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가는 기척에 금아는 눈을 떴다.

실내는 아직도 캄캄하다. 그러나 아침이 멀지 않은 듯 창문밖은 뿌옇게 밝아 있다.

금아는 도로 눈을 감았다. 머리가 돌을 단 듯 무겁다.

금아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옆을 더듬어 보았다. 미단이의 팔이 잡힌다. 미단이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일어서 나간 사람은 정기훈이다.

이 이른 아침에 정기훈은 왜 벌써 일어났을까. 그리고 그는 왜 바깥으로 나갔을까.

이불을 끌어 당겨 미단이에게 덮어주면서 금아는 출입문 바깥쪽으로 귀를 귀울여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 어쩌면 정기훈은 담배를 피우러 나갔을 것이다. 어저께 운전하면서 차창 문을 세 번이나 내렸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그때마다 정기훈은 말했었다.

“이거 이쁜 아가씨들 계신 데서 냄새를 풍겨서 미안한데 지금 한대 피우지 않으면 차창 밖으로 뛰어내려버릴 것만 같아서…”

한동안 끊었더랬지요, 하고 정기훈은 말했다. 끊긴 했지만 완전히 끊었던 것은 아니고 어쩌다가 긴장하거나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 그냥 한두대 피우던 담배라 했다. 그러나 최근, 속상하는 일이 있어 다시 시작했는데 지금은 끊기 전보다 더 많이 피운다고 했다.

그 ‘속상한 일’이 무엇인지 정기훈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아는 궁금했었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울 정도로 정기훈을 속상하게 했던 일은 무엇일까. 사업에 관한 것일까. 여자에 관한 것일까. 인간관계에 관한 것일까. 자식에 관한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금아는 얼굴을 붉혔다. 세상만사 궁금한 게 없던 금아였다. 이것도 시큰둥, 저것도 시큰둥. 이것도 별로, 저것도 별로였던 금아였다. 딱히 알고 싶은 것도 없고 굳이 알아야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금아였다. 그런데 정기훈이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니.

몸에 좋지도 않은 걸 뭐하러 다시 피우세요 하고 정기훈의 옆자리에 앉은 미단이가 말했을 때 정기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끊어야죠.

그래요. 끊으세요. 혼자 사시면서 제대로 챙겨먹지도 못할 것인데 담배까지 피워대면 몸이 남아나겠어요. 하루라도 빨리 끊으세요. 금아는 정기훈을 향해 말했다.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정기훈.

그의 얼굴이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어딜 갔다 내놔도 빠지지 않을 듯한 풍채는 여전했으나 얼굴에 그늘이 있다. 여전히 하하하, 잘 웃고 잘 이죽거리고 농담 잘 하는 것도 여전했으나 목소리에 예전처럼 활기가 없다. 힘이 없다. 그 ‘속상한 일’이 정기훈을 변하게 했을까.

그러고 보니 금아도 담배생각이 간절했다. 아침에 눈 뜨기 시작해서 틈만 나면 무는 담배. 어제 오후 미단이와 정기훈을 만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단 한대도 피우지 못했다.

금아는 몸을 일으켰다. 정기훈이 바깥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얼른 나가서 담배를 한대 피워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더듬더듬 소파쪽으로 가서 어제 저녁에 벗어놓은 스웨터를 집어 들으려다 금아는 잠시 손을 멈추었다. 담배보다는 커피를 한잔 먼저 마셔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금아는 어저께 밤 부려놓은 짐더미속에서 인스턴트 일회용 커피 봉지를 찾아 들고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행여 미단이가 깰까, 발소리를 죽이고.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아무 살림살이와 장식도 없는 황량하고 휑한 부엌의 모습이 드러났다. 다행히 스토브 위에는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다. 금아는 주전자를 가져다가 소리나지 않게 물을 받았다. 그리고 머그를 찾기 위해 캐비넷 문을 열었다. 두번째 캐비넷 안에 각양각색의 머그잔이 가득 들어 있었다.

