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이었다.

차 시동을 꺼기 직전 창민은 시간을 확인했었다. 10시 36분. 지금 바로 집안으로 들어간다해도 많이 늦은 시간.

그러나 창민은 집 현관문이 빤히 보이는 곳까지 걸어와서도 집 열쇠를 꺼내들지 않았다. 열쇠를 꺼내드는 대신 라이터와 담배갑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윗집으로 올라가는 입구로 걸어가서 계단에 걸터 앉았다.

아까 식당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거칠게 쏟아지던 비와 바람이 그쳐 있었다. 언제 개였는지 하늘에 별이 총총하다.

창민은 깊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가 들이마시면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헤드라이트를 켠 차만이 이따끔씩 한두대 지나다니고 있는,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볼 수 없는 비 온 뒤의 컴컴한 한밤중의 아파트 앞. 창민은 층계에 걸터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부부싸움이라도 크게 하고 나온 사람같은 모습이었다. 아주 외롭고 고단해 보이는 모습같기도 했다. 높고 가파롭고 거대한 삶과의 사투에 지친 고독한 가장의 모습. 담배 한대로 시름을 달래고 내일의 또다른 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전의를 다지고 있는 그런 가장의 모습.

그러나 아니었다. 그건 아니었다. 지금 창민은 시간을 벌기 위해 그렇게 앉아있는 거였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다. 또한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맞닥뜨릴 아내, 미진의 얼굴을 가능하면 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장마철의 하늘처럼 잔뜩 구름이 덮힌 미진의 찌푸린 얼굴과, 속사포처럼 터져나오는 가시돋친 잔소리와, 끓는 물주전자처럼 쉬임없이 새어나오는 한숨과 비탄으로 지금의 감정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은 게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는 이유였다.

여름이…..여름이… 한 여름이……그리고 심사위원 및 논설위원…..창민은 중얼거렸다.

앞으로 한달에 한번은 반드시 만나게 될 아가씨, 한 여름.

인터넷한테 기존 독자들을 잃게 된 한울 신문이 사력(死力)을 다해 추진중인 사업이 ‘문예 한마당’이라고 했다. 창민은 앞으로 그 ‘문예 한마당’의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다. 논설위원이란 직함을 달고서.

기회라는 것은 힘껏 노력을 해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데도 스스로 찾아들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어떻게해서든지 입사하고 싶어 했던 한울 신문사였다. 한국보다는 규모가 많이 작긴 하지만 어쨌든 그 한울 신문사의 문예작품 심사위원 및 논설위원으로 일 할 수 있는 기회란 매우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었다.

기회는 아주 쉽게 찾아왔다. 지난 번 한울 신문에서 공모한 ‘제 1회 단편소설 현상모집’에서 창민이 1등 당선된 것을 계기로 찾아온 것이었다.

“첫째 김창민씨의 나이가 좋았습니다. 우리 한울이 젊은 신문을 지향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이번 문예 한마당은 젊은 층을 타겟으로 하고 있지요. 그리고 한국과 미국에서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신 학력과, 대학에서 학보기자를 다년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할 때 우리 문예 한마당 심사위원과 논설위원으로는 무척 적합한 분이라고 사료됩니다. 물론 지난 번 우리 신문사의 문예작품 공모전에 1등한 경력이 큰 플러스가 되었지요”

한울신문 편집국장의 말이었다. 그는 창민의 손을 잡으며 호탕하게 말했다.

“우리 한번 잘 해봅시다. 문예작품 1등에 입상한 것과 대학 학보 기자를 지냈다는 경력을 빼면 문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김창민씨를 제일 강력하게 추천한 사람이 나니까 내 체면을 꼭 세워 줘야 해요”

편집국장의 손을 마주잡으며 창민은 자신에게 다짐했다.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삼아 신문사로 한번 진출해보겠다고. 스스로 찾아온 이번 기회를 놓지않겠다고.

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응모한 것도 어찌보면 아주 우연한 기회였다.

미국에서 같은 대학을 다녔던 박 교수랑 한국 식당에 가지 않았으면 오지 않았을 기회.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사이, 박 교수가 전화통화를 하러 잠깐 밖에 나갔다. 혼자 멍하니 앉아 있기가 뭐해서 창민은 옆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신문을 집어들었다. 그냥 무심코 집어들었을 뿐인 신문. 마침 거기에 사고가 나와있었던 거였다. 그날 그 시간에 그 한국식당에 가지않았더라면, 아니 박 교수가 전화통화 하러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전혀 모르고 그냥 지나쳤을 그 사고(社告). 한울 신문의 5천달러 고료 제 1회 단편소설 현상모집 사고.

