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효의 전화를 받은 것은 설렁탕 국물을 막 한술 뜨고 있을 때였다.

다음 날 아주 중요한 손님을 치룰 예정이니 죽어도 오늘 안으로 공사를 다 마쳐달라는 손님의 주문에 따라 밤 늦게까지 일을 한 날 저녁이었다.

저녁도 못먹은 채 작업을 마친 후 연장을 챙기고 나오니 시계는 열시를 넘기고 있었다.

배는 등짝에 붙을 정도로 고팠고 소변 볼 새도없이 하루종일 바쁘게 놀린 몸은 바위 덩어리를 진 것처럼 지쳐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곧장 집에 들어가서 라면이나 한개 뚝딱 끓여 먹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하루종일 같이 붙어서 일한

호제를 맨입에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호제야. 이왕 늦었으니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라”

늦은 밤이라 웬만한 한국 식당들은 다 문을 닫았을 터였다. 그렇다고 미국식당으로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국물을, 생선국물이든 고기 국물이든 뜨거운 국물을 좀 마시고 싶었다. 그래서 맛은 더럽게 없다고 소문났지만 새벽 2시까지 여는 한 한국식당으로 갔다.

정기훈은 설렁탕을, 호제는 양념 통닭을 시켜 막 먹으려는데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형!”

“석효구나”

“요즘 뭐가 바쁜가보이. 왜 그리 연락이 뜸해요?”

“으응…..”

이놈의 집구석 음식은 여전히 맛이 없네. 이러고도 손님이 계속 있는 것 보면 참 신기해, 하고 생각하면서 정기훈은 대답했다.

“여행 갔다오고 어쩌고 하다보니 일이 좀 밀렸네”

“여행? 여행을 다녀 왔수?”

“응. 여행이라기 보다 그냥 마실이라고 해야겠다. 아주 가까운 데로 며칠 갔다 왔지”

전화기 저쪽에서는 잠깐 말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저녁에 감을 때까지 하루종일 일, 일. 여지껏 일밖에 모르던 정기훈이 여행을 다녀왔다니까 의아해 하는 것이리라.

“형이 죽을 때가 되었나보이.”

석효는 헐, 하고 짧게 탄식 하더니 말한다. 웬일이유, 형?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맘이 변한다던데?

“글쎄 말이다. 오십도 안 됐는데 벌써 죽으려는가 보지”

“여자 생겼어? 생전 안 가던 여행을 왜?”

정기훈의 말을 자르며 석효가 다짜고짜 묻는다.

정기훈은 대답한다. 아니, 여자는 뭐…여행을 꼭 여자가 생겨야만 가냐?

“대답해 봐요, 형. 진짜 웬 마음으로 여행을 다 갔다 왔냐고?”

“그냥…..”

“그냥이라구? 거짓말 하지 말고 말해 봐요. 누구랑 갔었는데?”

”누구랑은. 그냥 혼자 갔었지….”

“혼자?”

허헛, 하고 석효가 전화기 속에서 헛웃음을 웃는다.

“혼자? 형이 아무 이유도 없이 혼자 여행을 갔단 말이야?

석효는 쉽사리 전화를 끊을 낌새가 아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

설렁탕 국물에 말아놓은 밥알이 붇기 시작한다. 에이, 여행갔다왔단 말을 괜히 했네. 그나저나 왜 내가 석효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냈지?

정기훈 답지 않은 행동이다. 평소같으면 여행 아니라 감옥을 갔다왔어도 전화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 정기훈이다. 만나서 한잔 하면서 자연스레 얘기를 꺼내면 모를까, 전화로 주절주절 긴 얘기를 잘 하지 않는 정기훈의 성품으로서는.

“사람이 좀 솔직해 봐요”

석효의 말이다.

“꼭꼭 숨기지 말고 빙빙 돌리지 말고 솔직해 보란 말이요”

혼자 먹기 미안해서인지 닭다리 한개를 잡고는 눈치를 살피고 있는 호제에게 얼른 먹으라는 시늉을 하면서 정기훈은 전화기를 고쳐 잡는다.