금아는 빨간 모자를 쓴 아이가 그려진 머그 잔 한개를 꺼내고 캐비넷 문을 닫으려다 다시 아무 무늬가 없는 흰색 머그 잔 한개를 더 집어 든다. 정기훈에게도 커피를 한잔 주어야 할 것 같아서다.

금아는 머그 잔 두 개에 일회용 커피 두 개를 각각 털어넣었다. 그리고 금아는 배낭에서 빗과 로션과 치약, 칫솔을 꺼내 목욕탕으로 갔다. 물이 끓을 동안 세수라도 해야지....

목욕탕 불빛은 밝지 못했다. 거울 위에 조르륵 달린 다섯개의 전구 중 두개에만 불이 들어오고 있어서. 침침한 불밑에서 금아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버지가 떠나가고 은아가 유산을 하는 등 충격적인 일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신경이 쓰였나보다. 얼굴이 핼쓱해진 것 같다. 그리고 살도 많이 빠졌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이후 식사다운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올 봄, 정기훈을 만나러 나가기 위해 입어보았던 청바지, 허벅지에 걸려 올라가지 않던 청바지가 맞는다. 지금 입고 있는 청바지가 바로 그 청바지이다.

살이 빠지고 얼굴이 핼쓱해져서일까. 아니면 전등불빛이 침침해서일까. 금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이 그런대로 괜찮아 보인다고 생각한다.

금아는 머리에 물을 묻혀 뒤로 빗어 묶는다. 양치질을 하고 얼굴을 씻고 로션을 바른다. 얼굴에 와 닿는 로션 향이 참으로 좋다.

손바닥에다 로션을 조금 더 덜어 손등에도 문질러 바른다. 얼굴을 씻은 후 로션을 꼭꼭 바르기 시작한 게 얼마되지 않았다. 그전에는 없던 일이다. 그러다가 정 얼굴이 당기면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 거나 발랐었다. 곧 죽어버릴 건데 그런 건 발라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서다. 그러던 금아가 언제부터인지 로션을 바르기 시작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죽을 때 죽더라도 말이지……

거울을 보면서 금아는 빙긋 웃는다. 그 죽을 때 죽더라도 하는 생각이 많이 옅어졌다. 어쨌든 당분간은 살아있어야 한다. 엄마와 은아때문이다.

평생을 구박하고 무시하고 핍박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백만불이란 보험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갔다는 사실에, 그리고 암에 걸렸으면서도 치료를 거부한 채 몇달을 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에, 그러니까 아버지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라 ‘자살’쪽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엄마는 반 정신이 나간 상태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고 매일 울고만 있다.

거기다가 은아 또한 유산이 되어버렸다. 캐빈이란 남자와 결혼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뱃속에 든 아이한테만은 강한 애정과 집착을 보이던 은아였다.

병원에서 유산이란 판정을 받은 후, 남은 태반을 긁어내는 수술을 받은 후 집에 돌아온 은아는 직장도 그만 둔 것 같다. 그냥 방안에만 있다. 가끔 화장실에 가는 기척이 있고 커피를 마시러 부엌에 나가는 걸 보면 살아 있기는 한 것 같은데 방안에서 혼자 뭘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절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집안을 뒤덮었던 어둡고 음울한 기운이 은아때문에 더욱 짙고 검어진 것 같다. 말소리가 끊어졌다. 예전에도 화기애애하거나 밝은 분위기의 집은 아니었지만 가끔은 엄마와 은아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고 엄마가 보는 한국 연속극 소리가 나기도 했었고 아버지와 금아, 그리고 은아를 향해 퍼붓는 엄마의 잔소리가 집안을 울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런 모든 소리가 끊어졌다. 정적만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모두 다 유령처럼 생활한다. 낮에는 각자 제방에 처박혀 있다가 밤이 되면 스르륵스르륵 발을 끌면서 나와서 볼일을 본다. 라면을 끓여먹거나 물을 마시거나 냉장고를 뒤지거나.

미단이가 정기훈이랑 같이 여행을 가자는 제언을 해왔을 때 금아는 두말도 않고 예스, 했다.

숨을 쉬고 싶었다. 칙칙하고 무거운 침묵이 커텐처럼 드리워져 있는 집을 단 며칠만이라도 빠져나와 숨을 쉬고 싶었다.