그날 저녁부터 창민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당선이라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않고서. 당선되면 좋고 안 되어도 별로 애탈 것 없다는 심정이었다. 교포사회의 문학 수준은 어떤가 한번 가늠해봐야겠다는 치기도 있었다. 심사위원은 어떤 작품을 선호하는가, 어떤 작품이 당선되나 그냥 가볍게 한번 도전해보자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그 사고가 나갔을 것이다. 그 사고를 보고 작품 응모를 생각했던 사람들은 많은 공을 들이면서 미리 준비를 했을 터였다. 고치고 지우고 다시 쓰고, 수십번 수백번의 퇴고를 거치면서 말이다.

그러나 창민은 단 이틀만에 소설을 완성했다. 당선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별로 성의있게 쓰지도 않았다. 누에꼬치 꽁무니에서 비단실이 나오듯 술술 그렇게 거침없이 쓰였기에 퇴고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1등에 당선되었다.

와아, 내게 글쓰는 재능이 있긴 있구나!

당선소식을 듣고 창민은 내심 자신을 한번 돌아보았다. 중학교때부터 각종 글짓기 대회를 휩쓸긴 했지만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는 번번히 고배를 마셨다. 식구들 몰래 ‘동명’이라는 필명까지 써가며 매년 각 신문사에 보냈던 작품들이 심사평에 단 한줄 언급조차 되지 않고 깡그리 무시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머리까지 짧게 깎고 심혈을 기울여 썼던 다섯번째의 신춘문예 응모 작품이 낙선되었을 때 창민은 문학에의 꿈을 접었다. 글 쓰는 일은 내게 적합한 일이 아니구나, 하고.

그랬는데 단 이틀만에 완성한 작품이 1등에 당선된 것이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 토끼가 왕이라더니 미국이라 경쟁자가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소재가 참신하고 특별해서였을까.

영어를 거의 못하는 한 유학생이 음주운전에 걸리게 되었고 그 일을 해결하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면서 겪은 일들을 ‘나’라는 일인칭을 빌어 소설 형식으로 구성한 작품이었다.

창민이 왜 그 ‘음주운전’에 대해 자세히 아는고하니 박 교수로부터 얻어들은 게 많은 때문이었다.

박 교수가 지난 봄, 음주운전에 걸렸었다. 한 공원에서 열렸던 한국 유학생들과의 야유회에서 삼겹살에 소주 두어병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경찰에 적발된 거였다. 창민은 박 교수와 일주일에도 서너번씩 통화하면서 음주운전에 걸린 사람들이 어떤 경로와 절차를 밟아가며 그 일을 해결해야만 하는지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이다.

유머와 적당한 섹스, 그리고 욕설을 곁들인 창민의 소설은 자신이 읽어봐도 재미는 있었다. 심사위원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미국에 사는 교포들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심심찮게 겪는 고약한 일을 멋지게 문학작품으로 승화해 낸 수작’이라는 심사평을 달고서 당당히 1등에 당선시켜준 것이다.

심사위원은 한국의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던 노(老)교수였다. 은퇴한 후 미국의 자녀집에서 노후를 보내면서 짬짬이 집필을 하고 있다는 노교수. 한국에 있을 때 신문에 사진과 이름이 자주 난 걸 본지라 창민도 익히 이름을 들어 알던 사람이었다.

시상식장에서 노교수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었어요. 아주 재미있었어. 몇몇 다른 소설들이 작품성으로 치면 더 우수하고 뛰어났었는데 재미로 치면 김창민씨의 글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지. 당신 글이 뽑힌 것은 단지 재미가 철철 넘쳤었기 때문이야!”

창민은 그날 상금 3천불과 상패와 신문사에 준비한 꽃다발을 받았다. 또한 가작 및 우수작에 당선되었던 다른 세 사람과 함께 한울신문 1면에 크게 기사와 사진이 나왔고 창민의 소설은 당선소감과 함께 이틀에 걸쳐 한울신문 전면에 걸쳐 실렸다.

그러고나서 끝날 줄 알았던 신문사와의 인연이었다. 두번 다시 신문사와 관계를 맺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는데 어느날 창민은 전화 한통을 받았다. 한울신문 ‘오피니언 면’ 담당 기자라는 아가씨였다. 이름이 ‘한 여름’이라고 했다. 성이 한씨요, 이름이 여름.

목소리와 말투만으로도 아주 어리다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가씨가 말했다.

