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씨를 만나기로 한 날은 휴일 아침이었다. 뭘 좀 전해줄 게 있어 한 패스트 푸드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아침내내 불 피운 벽난로 앞에서 강아지랑 뒹굴거리다 약속시간 20분 전에야 마지못해 일어났다. 따뜻하고 아늑한 실내에서 추운 밖으로 나가는 게 참 귀찮았다.

이 닦고 세수하고(샤워는 전날 저녁에 했으니 생략하고) 머리는 손가락으로 설렁설렁 빗어 묶었다. 청바지에 스웨터를 입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다. 거울을 보니 게으름이 뚝뚝 흐르는 아줌마의 차림새다. 너무 대충 입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뭐 누구한테 잘 보일 일 있나, 그냥 그렇게 하고 가기로 했다.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운전해 약속장소에 갔더니 바깥에서 P씨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모르는 남자 두 명과 함께다. 두 명의 남자가 날 보고 활짝 웃으며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신문에 난 사진과는 많이 다르네?"

알고 봤더니 그 남자들은 나의 독자였다. 내가 온다는 얘길 듣고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다.

엄마야! 정말이지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쥐구멍이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바로 그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분이라도 대충 찍어 바를 걸. 머리라도 좀 단정하게 빗을 걸. 양말이라도 신을 걸!

우리 집에서 차로 3분거리에 대형 식품 할인점이 있다. 식당주인들이 주로 애용하는 곳인데 나는 집과 가깝다보니 동네구멍가게 같이 자주 들린다.

요리를 하다가 설탕이 떨어졌다. 집에서 입던 차림 그대로 설탕을 사러갔다. 가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인데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설탕 한 봉지를 집어 부리나케 계산대로 뛰어가는데 J씨랑 딱 마주쳤다. J씨가 누군가. 나를 멋쟁이라고 항상 칭찬하는 사람이다. 그가 활짝 웃으며 아는 체를 한다.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안…안…안녕하세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황급하게 지나치다가 발이 꼬여 넘어질 뻔 했다.

거 참, 이상하지. 내가 봐도 내 차림새가 참 가관이다, 싶은 날은 꼭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신경써서 차리고 나간 날은, 누가 좀 봐주었으면 하는 날은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바로 엊그제도 같은 일이 있었다.

한 호텔에서 열린 ‘와인과 음식’ 시식회에 초대받아 갔다. 이 지역 유명 식당들이 대거 참여하는 행사다. 한국사람이 없으려니, 하고, 그리고 이것저것 실컷 시식할 생각에 되는대로 편하게 입고 갔다. 그런데 아뿔사, 식당을 운영하는 K교수 부부를 만난 것이다.

성장(盛粧)하지 않은 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아마 생각했을 것이다. 명색이 글을 쓴다는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형편없이 하고 다니노, 하고.

갈수록 차리고 꾸미는 게 귀찮다. 날이 추우니 더욱 더 그렇다.

내가 미국 첨 와서 놀란 게 한겨울에도 맨발에 이른 바 ‘조리’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아침에 파자마에 외투만 걸친 차림으로 식당이며 마켓에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그러고 다닌다. 양말을 신어본 게 언제인지 모른다. 따뜻한 가운을 벗기 싫어서 그 차림으로 운전하고 나가 드라이브 뚜르를 통해 햄버거를 시켜온 일도 있다.

신문에 칼럼 쓰는 햇수가 길어지면서 밖에 나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래서 생각한다. 독자 서비스 차원에서라도 단정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헝클어진 모습으로는 밖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비록 내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