은아는 아이를 낳겠다는 뜻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혹시 어르신이 생명보험같은 것은 들어 놓은 것이 없으시던가요?”

남자가 냅킨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문득 생각난다는 듯이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은아가 당혹스런 표정을 보이자 남자가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말했다.

“어르신은 젊을 때부터 자기는 오래 못살 것 같다는 생각을 항상 하셨대요. 칠십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늘 들었답니다”

“…………”

“어르신네 가족이 단명한다고 하셨습니다. 암에 취약하다고 하셨어요. 부친을 비롯해 남자들이 거의 나이 육십을 겨우 넘긴 나이에 다 돌아가셨다고……”

그렇다. 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고 증조 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혹시 그런 걸 들어놓지 않으셨을까 하고……”

“…………”

아버지는 엄마에게 백만불이나 되는 보험금을 남겼다. 아버지가 언제 그 보험에 가입했는지 약관을 살펴보지 못했다. 그러나 은아가 알기로 생명보험이란 것은 가입할 때 혈압 검사, 암 검사, 당뇨 검사등 온갖 검사를 한 후 건강하다고 판정이 날 경우에만 들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는 건강할 때 그러니까 암이 발병하기 전에 오래전에 보험을 들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언젠가는 자신이 발병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다는 애기인가.

그랬구나…. 그랬었구나……

새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은아의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그런데 아버진, 저의 아버진 무슨 암이었어요?”

은아는 울음에 잠긴 목소리로 남자에게 물었다. 가족도 모르는 아버지의 병명을 이 남자는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특히 엄마는 말이다. 부부는 무촌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는 사이가 아내와 남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엄마에게 자신의 병명을 숨겼다. 평소 엄마가 얼마나 아버지를 무시하고 모질게 했으면.

과연 엄마는 아버지가 남긴 보험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폐암이었습니다….”

남자가 이마에 주름을 모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자신의 몸에 암 세포가 자라고 있는 줄을 전혀 몰랐었다고 했다. 왜냐면 작년 겨울까지만 해도 아무런 증상이 없었기에. 그랬는데 올해 초부터 몸무게가 조금씩 빠지고 잦은 감기 증상이 나타나더니 피 섞인 가래가 나왔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감기같다면서 감기약만 계속 복용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올봄, 남자와 단 둘이 간 낚시터에서 아버지가 각혈과 호흡곤란의 증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남자가 부랴부랴 그 길로 서둘러 아버지를 병원으로 데려 갔고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3기를 넘어 4기로 진행되고 있다고 했어요……”

남자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진작 검사를 받으셔야 했었는데 차일 피일 미루다가 병을 더 키우신 것 같아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이놈의 미국이란 나라는 보험이 없으면 죽을 때까지 병을 더 키워야 하는 나라이니까요….”

아버지는 그동안 의료보험이 있었다. 아버지가 다니고 있던 덴탈랩에서 의료보험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작년 초, 회사측에서 불경기를 이유로 아버지의 근무시간을 줄여버렸고 따라서 의료보험 혜택도 중단돼버렸다. 아버지가 건물 경비일을 찾아 나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수입이 줄어들었기에. 그러나 경비일 또한 정식 직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다.

“어르신이 65세만 되었어도 나라에서 제공하는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남자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불쌍한 아버지… 몹쓸병에 걸렸지만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떠난 아버지…..

은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 불쌍한 아버지가 이제 옆에 없다는 사실이 은아의 가슴을 찢어지게 했다.

“그런데 어르신의 행동이 좀 이상했어요…..”

남자의 말에 은아가 고개를 들었다.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사람, 그러니까 생에 애착을 놓아버린 사람같았어요”

아버지는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는 사람같았다고 했다. 폐암 3기라는 진단을 의사로부터 전해들었을 때도 전혀 놀라지 않더라는 것이다. 마치 감기 몸살입니다. 푹 쉬고 안정하면 곧 나을 것입니다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처럼 담담하고 침착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의사가 치료 수순에 대한 설명을 하자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고 했다.

“어르신은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은 항암치료를 받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사는 데까지만 그냥 살다가 조용히 가시고 싶다고 하셨어요”

또한 아버지는 남자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어르신이 수차례 당부하셨어요. 절대로 본인의 가족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

“보험도 없는데 가족에게 부담만 주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셨습니다. 자신은 짐이 되는 게 싫다고 하셨습니다….’

“………..”

“치료만 잘 받았더라면 몇년은 더 사셨을 걸…….”

남자가 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았다.