그런 집안 분위기는 당분간 계속 될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죄책감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깊어질 것이고 은아 역시 별다른 변동이 없는 한 계속 그렇게 칩거할 것 같다. 겨울 잠을 자는 곰처럼. 동굴속의 곰처럼.

앞으로 은아가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 남자와 계속 만날지 안 만날지 마저도 확실하지가 않다.

그런 상태에 있는 두 사람이다. 그들에게 더 상처를 줄 수 없다. 두 사람이 금아를 의지하든 안 하든, 도움이 되든 않든 어쨌든 곁에 같이 있어주어야 할 것 같다. 어쨌든 그래야 할 것 같다.

참 이상하다, 하고 금아는 부엌으로 나오면서 생각했다.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엄마였었다. 눈꼽만치의 애정도 없는 줄 알았던 엄마였다. 오히려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이제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엾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에게 더 이상 큰 아픔을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은아의 임신에 대한 푸념을 하기 위해 엄마가 자신을 식탁에 불러 앉혔을 때 부터 금아는 엄마가 고마왔다.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 같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엄마는 금아를 이 집안의 일원으로 여겼던 듯 하니까. 그게 고마운 거다.

아버지의 보험금이 엄마 이름 앞으로만 되어있는 걸 알았을 때도 미운 마음이 조금 앞섰던 게 사실이다. 생전 아버지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뻔뻔하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매일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고 있다는 걸 안 순간 그런 미움이 없어져버렸다. 앞으로 죄책감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살아야 할 엄마다. 목을 옥죄는 후회때문에 평생동안 고통을 당해야 할 엄마다. 엄마에게 연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스토브 위의 주전자에서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금아는 머그 잔 두개에 물을 부었다.

“뭐하니?”

금아는 고개를 돌렸다. 미단이가 눈을 비비며 부엌 입구에 서 있다.

“으응…. 커피 타. 모닝 커피 한 잔 하려고…….”

“그래? 벌써?”

“끓는 물 남았는데 한 잔 타 줄까?”

“아니, 괜찮아”

미단이가 하품을 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잠이 안 와서…..”

“그런데 왜 커피잔이 두 개야? 정기훈씨 거?”

으응, 하고 대답하며 금아는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미단이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하품을 하더니 몸을 돌린다. 나, 화장실 갔다가 좀 더 잘 테니까 깨우지 말아 줘.

거실을 가로 질러 나가서 현관문을 열자 한기를 느끼게하는 바람이 금아의 몸을 덮쳤다. 어느덧 동쪽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예상대로 정기훈은 출입문 앞 오른쪽 편편한 곳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담배갑과 라이터가 나무 탁자에 올려져 있었으나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먼 산을 향해 있다.

금아가 나가는 기척에 정기훈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금아를 보자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에 금아의 가슴에 찡, 하는 울림이 온다. 그동안 그 누구도 나를 향해 저토록 환한 미소를 지어주지 않았는데……

금아는 애써 도리질을 한다. 저 남자가 날 보고 저렇게 환하게 미소 지을 이유가 없지…..

“커피 드세요…..”

커피 드세요, 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걸 금아 자신도 느낀다. 누구 앞에서도 떨어본 적 없는 금아다. 지금은 그냥 자신도 모르게 떨린다. 목소리가 떨리고 다리가 떨리고 그리고 가슴이 떨린다.

“고마와요. 그렇잖아도 커피 생각이 간절했는데…..”

정기훈에게 커피잔을 건네고 금아는 몸을 돌린다. 산 쪽으로 좀 걸어 들어가서 담배를 피울 생각이다 .

금아가 몸을 돌리자 정기훈이 금아를 불렀다. 금아씨! 하고.

“어디 가요?”

“그…그…그냥….”

금아가 손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어깨를 부딪쳐야만 걸을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 시작되는 언덕이 거기 있다.

“저….저기… 저기로 좀….좀 걸..걸어 가 볼까 하고…..”

“산책을 하시겠다?”

“………..”

“이렇게 이른 아침에 여자 혼자 거길 걸으시겠다?”