“저희 신문사에서요. 지난 번 문예작품 공모를 계기로요. 숨어있는 아마츄어 신인작가들을 계속 발굴해내기로 했거든요. 글에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발표할 곳이 없어 위축돼 있는 문학도들을 위해서요. 지난번 공모에 거의 200편이나 되는 작품들이 들어왔는데 탈락시키기가 아까울 정도로 모두 빼어난 것들로 심사위원님이 깜짝 놀랄 정도였대요. 그래서요. 한 달에 한번 단편소설과 수필을 발표할 수 있는 ‘문예 한마당’이란 페이지를 저희 신문에 만들기로 했거든요. 근데요. 아무 작품이나 막 실어줄 수는 없으니까요. 좋은 작품을 잘 걸러내서 선정할 분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우리 편집국장님이요. 김창민 선생님을 심사위원으로 위촉하면 어떨까 여쭈어보라고 하셔서요.”

꽤 긴 용건을 숨도 한 번 안 쉬고 전하는 한 여름이라는 아가씨. 그 아가씨가 또르르 또르르 방울이 굴러가듯 맑은 목소리로 전하는 내용은 참으로 놀랍고도 반가운 것이었다.

“물론 많지는 않지만 사례비도 드린다고 하구요. 그리고 이 기회에 김창민 선생님을 우리 신문사에 논설위원으로 모실 계획도 있나봐요. 교포사회에 어떤 사건과 사고가 있을 때마다 그 이슈를 분석하고 진단하는 글을 써 주실 분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이 일을 위해 일단 저희 편집국장님과 면담을 가져야 할 것 같은데요. 김 창민 선생님은 어떤 날, 어떤 시간이 가능하신지요?”

당연히 창민의 대답은 ‘예스’였다. 원고지라는 것을 처음 대했을 때부터 키워왔던 문학의 꿈이 있었다. 그리고 신문사의 높은 건물을 볼 때마다 입사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 꿈을 이룰 기회가 왔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한울’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과 조건이지만 어쨌든 ‘한울 신문사 논설위원’이란 명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창민은 여름이와 몇번 더 통화를 했다.

신문에 소개할 창민의 경력과 사진을 주고받느라.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실을 것인지에 관해서 의견을 타진하느라. 그리고 갑자기 본국에서 온 한울 신문사의 우두머리들 때문에 미리 해놓은 편집국장과의 대면 약속을 취소하고 다시 잡느라.

그러고 난 뒤 한 중국식당에서 이루어진 첫 만남. 그 첫 만남이 오늘 있었던 것이다.

지난 번 신문사 회의실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같이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눈 바 있는 나이 지긋한 편집국장과 여름이가 나와 있었다.

시상식장에 여름이도 있었다고 하는데 창민은 경황이 없어서 전혀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이 여름이와 첫대면이나 다름없었다. 창민은 여름이와 악수를 나누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친근감이 드는 것이다. 따뜻하고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왜일까. 한번도 만난적 없이 목소리만 몇 번 들었을 뿐인데.

여름이는 전화목소리에서 짐작할 수 있었듯이 아주 어린 여자아이였다. 이십대 초반쯤 되었을까. 마악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같은. 풋풋한 풀 냄새가 풍겨올 것 같은. 맑고 깨끗한 시냇물에 잠겨있는 조약돌 같은.

적당한 키에 몸매는 약간 통통한 편이었다. 동그란 얼굴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웃을 때마다 양볼에 보조개가 잡히면서 눈이 아주 감겨버리는 모습이 아기같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아무런 화장을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도 얼굴에서 분가루가 묻어 날 것같이 고와보였다.

여름이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창민은 생각했다. 참 싱그럽다…..

창민은 편집국장과의 대화 도중 이른 아침 풀잎에 맺인 이슬을 보는 것 같은 기분으로 여름이를 간간히 쳐다보았다. 그동안 살면서 한번도 가지지 못한 느낌, 박하사탕을 입에 문 듯한 그런 싸아하고 청량한 느낌을 가지면서.

“신문사에 출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응모되어지는 순서대로 한 여름 기자가 김창민씨에게 보내드리게 될 거예요. 물론 이메일로지요. 응모작품은 온라인으로만 받기로 했어요. 김창민씨는 그걸 받아서 읽어보시고 ‘이달의 작품’을 선정하는 겁니다. 작품이 얼마나 들어 올런지 미정이긴 하지만. 지난 번 문예작품 공모에 일일이 추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쇄도했던 걸로 봐서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예상은 하는데 모르지요. 이번에는 상금과 상패가 없으니까. 신문에 작품을 실어주는 걸로만 만족해야 하니까요. 어쨌든 각 장르별로 한 편씩만 뽑아주시면 됩니다. 뽑아낸 그 작품에 반드시 디테일한 심사평을 써줘야 하고 심사평과 함께 다시 그 작품을 한여름 기자에게 보내면 됩니다”

“아, 예. 아주 간단한 일이군요”

신문사에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편집국장의 말에 창민은 약간 실망을 느꼈다. 그 말은 여름이를 다시 볼 기회가 없다는 말이었으니까.