“석효야. 나 지금 저녁먹는 중이다. 웬일로 전화했냐? 한잔 하자고 전화한 것 같으면 내 대답은 노이다. 나 지금 금방쓰러질 정도로 피곤하거든?”

석효의 전화를 얼른 끊고 밥을 마저 먹고 싶은 정기훈.

“형. 여자가 생긴 것은 진짜 아니지? ”

평소같으면 그 정도로 말했으면 알았어요, 형. 그럼 다시 연락합시다, 하고 얼른 눈치를 알아차릴 셕효다. 그런데 이 친구가 오늘 왜 이리 집요할까?

“그…그건 아니고….”

“그럼.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뭐가 다행이란 말인가. 정기훈은 고개를 갸웃한다. 여자가 생기지 않았다는 말에 다행이란 대답, 참 묘한 대답이다. 나 참. 이 친구가 오늘 왜 이러지?

“지난번에 형이 윤애씨에 대해 물은 적 있잖수”

석효가 마침내 용건을 말했다.

윤애? 윤애가 누구더라? 정기훈은 다시 고개를 갸웃한다.

“아, 왜 내 처제 친구, 화장품 가게한다던….”

화장품 가게라는 말에 정기훈의 머리에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반짝, 하고 이름이 들어온다. 아, 그 여자….

“그래, 윤애씨……”

“지난번 형에게 내가 관심끄라고 했었잖아. 열나게 데이트 하는 중이라고, 곧 결혼하게 될 거라고……”

“………..”

“그런데 그게 잘 안 됐어…..”

“알고봤더니 놈이 빚만 잔뜩 짊어진 빈털털이에 노름중독자였대. 별도 세개나 되는”

“그…그랬대?”

“그래서 말인데…..”

그래서 말인데 하는 석효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진다. 조심스럽고 신중해진다. 만약 아직도 형이 윤애씨를 괜찮게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어떻게 형에게 소개를 해볼까, 해서 말이야 . 그래서…...

“………..”

작년에 돌아가신 석효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처음 본 여자였다. 그 이후 석효네 가족 행사에서 두어번정도 더 보았다. 아이도, 위자료도 없이 이혼한 후 친정에서 차려준 화장품 가게를 운영한다는 여자였다. 인물도 몸매도 그런대로 양호해 보였다. 무엇보다 환하게 잘 웃어서 호감이 가는 여자였다. 요리 솜씨도, 성품도 꽤 괜찮다고 했던가.

석효가 넌지시 운을 뗐다. 그러나 정기훈은 별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정기훈의 옆에 미연이가 있었으므로. 비록 이혼을 하고 한국과 미국에 떨어져 있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합쳐질 거라고 믿었던 여자, 미연이가 있었으므로.

“형이 얼른 줄을 서야 할 것 같아서…..”

“……….”

“윤애가 인물도 조건도 성격도 괜찮은 여자라 오래 남아 있지 않을 거요. 금방 다른 놈들이 채가기 전에 형이 얼른 줄을 서야 할 것 같아서 말이요”

“윤애씨 생각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고 정기훈은 생각했다. 미연이만 아니면 어떻게든 인연의 줄을 던져보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괜찮아 보이던 여자였으니까.

“윤애씨 생각은 어떤데. 그렇게 쓴 경험을 하고 금방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대?”

그렇게 크게 남자들에게 데인 여자들은 남자라면 앗. 뜨거라, 하게 된다. 보통 그렇게 된다. 나중에는 어떻게 마음이 변할지 몰라도 당분간은 일절 남자 만날 생각을 안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남자라면 이제 신물이 난다며 앞으로는 가게에나 신경을 쓰겠다는데..”

“그런데?”

“형은 물론이지만 윤애씨도 형 한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잖아. 아, 말이야 바른대로 형이 얼마나 멋있는 사람이요. 형이 지금 마음 먹고 윤애씨에게 다가가면 마음이 금방 바뀔 것 같아서 ….그래서….”

