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엄마 장례식을 치르고 미국에 돌아온 날 새벽에 쓰러진 적이 있다.

6년 전 일이었다. 갑자기 한쪽 몸에 힘이 빠지면서 마비가 온 것이다.

응급차로 실려 간 병원에서 뇌졸중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일 주일을 입원해 MRI, CT등 온갖 검사를 다 받았는데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 대한다며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뇌졸중은 보통 혈압과 콜레스트롤이 높은 사람한테만 오는데 나는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으니 말이다.

일주일을 입원해 있다가 멀쩡하게 퇴원했다.

만물박사로 통하는 H씨가  내 증상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 주었다.

"우리가 흔히 쓰는 '기(氣)막힌다'는 말 있지? 경악스럽고 비통한 일을 당했을 때 기막힌다는 말 많이 쓰쟎아. 이계숙씨가 기가 막혔던 거야. 기가 막히면 일단 심장에 무리가 가고 심장이 제 역할을 못하니 혈액순환이 더뎌지지. 혈액순환이 제대로 안되니 혈전이 생길밖에. 그렇게 형성된 혈전이 뇌의 핏줄에 가서 엉겨버린 거지."

그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한 달 사이 나는 엄청난 일을 당했으니까. 11년을 키운 강아지의 죽음과 엄마의 죽음. 그 스트레스의 강도가 얼마나 높았을까. 기가 막힐 만도 했다.

살면서 기막히는 일을 당하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일까.

최근에 우리 모임의 일원 하나도 그랬다. 남들이 평생을 일 해도 만져보지 못할 거액을 들였던 사업체를 문 닫고 만 것이다. 몇 년동안 생돈을 퍼부으며 고전하던 끝에 마침내 내린 결정이라고 했다.

무슨 도움이 될까마는 상심하고 실망해 하는 그녀를 위해 나는 성심껏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래도 일단은 비 피할 집도 있고 오늘 저녁에 먹을 양식이 있쟎아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그렇게 속끓이다가 병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그럽니까?

나는 내 경험을 얘기해주었다. 그렇게 너무 속상해 하고 비통해 하면 기가 막히고 만다고.기가 막히면 뇌졸중, 즉 중풍이 올지도 모른다고.

중풍이란 말에 정신이 번쩍들었는지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렇지? 이왕 벌어진 일이니 얼른 싹 포기하고 잊어버려야 정신건강에 좋겠지? "

얼마 전 나는 기막히는 일을 또 겪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경험한 건 처음이었다. 누구에게 털어놓을 만한 성질의 것도 아니라 혼자 가슴만 치면서 며칠을 그렇게 지냈나 보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내 몸이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 심장이 조여오는 것 같더니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손끝이 마구 저려왔다.

오오, 이게 바로 기막히는 증상이로구나!

나는 얼른 뒷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한참동안 맨손체조를 했다. 부엌으로 돌아온 나는 찬밥을 물에 말았다. 그리고 김치를 반찬으로 해서 숨도 쉬지 않고 아귀아귀 먹었다.

휴가 받아 집에 있던 나는 며칠동안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어떤 이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먹는 것으로 푼다는데 나는 일단 입맛부터 떨어지니까.그래서 식음을 전폐한다.

물 말은 밥 한 대접을 다 비우고 집안을 서성거리다가 거울 앞에 무심히 서게되었다. 고춧가루와 김치국물을 입가에 덕지덕지 묻힌 우스꽝스런 몰골의 여자 하나가 거울 속에 있었다. 항상 또랑또랑 총기가 넘치던 여자의 눈빛은 우울했고 흐리멍텅했다. 미소가 떠나지 않던 입꼬리는 추욱 처져 있었고 생기넘치던 피부는 거무스름하게 죽어있었다.

나는 거울 앞을 물러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살다보면 앞으로 이보다 더한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가능한 한 기막히지 말자.기막히지 않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