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샵에서 호텔 정문 앞까지 걸어 나오는 2,3분 동안 남자는 아무말 하지 않았다. 은아보다 두어걸음 앞서서 걸음을 옮기면서 한번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은아라는 사람이 뒤에 있다는 사실이 전혀 염두에 없는 사람처럼, 깊고 깊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혼자서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은아 역시 아무말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채 묵묵히 남자 뒤를 따랐다.

그러나 호텔 정문앞에 다다랐을 때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똑같이 걸음을 멈추었고 똑같이 얼굴을 쳐다보았고 똑같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남자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마치 시멘트 벽돌처럼 딱딱하게. 은아는 남자의 눈을 더 들여다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남자는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은아 옆 얼굴을 뚫어질 만큼 강하고 세차게 쏘아보았다. 마치 은아의 모습을 눈에 단단하게 새겨넣기라도 할 듯이.

“우리……”
한참동안 그렇게 은아의 얼굴을 응시하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악수 해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은아는 코트주머니에 찌르고 있던 손을 빼서 남자의 손을 잡았다.

“잘 가요……”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남자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게 은아씨의 얼굴을 보는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해요…..”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앞일이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나 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가엾은 남자에게 막연한 기대감을 줘서는 안 될 것 같았으므로.

“마음이 변하면 언제든지 다시 돌아 와요. 언제든지 연락 하라구요”

남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덧부쳤다.

“나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은아는 남자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얼른 이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 아니, 기다리다가 내가 먼저 참지 못하고 은아씨에게 연락할지도 모르겠군. 그러기 전에 은아씨 전화번호를 지워버려야겠는데.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은 은아씨가 원치 않는 일일 테니까…..”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입술은 웃는 듯 했지만 여전히 참담하고 당혹스럽다는 듯한, 그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하고 복잡한 얼굴 표정을 한 채.

“정말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군…..”

남자가 더 이상 억지로 웃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얼굴 표정을 고쳤다. 아까처럼 딱딱하고 차갑게.

“자그마치 두시간 동안 은아씨로부터 설명을 들었지만, 그러니까 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헤어져야 하는지 이유를 들었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남자가 허리를 약간 굽혀 얼굴을 은아쪽으로 가까이 갖다댔다. 그의 두눈 가득 분노가 담겨있는 걸 은아는 보았다.

“눈이 튀어나올 만큼 배가 고픈 상태로 잘 차려진 진수성찬 앞에 앉았다가요. 막 수저를 들려는데 밥상을 빼앗긴 기분요, 그런 기분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나요?”

“………..”

“맛있는 냄새만 잔뜩 맡게 하고 말이지……”

은아는 무슨 말이든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아무말 하지 않았다. 혼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심경을 전했다.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사과도 했고 변명도 했고. 그런데도 남자는 납득하지 못한다. 여기서 무어라 더 부연 설명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남자를 탓할 마음은 없다. 은아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미안 해요.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상을 빼앗아서 정말 미안해요. 그런데 나도 어쩔 수 없어요. 정말 어쩔 수 없어요……..

“은아씨!”

“저….저는…이제..이제…..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은아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은아는 몸을 돌렸다. 거기서 더 머뭇거리면 안 될것 같았다. 남자가 무어라 더 말을 이어가기 전에, 그래서 죄책감이 더 해지기 전에 얼른 떠나와야 할 것 같았다.

두어걸음 걸음을 옮기던 은아는 앞을 향해 뛰었다.

“은아씨!”

남자가 소리쳤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잊지 말아요!”

은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곧 몸을 돌려 뒷모습을 보이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구부정한 모습으로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천천히.

은아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엄마와 만나기로 했던 장소인 주차장으로 앞만 보고 뛰었다. 하이힐 굽이 삐긋하기도 했으나 상관하지 않고 그냥 뛰었다.

차가 보이자 은아는 뛰기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그리고 얼른 차로 올라탔다.

엄마는 목을 뒤로 기대고 자고 있었다. 급하게 차 문을 닫는 소리가 쿵, 하고 났는데도 엄마는 깨지 않고 같은 자세로 자고 있었다.

약간 벌어진 엄마의 입에서 가늘고 고른 숨소리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걸로 봐서 꽤 깊이 잠이 든 것 같았다.

엄마의 팔을 잡아 흔들어 잠을 깨우려던 은아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배 위쪽으로 가지런히 포개져 있는 두 손, 왼쪽 손에 반지가 끼워져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은아는 그 반지가 엄마의 결혼반지임을 알았다.

아버지가 돈 잘 벌고 한창 잘 나갈 때 엄마의 손가락에서 자랑스럽게 반짝거리며 빛을 발하던 반지.