“아니다”

정기훈은 물컵을 들어 물을 마시면서 말했다. 아니다. 난 윤애씨를 만나 볼 생각이 없어…..

전화기 속에서 잠시 침묵이 흐른다. 정기훈의 대답에 석효가 좀 당황한 것 같다. 그리고.

“형!”

석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왜 이랬다 저랬다 해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윤애씨의 근황을 물었었잖아. 관심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우?”

그랬었다. 그때만 해도 그랬었다. 윤애라는 여자만 괜찮다고 한다면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한번 해볼 생각이었다. 미연이가 떠난 휑한 빈 자리에 그 누구라도 채워 넣고 싶었으니까.

“왜 마음이 변했수? 아무래도 이상하군….”

“………”

“형. 정말 숨겨놓은 여자가 있는 것 아니야?”

“………..”

그래요?형. 진짜 여자가 있는 거요?”

“………..”

“사나이 대 사나이로 대답해 봐요. 형 지금 누가 있지?”

“석효야!”

석효야, 하고 불러만 놓고 다음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정기훈이다. 석효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을 못하겠다, 하고 정기훈은 생각한다. 여자가 있을까? 석효 말대로 지금 내게 여자가 있는 것일까?

“대답해 봐요, 형”

“….….”

정기훈은 다시 물컵을 들어 소리내어 물을 마신다. 이유없이 그냥 목이 타는 것 같아서.

“여자가 있다”

“형…….”

“여자가 있어…..”

여자가 있어, 하고 정기훈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한다.

“언제부터? 언제부터유?”

“최근에….”

“최근에?”

“그래……”

“뭐하는 여잔데? 내가 아는 여자야? 이 좁아터진 동네에서 싱글인 여자는 내가 다 아는 여자들일텐데. 설마 유부녀는 아닐 테고…..”

“석효야….”

정기훈은 설렁탕 국물에 잠겨 퉁퉁 불어터진 밥을 한숟갈 퍼서 입으로 가져간다. 정말이지 배가 고프다.

“아직은 말할 때가 아닌 것 같다”

“형!”

“이 달은 계속 바쁠 것 같고 내가 연락할께. 우리 언제 만나 한잔 하면서 얘기하자…..”

“형!”

석효가 무어라 더 말하려는 걸 빨리 밥을 먹어야 한다는 말로 막으면서

정기훈은 전화를 끊었다.

밥 먹어야 한다는 핑계로 전화는 끊었지만 밥을 바로 먹지 못하는 정기훈이다. 조금전에 입에 넣은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면서 그냥 멀거니 설렁탕 그릇을 내려다보고만 있다.

괜히 섣불리 얘기한 것 아닌가 하는 후회가 일어서이다. 여자가 있다고 한 사실을 석효가 안 이상 두찬이, 영후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 문제다.

미연이가 한국으로 떠나간 후 여기저기에서 여자를 소개해주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었다. 윤애라는 여자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눈도 깜짝하지 않던 정기훈이 스스로 여자가 있다는 실토를 했으니 그거야말로 ‘빅 뉴스 중의 빅 뉴스’였을 테니까. 어쩌면 지금 석효는 두찬이랑 영후에게로 이 사실을 알리는 전화를 하느라 손가락이 바쁘겠다…….

“여자가 있어?”

정기훈은 고개를 들었다.

호제가 빙그레 웃으며 정기훈을 쳐다보고 있다. 미국에 오자마자 한국 사람들이 밀집한 동네서 살며 한국인을 많이 접해본 호제는 한국말을 꽤 알아듣고 하는 편이었다. 발음이 좀 어눌하긴 하지만 .

“여자가 있어?”

호제가 다시 묻는다. 얼굴에는 호기심이 나타나 있다. 같이 일한지 6년, 미연이 얘기 외에는 일체 다른 여자를 입에 올리지 않던 정기훈의 입에서 여자 얘기가 나왔으니 그도 무척 궁금한 것이다.

