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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구야, 참 많이도 사다 날랐구나!

새 구두를 사가지고 와서 신발장을 열어 보면 더 이상 넣을 자리가 안보이는 것 같길래 신발이 좀 많기는 많구나, 했는데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어떤 건 언제 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은 것도 있고 상표가 그냥 붙어 있는, 사다놓기만 하고 한 번도 신고 나가지 않은 것들도 있다.

작년 가을, 싫증이 나 더 이상 신지 않는 것들을 추려 미련없이 없애버리기도 많이 없앴건만 또 이렇게 산처럼 구두들이 쌓인 것이다.

최대한 많은 신발을 수납하게끔 특별하게 짜 맞춘 신발장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것은 모두 내 구두들 뿐이다. 남편 구두라곤 구석 한 켠에 줏어온 자식처럼 빌붙어 놓여 있는 서너 켤레(불쌍하게도 말이지!)가 다다.

영화배우도, 탤런트도 아닌 내가, 멋 내는 걸 직업으로 가진 여자도 아닌 내가 도대체 뭣하러 구두를 아흔 켤레나 사다 날랐을까. 알게 모르게 내적으로 쌓인 욕구불만이 있는가. 가만히 현재의 내 생활을 되짚어 본다. 아니다. 나의 현재는 만족, 바로 그 자체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구두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필리핀의 이멜다 여사도 아니면서 말이다.

백화점에 가게 되면 내가 가장 먼저 직행하는 곳은 화장품 코너도 아니고 보석 진열대도 아니고 그릇을 디스플레이 해놓은 곳도 아닌, 바로 구두를 파는 곳이다.

효도용으로 제작된 것처럼 투박하고 뭉툭한 디자인부터 잘 빠진 여성의 몸 처럼 날렵하고 섹시한 디자인의 색색가지 구두를 눈 앞에 접하면 나는 마냥 황홀해진다. 허락된다면 구두 진열대의 구두들을 몽땅 집으로 가져가고 싶다. 그러나 내가 무슨 갑부집 마누라라고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그저 맘에 드는 몇 켤레만 갖다가 만져 보고 발에 직접 꿰어본 후 그 중 한두 켤레만 구입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다.

너무나 맘에 쏙 드는 디자인의 구두를 칫수나 색깔 때문에 사지 못할 때가 가끔 있다. 그때의 심정은 마지막 한 자리 숫자가 틀려 억만금의 복권에 당첨되지 못한 사람이 따로 없다. 아쉽고 분하고 안타깝고 슬프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많은 구두를 가지고 있는 걸 모른다. 내가 신고다니는 구두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검정과 밤색 일색에 거의 단순한 디자인의 오픈 토 하이힐이다. 여자라면 누구나 구색으로라도 갖추고 있는 빨강색이라든지 핑크색 구두는 단 한 켤레도 없다.

예전엔 키도 작으면서 항상 납작한 단화만 신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높은 구두 굽의 매력에 시쳇말로 '필이 꽂히기' 시작하더니 하이힐 애호가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요즘은 이른바 젓가락처럼 아찔한 굽의 '킬힐'이 유행이라 구두 사는 일이 더욱 신바람나는 일이 되었다.

나는 가능한 한 단순하고 간결한 삶을 살고저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 예의 하나로 나는 집에 물건 쌓이는 걸 못견뎌 한다. 정리하고 버리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인 것이다.

며칠 전에는 그동안 글 써서 받은 상패들과 여기저기서 받은 감사패들을 몽땅 갖다 버렸다. 몇 권이나 되는 앨범도 다 갖다버렸다. 일년 가야 한두 번 들쳐 볼까말까 한 것들이 벽장 구석에 쌓여 있는 것이 갑자기 너무 부담스러워졌기에.

휑 하니 드러난 벽장 안을 보니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 얼마나 시원하고 상쾌하던지.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다른 물건들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숨이 막힐 것처럼 극도로 싫은데 신발장에 구두가 쌓이는 것은 너무나도 대견하고 뿌듯하니 말이다. 마치 볏섬이 가득 찬 곳간을 바라보는 농부처럼.

곧 날씨가 따뜻해 질 것이고 나는 또 계절에 맞는 구두를 산다는 핑계로 구두가게 순례에 나설 것이다. 그리고 곧 나는 백 켤레의 구두를 가진 여자가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박완서씨가 세상 떠난 남편을 그리면서 쓴 '아홉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이란 글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암과의 투병으로 빠지는 머리카락을 감추고저 쓰기 시작한 남편의 모자 아홉개,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벽에 걸린 모자 아홉개가 자신을 바라보며 대화를 하더라는 내용이었다.

혹시 아는가. 지병이나 사고로 내가 내일이라도 세상을 떠난 후에 남편이 '백 켤레의 구두로 남은 당신'이라고 애닯아 하면서 내 구두들과 대화를 나누어 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