그 반지가 엄마의 손가락에서 사라진 것은 미국에 이민을 오고부터였다.

개수통에 손 넣어 물 컵 한개를 씻지 않고 파 한쪽 다듬지 않고 커피 한잔을 자기 손으로 타 마시지 않고 살았던 엄마였다. 그렇게 귀부인처럼 풍요롭고 고고하게 살던 엄마가 미국와서 부터는 부엌 살림을 직접 해야 했다.

살림하는데 거추장스러워서였을까. 엄마는 반지를 끼지 않았다. 그러나 은아는 굳이 그 이유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반지가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해 준 반지가. 사모님 자리에서 아줌마로 전락하게 만든 아버지. 그 아버지가 싫었던 것이다.

그 반지가 지금 엄마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다. 정작 반지를 해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데 반지만이 남아서 여전히 찬란한 광채를 내고 있다.

은아는 엄마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다 보았다. 그리고 눈을 들어 엄마의 얼굴도 들여다 보았다.

엄마의 얼굴은 눈에 뜨이게 많이 상해 있었다. 타고나기를 곱게 타고 난 데다 한국에서 풍족할 때도, 미국와서 풍족하지 않을 때도 항상 고가의 화장품이 발라졌던 엄마의 얼굴. 사십대 초반이라도 믿을 만큼 팽팽하고 윤기가 흘렀던 엄마의 얼굴, 백자표면처럼 매끈하고 하얗던 얼굴이었다.

몇달 사이 엄마의 얼굴 피부는 바람이 빠져나간 공처럼 쭈그러들고 주름져 있었다.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했을까. 기미와 검버섯마저 거뭇거뭇하게 광대뼈 주위를 덮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엄마가 화장을 하지 않고 있다. 한국마켓에 두부 한 모를 사러가더라도 반드시 신부 화장하듯 화사하게 얼굴을 매만지고 나가던 엄마. 그런 엄마가 지금 맨얼굴이다. 맨얼굴을 드러내놓고 사람들과 차가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호텔 주차장에서 입을 벌리고 자고 있다.

예전같으면 배우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질색할 일을 엄마가 하고 있다.

은아는 진주빛 매니큐어가 항상 곱게 발라져 있던 엄마의 긴 손톱이 짧고 뭉툭하게, 그리고 삐뚤빼뚤 아무렇게나 깎아져 있는 걸 발견하고 다시 한번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그 여자가 윤택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비루한 삶을 사는지는 손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며 항상 손 관리에 목숨을 걸던 엄마. 어쩔수 없는 상황에 집안 살림을 직접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고운 손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한다면서 한 여름에도 고무장갑을 끼고 부엌일을 하던 엄마.

엄마..불쌍한 엄마…..

은아는 손을 뻗어 엄마의 손을 잡았다.

“은아니?”

엄마가 눈을 떴다.

“언제 왔니?”

“지금 마악……”

은아는 엄마를 향해 활짝 웃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지려는 듯 어둡고 컴컴한 바깥 날씨와 똑같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해바라기처럼 활짝.

“엄마, 어디 안 갔더랬어?”

예전에는 은아를 내려주기가 무섭게 이 지역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고 쇼핑을 하고 미장원이랑 피부숍을 찾아다니던 엄마였었다.

“아까 나 내려주고부터 계속 여기서 있었던 거야?”

엄마가 고개를 끄덕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파킹랏에서 뭔 청승이야. 쇼핑이라도 좀 가지….”

“쇼핑은 뭐… 딱히 살 것도 없는데……”

“그래도…..”

엄마는 대답없이 고개를 숙인다. 은아는 아픈 마음으로 엄마를 바라다 본다.

엄마는, 내가 그동안 보아 왔던 엄마는 지금처럼 이렇게 힘 없고 의기소침하고 주눅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 아니었어. 늘 기세등등하고 자신감이 넘치고 이 세상 만물이 내 눈 아래 있다는 듯 오만했지. 그런 모습은 미국에 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았었지. 한국에 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자존심때문인지(언니 금아는 열등감때문이라고 해석했지만) 더욱 더 기승을 부렸지. 하늘을 찌를 듯한 그 당당함이 때로는 지겹고 싫었지만 이제는 예전의 그 모습이 그리운 것은 웬일일까.

“잘 끝났니?”

엄마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묻는다.

“……….”

엄마가 묻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 은아는 대답하지 않는다. 턱을 괸 채 창밖으로 시선을 둔다. 아침부터 어두컴컴하게 내려와 있던 하늘에서 드디어 빗방울이 하나씩 내리고 있다.