”응. 여자가 있어…..”

정기훈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식당안에는 아무도 없다. 짧은 머리를 흑인여자같이 뽀글뽀글 볶아부친 주인 여자 혼자만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다.

호제라면 맘 놓고 얘기를 해도 괜찮다. 비쩍 마르고 얍삽하게 생긴 외모와는 다르게 입이 무겁고 심중이 깊은 사람이라서. 안 해야 되겠다 싶은 말은 지 마누라한테도 안 할 사람이니 무슨 비밀을 털어 놓아도 괜찮다.

“여자가 하나 생기긴 했는데……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으로 정기훈은 입을 열었다. 최근에 들어, 여행을 다녀오고서부터 태산같이 어깨를 짓누르는 그 무엇, 그것은 도대체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파악이 안 되고 해석이 안 되는 자신의 마음이었다.

지구상의 여자라는 종자가 싹 다 없어진다해도 절대 택하지 않으리라 장담했던 여자가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맘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단 한군데도 없던 여자가 한명 있었다. 바로 금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그랬었는데. 그랬었는데.

그녀, 금아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착실하고 일 잘 하는 미단이를 예쁘게 보아서 무료로 쓰라고 흔쾌하게 내주었다는 미단이 상사의 별장. 호수가 있고 산책로가 있고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사람들도 잘 모르는 작은 동굴이 있다는 별장.

도착한 첫날 밤, 셋은 응접실 바닥에서 잤다. 침실이 두개뿐이기도 했지만 와인을 나누어 마시고 밤 늦게까지 바닥에 누워 얘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화장실과 부엌이 벽하나를 사이에 두고 터져 있는 마룻바닥이었다.

피곤해서 금방 잠이 들긴 했지만 정기훈은 곧 깼다. 음식은 가리지 않고 먹는 편이지만 잠자리에는 예민한 편인 정기훈은 깬 다음에는 다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잠 한숨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다 동이 터오는 걸 느끼자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멀찌감치 떨어져 자고 있기는 했지만 행여나 두 여자들이 잠을 깰까 조심하며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 전날밤부터 간절했지만 억지로 참았던 담배를 한대 피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목구멍 깊숙이 들어오는 맑고 차갑고 청량한 공기에 담배 생각이 싸악 가셔버렸다. 그 신선한 공기를 들어마신 폐에 담배에서 나오는 독한 기운을 다시 들이 부을 순 없었다.

정기훈은 안개에 젖어 축축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다시 실내로 들어가도 할 일이 없었으므로.

인터넷이 안 되니 스마트 폰으로 뉴스를 검색할 수도 없고 읽을 신문도 없는데다 텔레비젼도 없었다. 두 여자들의 자는 모습을 구경할 수밖에 없는데 그거야 말로 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두 여자들이 잠이 깨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릴 없이 앉아 있으니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그때 거짓말같게 문이 열리더니 금아가 커피잔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금아는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있었다. 늘 사자갈기처럼 제멋대로 헝크러져 있던 머리. 그러고보니 어저께부터, 여행을 떠나기 위해 만날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어딘지 모르게 차림새가 정돈되어 있던 것 같았다.

산책을 가겠다는 금아를 불러앉혀 앞에 놓고 커피를 마시면서 정기훈은 금아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뭐가 변하긴 변한 것 같은데 딱히 어디가 변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한참을 곁눈질로 금아를 살펴보던 정기훈은 속으로 무릎을 쳤다. 아하, 살이 빠졌구나…

금아의 얼굴이 갸름해진 것 같았다. 살에 묻혀 뭉툭하던 코가 오똑하게 솟아져나와 있었다. 그동안 못생기고 혐오스럽다고 여겼던 금아의 얼굴, 그 새벽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복스럽고 귀여운 얼굴이구나……

정기훈은 금아와 산길을 걸었고 그리고 그날 아침, 정기훈은 시를 읊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었다. 왜 그런 유치한 짓을 했는지. 아마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고 정기훈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맨정신으로는 죽어도 하지 못했을 일을 한 것은 그 날 아침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뽀얀 안개와 청량한 공기와 떠오르기 시작하는 해와 나무와 새소리 밖에 없는 산속의 아침. 여자와 단 둘이 있는데 그런 치기(稚氣)가 생기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 아닌가.