“……….”

“일단 여기 앉아요. 조금 있다 나랑 같이 갑시다. 커피부터 마시고…”

“………..”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산짐승들이 나올지도 몰라요. 혼자 가면 위험해…”

“……….”

“얼른 앉아요”

“예에…..”

금아는 정기훈이 가르키는 의자에 가서 앉는다. 혼자 좀 걸으면서 담배를 피우려 했는데 다 틀렸다. 그러나 조금전까지만해도 간절하던 담배생각이 어느덧 사라져버리는 걸 금아는 느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담배 생각보다 정기훈이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 산속, 맑고 청아하고 차가운 공기속에 정기훈이란 남자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실이 담배생각을 잊게 한 것이다.

“담배를 피우러 나오긴 했는데 공기가 너무 좋아서인지 별로 생각이 없네요. 그래서 그냥 있어요. 차가운 공기속에 몸을 맡기고 앉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서”

“………”

그 뿐이다. 정기훈은 입을 다문다. 앉으라고 재촉하던 때와는 다르게 금아가 앞에 앉자 말이 없다. 아까처럼 먼산을 향해 시선을 주고 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몇시나 되었을까요”

어색한 침묵이 싫어서 금아는 짐짓 물어본다. 몇시든 알 바 아니지만.

“글쎄, 한 여덟시?”

해도 안 뜬 것 같은데 벌써 여덟시나?하고 금아가 의아한 표정을 보이자 산속이라서 해가 늦게 떠요 하고 정기훈이 말했다.

그렇다. 산속이다, 여기는. 미단이 직장 상사의 산장이 있는 산속. 사흘 머물 예정으로 어제 저녁에 도착해 와 있다. 이번 여행은 미단이가 다 책임지고 주선했다. 여기까지 오는 운전만 정기훈이 했을 뿐.

“저..저기…..”

금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고..고마와서….”

정기훈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해 주신 것…..”

조금전까지만 해도 표정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정기훈의 얼굴에 빙글빙글하는 웃음이 어린다.

“또?”

“………”

“또 있을 텐데….”

“피..피트니스 회원권, 그..그리고…백…백화점 선물권도 감..감사하고…”

“또?”

“……….”

“나한테 고마워 할 게 그것밖에 없어요?”

“………”

“좋은 시를 두편이나 보내줬잖아요”

“……….”

그랬다. 정기훈은 시를 두편이나 보내주었다. 그 시들은 아직도 금아의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다. 사실 '날개'보다는 '인생'이 더 좋았다. 그러나

그 시를 다시 들여다 보지 못한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기 힘들것 같아서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밤 침대에 기대 앉아 다시 그 시를 읽다가 터져나오는 통곡을 자제하기 위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가끔 죽음이 끼여들어 제일 좋은 이를 데려간다 한들 어때요, 하는 대목, 그 대목이 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온 금아에게 절절하게 사무쳤다.

정기훈이라는 남자는 어쩌면 이토록 가슴 저리게 하는 시만 골라서 보내주었을까.

사람들은 잃고 나서야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던지 안다.

항상 말이 없던 아버지. 항상 물처럼 무심하고 바람처럼 담담하던 아버지. 금아의 결혼식장에서도, 이혼하고 집에 들어오던 날도, 새벽에 뒷뜰에 혼자 앉아 담배 피우는 걸 처음 봤을 때도 별다른 감정을 내보이지 않던 아버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빈자리를 느꼈다. 빈자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금아는 자기가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고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물처럼 무심하고 바람처럼 담담하던 것이 아버지만의 사랑의 한 방식임을 깨달았다.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하지만 깊이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어느 봄날 저녁.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금아야. 하던 아버지의 한 마디 말이 아버지로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었음을!

“무슨 여자가 고맙다고 표현하는 게 그리 서툴러요. 빨리 지금 고맙다고 말해요. 그냥 고맙다가 아니고 많이 고맙다고”

“고…고맙습니다……”

금아가 더듬거리듯 말하자 정기훈이 빙긋이 웃었다.

“춥지 않아요?

“……….”