“엄마…..”

은아가 엄마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비 오네…..”

“은아야……”

“으응. 엄마. 잘 했어. 잘 말 했어……”

“남자가 잘 알아 듣디?”

" 못알아 들어도 할 수 없지 뭐…..”

지금 은아는 캐빈을 만나고 나온 길이다. 올 봄, 처음으로 만났던 그 호텔, 그 커피숍에서.

공교롭게도 자리마저 처음의 그 자리였다. 커피숍으로 들어서다 남자가 그 자리에 앉아 이 쪽을 보고 있는 걸 봤을 때 은아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남자를 처음 만났을 때가 불현듯 떠올라서.

그때 은아는 갖은 정성을 들인 화장과 머리와 옷차림을 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기대감과 호기심에 찬 얼굴로 저 자리에 앉아 캐빈을 기다렸었다. 지금은 저 남자가 불안하고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구나.

결혼기념일날 이혼하는 영화속 장면처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별을 하러 우리는 여기에 나와 있구나….

전화로 간단하게 은아의 심경을 전했을 때 남자는 한동안 아무 말하지 않았다. 말 하기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긴 침묵을 지켰다. 전화가 끊어져버린 줄 알 만큼. 헬로우, 헬로우 하고 아직도 남자가 전화기 저쪽에 있는 지 확인했을 만큼 길고도 긴 침묵이 이었다.

이유가 뭐요.

긴 침묵끝에 남자가 한숨을 쉬면서 전화기속에서 말했다.

“이유가 뭐요, 도대체. 첫번째 상견례를 미루길래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럴 수도 있겠거니 이해를 하려 애썼어요. 두번째 미루었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할 수 없는 상황이겠지, 또 이해를 했어요. 그런데..그런데… 은아씨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줄은 몰랐네. 이럴 줄 알았으면 첫번째 상견례를 미루자는 청을 들어주지 말 걸. 그냥 강행해 버릴 걸. 하긴 상견례 했다고, 양가 식구들 인사했다고 결혼식을 바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긴 침묵 끝에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놓는 남자, 캐빈.

숨 쉬지 않고 빠르게 말하는 것은 흥분하거나 화가 나거나 기분 나쁠 때 나타나는 남자의 버릇이었다.

봄에 만나 여름을 같이 보내고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는 동안 나는 저 남자, 캐빈의 버릇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구나…….

은아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남자가 은아를 스쳐지나가고 머물다 가기도 했지만 계절이 바뀔 만큼 그리고 상대방의 버릇을 알게 될 만큼 깊은 인연을 맺었던 사람은 캐빈이 처음이기에.

그러나, 그러나. 이제 이 인연과 작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은아씨. 일단은 한번 만납시다. 만나서, 얼굴을 봅시다. 그리고 뭔 일인지 얘기를 들읍시다”

남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숨까지 헐떡이며.

“설마 지금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고는 끝을 맺자는 것은 아니지요?그렇죠, 은아씨?”

결혼까지 생각하며 집에까지 찾아가서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상견례까지 계획했었던 남자다. 그리고, 그리고 키스를 하고 섹스를 하고 아이까지 가졌던 남자다.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고 도리가 아니다.....

“알았어요. 만나요”

은아는 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엄마의 방을 찾았다.

엄마는 침대에 앉아 한국 신문을 보고 있었다.

“엄마. 나 그 남자와 헤어지기로 결정 했어”

“………”

엄마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냥 멀거니 은아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만 만나기로 마음 먹었다구, 엄마. 결혼 약속도 없던 걸로 하기로 했어….”

엄마가 알아듣지 못했나 싶어 은아는 조금 큰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엄마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딱 한마디 했다.

그랬니?

은아는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주절주절 설명을 했다.

“전화로 그냥 얘기하고 끝내려고 했었는데. 그랬는데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만나자고 해서 다음 주 목요일에 그쪽으로 내려가기로 했어. 그 사람이 여기로 온다는 걸 내가 간다고 했어”

“그랬구나”

그게 끝이었다. 그랬구나 하는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 마는 엄마였다.

엄마….엄마… 뭐라고 말 좀 해 봐.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든지 미친년이 미친 짓했다고 야단이라도 좀 쳐달란 말이야…..

은아의 간곡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눈을 신문지면으로 옮겨간 후 움직이지 않는다.

은아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내려보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예전같았으면 어떠한 일에도 확답을 내리지 않은 채, 그러니까 답을 유보하고 시간을 벌어놓은 채 엄마부터 찾아 조언을 구했을 은아였다.