어쨌거나 그 유치한 짓을 한 덕분에 금아랑 가까와질 수 있었다. 그날 아침 금아가 눈물을 흘렸다. 두번째로 본 금아의 눈물이었다.

피트니스 선물권을 주기 위해 공원에서 만났을 때, 그때도 금아는 잠깐 눈물을 흘렸다. 그때만 해도 그 여자의 눈물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었다. 어라, 표정없이 이죽거리기만 하는 여잔줄 알았더니 감정이 있는 여자였네 하는 생각만 했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이번에는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어린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내가 보호를 해주어야지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금아를 품어 안았던 것이다.

정기훈의 가슴에 안겨서도 금아는 계속 흐느껴 울었다. 그동안 억눌러 놓았던, 켜켜이 쌓인 슬픔이 폭발한 사람처럼.

어깨를 쓰다듬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 주어도 계속 울었다.

그렇게 말없이 금아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마침내, 마침내 정기훈은 금아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갖다댔다.

제네럴 컨츄렉터 라이센스 있어요? 하고 독기를 뿜어내던 입술이었다

금아의 입술은 꽃잎처럼 부드러웠으나 얼음처럼 차가왔다. 조금전에 머그잔 가득 커피를 마셔서였을까. 금아의 입술에서는 커피 냄새가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자기가 그날 아침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도 같지만 사실은 그게 다는 아닌 것 같다, 하고 정기훈은 생각했다. 금아라는 여자가 왜 자기 자신을 그렇게 함부로 굴리는지 그 이유를 상세하게 알게 된 까닭일 것이다.

참 안 된 여자이다, 하고 정기훈은 생각했다.

부모와 전 남편 가족과 주위로 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뾰족한 가시처럼 늘 껴안고 사는 여자가, 조개껍질처럼 단단한 무장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여리고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금아였다.

그래서 가엾고 미안하고- 왜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측은했다.

그러나 매사 신중하고 사려가 깊은 정기훈이었다. 즉홍적이지 않고 감정에 이끌리는대로 행동하지 않는 남자가 정기훈이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왜 금아에게 키스를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술도 취하지 않고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며칠이 지난 지금, 그날 아침을 떠올리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다. 괜히 그런 짓을 했다 싶은 후회가 일지 않으니. 오히려 붉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난롯가에 몸을 가까이 하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이다.

“사랑하고 있냐, 그 여자?”

호제가 빙글빙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

정기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런 것 같은데?”

호제가 다시 물었다. 정기훈은 조금 망설이다가 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야. 사랑은 무슨….”

“내가 보기엔 사랑하고 있다……”

호제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었다.

“넌 그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했어”

젊을 때는 걸핏하면 여자를 갈아치워 잠잔 여자만 백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어릴 때부터 같이 이웃해 자란 여자를 우연히 다시 만나 결혼해 여섯명의 자식을 낳은 호제다.

정기훈은 호제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아. 이 종마(種馬)같은 자식아. 네가 사랑을 알아?

“당신 얼굴에 쓰여 있어.지금 사랑에 빠져있다고”

호제의 말에 정기훈은 흐흣, 하고 웃었다. 글쎄, 아닌 것 같은데.

“당신은 모르지만……”

호제가 정기훈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가 당신을 처음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웃는 법이 없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이 있어도 당신은 웃지 않았다. 아들 얘기를 할 때만 빼놓고. 그때도 슬핏 미소를 지었을 뿐 크게 웃지 않은 사람이 바로 당신이야. 늘 석고상처럼 얼굴이 굳어 있었지……”

그랬었나, 내가?정기훈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얼굴이 늘 석고상같았단 말이지. 나름대로 유쾌하게 살려고 노력했는데…하긴 미국에 오고나서 웃을 일이 없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우울증에 빠진 미연이 때문에. 그리고 미연이와 창우와 원치 않은 이별을 한때문에.