“제가 아버지 없이 자랐어요. 제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거든요. 어르신은 제게 꼭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제게는 아버지같이 푸근하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분이셨어요”

“………”

“ 제 둘째 아이가 달수를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어요. 걸핏하면 경기를 일으켜요. 그래서 병원으로 달려가는 경우가 많이 생겨요. 와이프는 운전을 못하고 천상 제가 갈 수밖에 없는데 어르신에게 제 대신 근무를 부탁하면 언제든지 들어주셨어요. 한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어요”

“………..”

“여러명이 어울려 다니기도 했지만 어르신과 저, 이렇게 둘이서 낚시를 가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요. 평소엔 별로 말씀이 없는 분인데 낚시터에서는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는 이 남자, 박장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아니다. 딱 한마디 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책이나 신문 읽는 것 외엔 별다른 취미가 없던 아버지가 언젠가부터 낚시를 다니기 시작하면서였다. 아주 착하고 좋은 동료를 알게 돼서 많은 의지가 된다고.

“장례식에 도저히 참석할 수가 없었어요. 아이가 경기를 일으켜서 응급실에 가긴 했지만 와이프한테 맡겨 놓고 달려 갈 수도 있었는데 도저히 어르신의 마지막 가는 길을 맨정신으로 지켜 볼 수가 없어서…. 그래서…..”

남자가 고개들어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대신 그날 저녁에 혼자 어르신의 묘소를 찾았습니다. 소주 한 병을 같이 나누고 이런저런 애기를 하다가 돌아 왔지요. 앞으로도 소주잔 나눌 사람이 필요하면 어르신을 찾아 갈 생각입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은아가 남자를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행복한 사람이다. 소주병 들고 찾아 갈 친구를 만들어 놓고 갔으니.

“어르신은 부인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이 없으셨어요”

남자가 은아를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부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았지요. 아주 미인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많이 궁금했거든요. 그런데도 별다른 말씀을 안 하셨어요…”

“예에……”

엄마에 대해서 할 얘기가 없는 게 당연하다. 무슨 말을 할까. 늘 자기를 무시하고 구박하고 결혼한지 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결혼 잘못해서 자신의 신세가 그 모양이 돼버렸다고 푸념한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대신 어르신이 따님들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요. 아가씨 얘기도 가끔 했었지만 금아라는 큰 딸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하셨어요”

“...........”

“가엾다고요…..불쌍하다고요….그래서 늘 가슴이 아프다고 했어요”

그랬을 것이다. 언니는 아버지에게 항상 아픈 손가락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평소에 언니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금아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었다. 그런데 이 남자에게는 금아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가슴아파 했다고 한다. 그게 아버지의 사랑의 방식이었나.

아버지는 은아의 결혼에 대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다. 만약 은아의 인생에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관여하고 나서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캐빈이라는 남자를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캐빈과 결혼하는 것을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혼란스럽다고 가족들에게 말하고 상견례를 미루어 놓았지만, 그 후 다시 잡은 상견례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다시 연기되었지만 은아는 캐빈이 무섭고 두렵다.

같이 잠을 자게 되고 집에까지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온 후에야 알게 된 캐빈이란 사람의 실체. 그는 하루에도 몇번 전화통화를 해서 은아의 일상을 확인하는 사람이었다. 은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다 확인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지금 핸드백 안에 들어 있는 휴대전화에는 적어도 서너통 이상의 전화와 문자가 걸려와 있을 것이다. 남자와 얘기를 나누느라 두어시간 동안 전화를 꺼두고 있었으므로. 캐빈은 은아가 응답할 때까지 속사포같이 전화와 문자를 해대는 것이다.

평생을 엄마의 사랑이란 허울아래 옴짝달싹 못하고 살다가 결혼이라는 것을 해서 똑같은 상황에 처해질까봐 정말이지 무섭다.

엄마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엄마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 얼음판 걷듯 조심조심 살아왔는데 결혼을 해서도 똑같은 전철을 밟게될까봐 정말이지 무섭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퍼부어지는 가족에 대한 불평과 험담과 욕과 흉. 캐빈은 아버지를 비롯한 누나들을 거머리로 늘 표현했다. 자신의 몸에 기생하면서 선혈을 빠는 거머리.아무리 자기가 번 돈으로 부양을 한다하나 피를 나눈 가족들을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남자에게 결혼이라는 것은, 아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결혼과 더불어 전업주부가 될 생각을 하고 있는 은아, 은아 역시 거머리 취급을 당할 수도 있을 터였다.