엄마. 나 캐빈과 헤어지기로 결심 했어. 그래서 전화로 간단하게 얘기하고 끝내려고 했었는데 이 남자가 얼굴을 보고 얘기하자네. 나 이 남자 만날까? 말까?

그리고 캐빈과 헤어질 것인가 말 것인가도 일단은 엄마에게 먼저 물어보았을 은아다. 그러나 은아는 이번에 혼자 결정을 내렸다. 캐빈과 헤어지기로. 인연의 끈을 거두어 들이기기로.

그런데 이에 대해 엄마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은아의 임신과 아버지의 죽음과 백만불의 보험금과 은아의 유산과 그리고 은아의 변심등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동안 휙휙 빠르게 전개되었다.

그동안 엄마가 한 일이라곤 우는 일이었다. 장례식장에서도, 아버지의 관이 땅속에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 문상객들의 수근거림을 들었던 엄마. 그 엄마가 백만불의 돈을 남겨 놓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지병이 있음에도 치료를 거부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울기 시작했다. 우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처럼.

은아는 조용히 엄마의 방을 나왔다.

엄마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그동안 엄마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의사 신랑감과 헤어지겠다는 중대사실에 조차 도통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엄마가 좀 서운한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어쩔수 없다고 은아는 마음을 다스렸다.

그랬는데 당일, 내려갈 차비를 차리자 엄마가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데 혼자 운전하다가 졸기라도 하면 어떡하니”

“잘 됐네, 엄마. 그렇잖아도 혼자 내려가기가 심심할까 걱정됐는데…..”

은아는 과장된 몸짓으로 엄마를 끌어 안았다.

엄마가 따라 가겠다고 나서겠다는 것은 기력을 좀 차렸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엄마는, 우리 엄마는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예전처럼 극성맞은 엄마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엄마는 은아와 단 둘이 차안에 있게 됐는데도 창밖을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섬에 고립된 사람처럼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기분이 어떠냐고, 뭘 하고 싶냐고, 엄마 혼자서든 누구하고서든 여행을 갔다오지 않겠냐고, 언니 금아가 며칠동안 여행을 다녀오더니 생기가 오른 것 같아 보이는데 기분전환하는 데는 여행이 최고인 것 같더라고 계속 은아가 말을 붙혀도 엄마는 그냥 응응, 건성으로 대답만 할 뿐 흥미를 나타내지 않았다.

은아는 엄마에게 말 시키기를 단념하고 음악을 틀었다. 엄마가 평소 좋아하던 음악이었다. 몇시간 걸려 운전해 내려오는 동안 둘은 그저 말 없이 음악만 들었었다.

그랬던 엄마였다. 그랬던 엄마가 잘 끝났니, 하고 물었을 때.

은아는 반가왔다. 어쨌든 나에 관계된 일은 엄마에게 아직도 중요한 관심사구나,….

그러나.

은아는 예전처럼 남자가 어떤 옷을 입고 있었고 내가 이렇게 말하자 저렇게 대답했고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엄마에게 말하지 않는다. 엄마의 물음에 간단하게 두어마디 대답하고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다.

캐빈과 헤어져서 슬픈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담담한 것도 아니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냥 기분이 그렇다. 바닥이다.

“은아야….”

“엄마 ……..”

이유없이 눈물이 난다. 정말이지 슬픈 건 아닌데, 가슴아픈 건 아닌데 그리고 후회하는 건 더더욱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난다.

“은아야…..”

“………”

“괜찮겠니?”

아니, 아니, 엄마. 안 괜찮아. 그 남자를 깊이 사랑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이별이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았는데 막상 돌아서 걸어가던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쓸쓸하고 막막한 생각이 들었어. 저 남자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남자가 아닐까. 앞으로 내가 저렇게 좋은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꿋꿋하게 버텨갈 자신이 있었는데 그랬었는데 왜 이렇게 허전하고 공허할까. 남자와 헤어지고 돌아온 지 10분도 안됐는데 왜 이리 두려울까. 두껍고 긴 장막이 눈앞을 가린 것 같아. 그냥 앞이 캄캄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잘 하는 일인지 도저히 생각을 할 수가 없어……

“이유가 뭐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 은아씨와 전화통화 후 며칠 낮밤을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도 뭔지 모르겠어요. 은아씨와 헤어져야 할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어요.”

정말 며칠 낮밤을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잤는지 남자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그가 불안과 충격과 놀라움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렇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그렇게 다급하게 물어왔을 때 은아는 금방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은아 역시 왜 캐빈과 헤어져야 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몰랐으므로. 캐빈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깊고 깊은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좋아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매일 전화통화를 하고 몇시간씩 운전해서 만나면서 정이 깊이 들었다.