“그런데 여행을 갔다오고나서 당신 얼굴에 미소가 생겼어. 얼굴에 실실 웃음이 생겼어. 나는 짐작했지. 오호, 이 남자의 심경에 변화가 생겼구나…..”

호제는 말을 끊고 잠시 정기훈을 바라보았다. 정기훈을 바라보는 눈에 따뜻한 애정이 넘쳤다. 호제는 말했다. 어느 나라 속담인지는 모르지만 ‘외투 주머니에 넣은 송곳과 재치기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은 감출 수가 없다’는 말이 있지…..

그것 참 기발한 표현이군, 하고 정기훈은 웃었다. 그나저나 호제의 눈에는 왜 내가 그렇게 비쳤을까…..

“그것 말고 또 다른 증거가 있지……”

호제가 탁자에 놓여 있는 정기훈의 전화기를 눈으로 가르쳤다.

“일 하는 중에도 전화기를 연신 확인해. 그 것은 누군가에게 올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하는 행동이거든….”

정기훈은 얼굴을 붉혔다. 그랬던 것 같다. 일하는 틈틈이 전화기 쪽으로 눈을 준 것 같다.

“일하다가 가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고….”

“………..”

“그 모든 당신의 행동을 종합해 보건데 확실해졌어.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나만 관찰했나보군”

정기훈은 웃으면서 말했다. 얌마. 내가 너한테 지불하는 일당이 얼만데 일은 안 하고 내 행동만 살펴?

“글쎄….사... 사실은 말이야……”

정기훈은 얘기를 시작했다. 한 여자를 만났는데 말이야, 하고. 올 봄, 금아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사랑까지는 모르겠고…”

10여분에 걸쳐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이상하게 정기훈은 간절한 마음이 되었다. 금아에게 가는 이 마음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그러나 자신도 헷갈리는 마음이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어떻게 확인을 할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야. 호감을 가진 것도 맞는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지금 얘기했다시피 금아라는 여자는 내가 제일 질색해마지 않던 부류의 여자라는 거야. 오히려 친구 미단이가 더 근사한 여자지. 근데 미단이한테는 별다른 마음이 가지 않은데…...호제야 .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정기훈은 입맛을 다셨다.

“호제, 네가 잘 보긴 잘 봤어. 금아라는 그 여자 생각을 가끔 해. 지금 뭘하고 있을까. 운동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시작을 하기는 했을까.

그 여자, 생전 전화 안 할 줄 알면서 자꾸 전화기를 들여다 보게 돼. 행여 그녀로부터 전화가 오지 않을까, 하고….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후 정기훈은 금아에게 몇번 전화를 했었다. 뭐해요. 날씨가 춥기 시작했네요. 잠 잘 잤어요, 하는 으레적인 인사 전화. 금아는 정기훈의 전화를 잘 받아주었다. 그러나 자기쪽에서는 먼저 전화를 걸어오지 않는다. 정기훈은 그게 아쉽고 서운하다. 금아가 자존감을 회복하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먼저 전화를 하게 될 날이 있을까…..

“사랑이란 말이야”

호제는 깍두기가 담긴 종지를 자기 앞으로 끌어 당겼다. 그리고 깍두기 한개를 집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깍두기도 잘 먹는 호제 곤잘레스.

“사랑이란 명확하게 설명을 할 수 없는 그 무엇이야. 저 여자랑, 혹은 저 남자랑 사랑에 빠져야지, 하고 작정을 하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 사랑은 소나기야, 소나기. 여름날 예기치 않게 오는 소나기 말이야. 아무런 준비없이 맞는 소나기처럼 누구나 사랑이란 무방비의 소나기를 맞게 되는 거지…….”

정기훈은 고개를 숙였다. 금아가 나의 소나기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