노오란 불빛, 정겨운 웃음소리,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소리가 넘치는 따뜻하고 안락한 가정을 동경하고 원했던 은아였다. 그래서 결혼이란 제도를 통해 자신이 원했던 꿈을 이루어 보려 했던 은아였다. 그런데 그 꿈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오, 그리고 아가씨의 결혼에 대해서도 얼핏 지나가는 말씀처럼 한 마디 하신 게 기억나요”

“………..”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엄마의 강권이나 주위의 영향을 받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게 딱하다고….”

“…………”

“그 누구 말도 듣지 말고 자신의 소신대로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예에…..”

은아는 입술을 깨물면서 말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제 뜻대로, 제 소신대로 할 생각입니다”

그렇다. 내 인생이다. 엄마가 나를 아무리 사랑하고 아낀다 하나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엄마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트렌치 코트 위로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까지 배는 전혀 부르지 않고 있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다 .

아직 캐빈에게는 임신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안 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셔서 정말로 고맙습니다….”

은아는 앉은 자세로 깊숙이 허리숙여 인사했다.

“언제 식사대접을 꼭 할께요. 안녕히 가세요....”

은아는 몸을 일으켰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실내를 피해 파라솔이 쳐진 바깥에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지 아까부터 한기가 들더니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아무래도 집에가서 좀 누워야 할 것 같아서 은아는 걸음을 빨리 했다.

며칠전부터 기분나쁘게 아파오던 아랫배가 오늘 아침부터는 더 아픈 것 같다. 열이 있는지 머리도 아프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지를 못하고 잠을 못자서 몸이 허약해진 것 같다.

아버지의 사망을 핑계로 거의 열흘을 휴가내어 쉬었다. 내일부터는 출근도 해야 하는데….

마음같아서는 출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다. 사람이 없는 어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다. 몸도 마음도 지쳤다, 하고 은아는 차문을 열면서 생각한다.

차안으로 돌아온 은아는 핸드백을 열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네개의 문자와 세개의 메세지가 들어와 있었다. 모두 캐빈에게 온 것이다.

은아는 한숨을 쉬면서 캐빈에게 전화를 한다. 한번 신호가 가자 기다렸다는 듯 헬로우, 하고 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캐빈.

“저예요”

“도대체 어디야, 지금?”

캐빈의 목소리에 화가 잔뜩 묻어 있었다. 두어 시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으니 평소의 캐빈으로 봐서 화가 날 만도 하다.

“누구를 좀 만나느라…”

“누구?”

“…………”

“누구를 만났는데?”

“아버지 친구……”

“아버지 친구? 아버지 친구를 당신이 왜 만나?”

“………….”

“아버지 친구를 당신이 왜 만나냐구……”

“그..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무슨 얘기?”

은아는 한숨을 쉰다. 정말로 비탄스럽다. 이 남자는 촘촘한 그물이다. 항상 자신을 옥죄어 온다. 꼼짝달싹도 못하게. 문제는 그 옥죄어 오는 강도가 날이 갈수록 세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짜는 잡았어?”

“무..무슨 ?”

“이런! 이봐, 은아씨!”

캐빈이 전화기 속에서 크게 목소리를 높혔다.

“날 말려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말아줘!”

“………..”

“상견례 날짜! 그 날짜 말이야!”

“아…아직…”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가 기다려야 해?”

“………..”

“대답해 봐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구?”

“아..아버지 장례식 끝난지 보름도 안 되었어요…..”

대꾸할 기운도, 기분도 아니었지만 은아가 막막한 심정으로 겨우 한마디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니다. 이 남자는 경우라는 것을, 도리라는 것을 아는 남자인가, 모르는 남자인가.

“그래서?”

“……….”

“그래서 그걸 핑계로 마냥 미루겠다고?”

“핑계가 아니라…..”

“그렇다면 도대체 뭐야, 지금?”

“……….”

가을의 초입이다. 하늘은 흐리고 은아의 마음도 흐리다. 파킹랏에 앉아 이런 재미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 아니다. 그냥 어디가서 실컷 울었으면 좋겠다.

“일..일단 집에 가서 다시 전화를 할께요”

“이봐요 은아씨?!”

캐빈이 뭐라고 더 말하려는 것을 무시하고 은아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핸드백에서 열쇠를 집어드는 찰나, 은아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아랫배에 엄청난 통증이 밀려 오는 것이다. 칼로 저미는 것과 같은 통증이!통증과 더불어 뭔가 물컹한 것이 빠져나오는 것 같아서 은아는 몸을 반으로 접은채

황급히 치마를 들추어 보았다. 그리고 은아는 다시 아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피가, 시뻘건 피가 팬티를 비집고 폭포처럼 마구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