아닌게 아니라 춥다. 초가을이지만 산속이라 공기가 무척 차고 쌀쌀하다. 더구나 온기라고는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으니 더욱 그렇다. 엉덩이로부터 올라온 차가운 공기가 등까지 올라와서 온 몸을 떨리게 한다.

“여기 잠깐 있어요. 내 금아씨의 스웨터를 가져 올테니”

정기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안을 향해 가기 위해 금아 옆을 지나면서 금아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순간 금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머그 잔을 손에 든 채 그대로. 얼음처럼. 안으로 들어갔던 정기훈이 곧 금아의 스웨터를 들고 나와 어깨에 걸쳐 줄 때까지.

“미단씨는 아직도 정신없이 자네요…..”

“………”

“커피 다 마셨죠. 산책하러 갑시다”

금아가 앉은 채로 스웨터를 입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정기훈이 금아에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번엔 아까처럼 가볍게 짚은 게 아니었다. 손에 무게가 실린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일어 나요. ”

금아는 일어났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휘청거리며. 금아가 휘청거리자 정기훈이 금아의 팔을 잡았다.

“조심 해요. 어젯밤에 마신 술이 아직 안 깼어요?”

어젯밤 셋이서 와인 두병을 나누어 마셨다. 산장에 도착하니 늦은 밤이었다. 오후 3시넘어서야 출발을 한 까닭이었다.

모두들 배가 고팠다.

배낭속에는 미단이가 준비한 매운탕거리니 삼겹살거리니 하는 음식재료가 많이 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늦은 밤에 손에 익지 않은 남의 부엌에서 음식을 하기에는 어설프겠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땅콩과 오징어를 안주로 와인만 마시고 잠든 것이다.

“ 자, 저 쪽으로 걸읍시다”

정기훈이 금아의 한쪽 팔을 계속 잡은 채 걸음을 옮기다가 오솔길 주입구에서 손을 놓았다. 금아는 입을 다문 채 한걸음 뒤에서 정기훈의 뒤를 따라갔다.

정기훈에게 잡혔던 팔에 후끈후끈 열이 나는 것 같다. 아니다. 후끈거리며 열이 나는 곳은 팔만이 아니다. 얼굴도 후끈거리고 가슴도 후끈거린다. 온몸이 다 후끈거린다.

둘은 말 없이 오솔길을 걸었다. 십여분 정도 오솔길을 걸어가자 작은 둔덕이 나타났고 그 둔덕길에 올라서자 사방이 확 터진 곳이 나타났다. 발 아래 우거진 숲이며 바위가 엎드려 있었다. 어느덧 해가 뜨고 있었고 발 아래에 드리워진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정기훈이 걸음을 멈추고 금아가 다가가기를 기다렸다. 금아가 다가가자 정기훈이 입을 열었다.

“여기 경치가 아주 좋네요.”

금아는 정기훈의 옆에 가서 섰다. 둔덕을 쉬지 않고 올라가서인지 숨이 차다.

“금아씨….”

“………..”

“힘들죠?”

금아는 대답을 못한다. 방금 둔덕길을 10여분동안 쉬지 않고 걸어올라가서가 아니었다. 세상천지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있는 이른 아침. 태양이 찬란한 빛을 발하며 천천히 떠오르고 있는 아침. 나무와 바위와 숲과 지저귀는 새들만 있는 산속에서 남자와 둘이서, 정기훈이란 남자와 둘이서 있다는 사실이 금아의 숨을 막히게 했다. 그리고 정기훈이 묻는 게 둔덕을 올라와서 힘드냐고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금아는 알았다. 지금 정기훈은 금아에게 사는 게 힘드냐고 묻는 것이다…..

“힘든 것 알아요….”

정기훈의 말에 울컥, 하고 뭔가가 목구멍으로 치받히는 것 같아 금아는 고개를 숙인다.

“나도 힘들어요”

정기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보내 준 인생이란 시 말입니다”

정기훈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

“인터넷에서 발견했을 때만 해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시예요. 그냥 금아씨를 위해 찾아냈었던 시였으니까요. 금아씨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뭔가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싶어서, 금아씨의 닫힌 문을 열게 하고 싶어서 골라 낸 시였어요. 그뿐이었어요……”

금아의 가슴에 작은 모닥불이 피어 오른다. 파르륵 소리를 내면서.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시를 고르다!