만날 때마다 으레껏 터져나오던 자기 가족들에 대한 비하, 비난, 불평은 여전하지만 은아가 어느 날 간곡하게 중단해 줄 것을 요구한 후부터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연락이 될 때까지 집요하게 전화하고 문자보내는 일도 예전처럼 잦지 않다. 무섭고 부담스럽다고 그러지 말라고 얘기한 다음부터다.

남자는 은아의 마음에 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고 은아는 그런 남자의 노력이 고맙다.

그런데도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은아는 사과부터 했다. 남자는 지금 자신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니까.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 내가 아무리 설명을 한다해도 이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결혼에 대한 제 마음이 분명하지 않아서….. 그래서입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확신이 없기에 헤어지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 남자와의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의 인연에 있어 은아의 뜻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바늘 꽂을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찬 도로에 가만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밀려서 몸이 움직이듯 은아는 부초(浮草)처럼 남들의 강요에 의해 떠밀려서 여기까지 왔다. 엄마와 성화에 못이겨 맞선자리에 나갔고 캐빈이 은아를 마음에 들어했으므로 데이트를 했고 남자의 요구에 의해 같이 잠도 잤다.

만약 캐빈이 맞선자리에서 노, 했으면 그걸로 끝이 났을 인연. 처음부터 시작조차 못했을 인연. 아이가 유산이 되지않았더라면 어쨌든 은아는 캐빈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은아는 내 팔자려니하고 군말없이 결혼생활에 충실했을 것이다. 기계처럼 수동적으로.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하고 은아는 생각했다.

앞으로 그 누구를 다시 만나더라도 내가 결정해서 만나겠다. 엄마의 뜻이 아니고 상대방의 뜻이 아니고 나의 뜻에 의해. 오롯이 나만의 뜻에 의해…..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혼란스럽다. 캐빈과 헤어진 게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 혼란스럽다. 생애 처음 내린 중요한 결정인데 누가 판단을 내려 주지 않으니 마구 혼란이 온다. 누가 좀 말 해줘. 제발 누가 좀 말해 줘. 잘 했다고, 참 훌륭한 결정이었다고 말해 줘!

“은아야…..”

은아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지금 나의 이런 수세미같이 얽힌 복잡한 심경을 알까?

“캐빈이란 남자와 헤어지기로 한 그 결정, 함부로, 그리고 쉽게 내린 게 아니라고 난 믿는다……”

“엄….엄마…..”

그렇다. 입맛을 잃어가며 불면에 시달려가며 입술에 물집까지 생겨가며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긴 하다.

“결정, 일단 한번 했으면 후회하지 말아라. 그냥 뒤돌아보지 말고 진행해 나가렴….”

“엄마…..”

은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말 한마디로 온 몸을 덮고 있던 캄캄한 먹구름이 물러가고 햇볕 한 줄기가 쨍, 하고 비치는 기분이었다.

“그래야겠지, 엄마?

그때서야 조금 편안한 마음이 들어서 은아는 엄마를 향해 미소 지었다. 고마와, 엄마….

“은아야…..”

은아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미안해….”

“………”

“캐빈이란 남자를 네가 처음부터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조금도 염두에 두지않고 내가 정해 놓은 목적만 가지고 그 목적달성을 위해 마구 너를 몰고 간 것 같아서…..그래서 미안해…정말 미안해….”

“엄..엄마…..”

“그동안 내가 너를 너무 힘들게 했구나. 네뜻이나 의견은 조금도 물어보지 않은 채 순전히 내 욕심과 아집에 의해서 너를 강제로 조종했구나…”

그랬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은아는 엄마의 뜻대로 사육되었다. 머리 모양하나, 양말 한짝도 은아 뜻대로 은아 취향대로 할 수 없었다.

엄마가 은아의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 너의 결정을 존중 할께. 내가 보기에 너의 결정이 아무리 바보같은 거라도, 아니, 바보같다는 것은 순전히 내 자만에서 오는 생각이겠지. 절대로 토를 달지 않고 반대하지 않을께. 너를 믿을께……”

“엄마…..”

“ 너를 내 욕심대로만 이끌어가려고 닥달하고 혼내키고 힐난하고 볶아쳐서 미안해….”

“엄…..엄마…”

엄마의 두눈에서 눈물이 흘려내렸다.

“미안해…은아야…..”

복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으며 은아가 가까스로 말했다.

“나도 미안해, 엄마…..”

엄마가 원하는대로 훌륭하고 잘난 딸이 되지 못해 미안해. 누구에게나 자랑 할 수 있는 멋진 딸이 되지 못해 미안해. 엄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