“그런데 그 시가 오히려 지금은 나를 위로해 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금아씨를 위해서 찾아낸 시였는데, 그랬는데 그 시가 현재 나를 지탱하고 있어요.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어요. 내가 요즘 좀 힘들거든요…”

힘들거든요, 하는 대목이 한 줄기의 차가운 비처럼 금아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항상 유쾌하고 거침없고 자신감 넘치는 남자도 힘드는구나……

“몇번 읽어보다보니 이제 다 외우고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요.”

정기훈은 허공에 시선을 둔채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인생은 정말 현자들 말처럼 어두운 꿈은 아니랍니다. 때로 아침에 조금 내린 비가
화창한 날을 예고하거든요.어떤 때는 어두운 구름이 끼지만 다 금방 지나간답니다
소나기가 와서 장미가 핀다면 소나기 내리는 걸 왜 슬퍼하죠. 재빠르게, 그리고 즐겁게 인생의 밝은 시간은 가버리죠. 고마운 맘으로 명랑하게 달아나는 그 시간을 즐기세요. 가끔 죽음이 끼여들어 제일 좋은 이를 데려간다 한들 어때요.
슬픔이 승리하여 희망을 짓누르는 것 같으면 또 어때요.그래도 희망은 쓰러져도 꺾이지 않고 다시 탄력 있게 일어서거든요.그 금빛 날개는 여전히 활기차고
힘있게 우리를 잘 버텨주죠. 씩씩하게, 그리고 두려움 없이
시련의 날을 견뎌내 줘요.영광스럽게, 그리고 넘름하게 용기는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정기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금아는 발길을 멈추었다. 눈물이,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보이지 않아서.

“ 어떻습니까?좋지요?이 시는 읊으면 읊을수록 좋아요. 일 하면서도 운전하면서도 샤워하면서도 가끔씩 읊어보게 돼요. 금아씨 덕분에 이 천하의 정기훈이가 시를 다 읊게 된 겁니다. 어쨌든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 해요”

“예에….”

고개를 숙이면서 금아는 대답했다. 예에, 정말 그러네요…..

“참 재미있는 게 처음 보낸 시 제목이 날개였는데 이 인생이란 시에도 날개라는 대목이 들어간다는 거예요. 희망의 금빛 날개. 금아씨. 우리에겐 금빛 날개가 있어요. 그냥 날개도 아닌 금빛 날개. 그러니까 우리는 부자예요”

정기훈은 말해 놓고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아요?하고 금아쪽을 돌아보았다.

금아는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눈에서 흘러 넘친 눈물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러나. 정기훈은 금아의 눈물을 본 듯 했다. 그는 천천히 금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금아를 안았다. 금아가 무너지듯 정기훈의 품으로 쓸려들어갔다.

정기훈의 가슴에 안기자마자 걷잡을 수 없은 울음이 마구 터져나왔다. 그동안 억지로 틀어 막아놓고 있던 울음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힘겹게 묻어왔던 슬픔과, 외로움과, 분노와, 증오와, 쓸쓸함이 한꺼번에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사랑받고 싶었으나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았어요. 힘들고 외롭다고 호소했으나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았어요.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비명을 질렀으나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어요. 아무도, 그 아무도 내게 손을 내밀지 않았어요……..

“울지 말아요…….”

정기훈의 목소리에도 축축하게 물기가 배이기 시작했다.

“울지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다 괜찮아질 거예요…”

정기훈은 그렇게 한참동안 금아를 안고 있었다. 얼마후 울음이 잦아지자 정기훈은 금아를 자신의 가슴팍에서 떼냈다. 그리고 눈물 범벅이 된 금아의 얼굴을 양손바닥으로 쓰다듬듯 감싸 쥐었다.

“금아씨, 나랑 약속 해요”

정기훈이 허리를 굽혀 금아와 눈을 맞추었다.
“일어 선다고…. 지금부터 힘차게 일어 선다고 나랑 약속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