창민의 얼굴에 나타난 실망을 눈치챈 것일까. 편집국장은 능글능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우리를 만나야 할 거요”

작품이 뽑힌 사람들과 신문사에서 간담회를 매달 가진다고 했다. 글을 쓰게 된 동기와 앞으로 동포사회의 문예활동과 사업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 그리고 기념 사진을 찍어 신문에 싣는다고 했다. 문학인들의 사기 진작을 고취하는 취지에서 사진과 기사를 자주 내보낸다는 것이다.

편집국장은 덥지도 않은 실내에서 이마에 땀까지 흘려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 달의 작품으로 뽑힌 사람들에게는 부상으로 반년간 무료로 신문을 보내줄 생각입니다. 종이 신문에 관심없던 사람들도 자기 사진이나 기사가 나가면 신문을 열심히 보게 돼 있어요.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도 자기 기사와 작품이 실렸다는 것을 알려 신문을 구입하게 만들지요. 한 사람 앞에 아는 사람이 열명이라고 치면 열부가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한 번 우리 신문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나중에라도 신문을 구독하게 될 겁니다”

편집국장이 말했다. 그렇게해서라도 독자를 늘리려는 편집국장의 노력이 눈물겨워서 창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무료로 반년동안 신문을 받아 본 사람들은 미안해서라도 그 뒤에 계속 유료로 신문을 구독하겠지요. 바로 그걸 노리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하고 창민은 수긍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무료 구독기간이 끝났다고 매몰차게 등을 돌리지는 않겠지…..

“바쁘시겠지만 한 달에 한번 열리는 간담회에는 김창민씨가 반드시 참석을 해주셔야 합니다. 물론 오늘처럼 양복을 입어주셔야 하고. 권위있는 심사위원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죠. 미국에서 양복입을 일이 거의 없으니까 그럴 때나 양복 한 번 입고 폼 좀 잡아 보시지요. 오늘 입은 양복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소주 몇잔이 들어가 얼큰해진 편집국장이 핫핫핫 웃으며 말했을 때 창민은 그럼요. 물론이죠 하고 얼른 대답했다.

맑고 상큼한 아가씨, 여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간담회라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참석할 용의가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전화통화만 했을 뿐 처음 얼굴을 본 여름이를 앞으로 종종 더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그 어떤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그때 퍼뜩 들었던 것이다. 여름이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날 처음 본 여름이가 어느새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 것을 느끼면서 창민은 자신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런 느낌이 생길까. 어려도 한참 어린 아가씨한테로 향하는 이런 이상한 느낌의 정체는…..

여름이쪽을 안 보려 애를 쓰는 데도 눈은 자기도 모르게 그 쪽을 향하고 있었고 두 귀는 여름이를 향해 쫑긋 열려있는 것이다. 여름이의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시상식 날짜와 시간은 매달 제가 알려드릴께요. 이메일로 알려드리면 돼죠?”

편집국장의 장황한 얘기가 끝나고 여름이가 창민을 보며 그렇게 말했을 때 창민은 말까지 더듬었다.

“그…그렇게 해 …해 줘요….”

이메일 말고 전화로. 그래야 여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지 하는 말이 입술 끝에까지 나왔으나 창민은 바보처럼 더듬거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름이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무심코 여름이가 머리를 쓸어 올리는 동작을 취했을 때, 창민은 보았다. 여름이의 목덜미, 눈부시게 희고 팽팽한 목덜미를. 가슴에 작은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는 창민. 창민은 애써 눈을 다른 데로 돌리며 생각했다. 어리디 어린 아가씨를 보고 이렇게 정신을 못차리다니 술이 조금 취하긴 취했나보군…..

아닌게 아니라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때문인지 창민의 머리가 핑핑 돌고 있었다. 소주에 취하고. 아름다운 여름이의 자태에 취하고.

편집국장은 어지럽고 복잡한 창민의 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자자, 한잔 더 마십시다. 김창민 씨같은 유능한 분을 우리 신문사에 영입한 날이니까 오늘은 아주 기쁜 날입니다. 오늘 같은 기쁜 날 안 마시고 언제 마시리요”

편집국장은 자신이 직접 제조한 ‘폭탄주’를 맥주컵에다 부어 마시면서 말했다.

“술이 어느정도인지? 술에 약하면 말 하세요. 더 이상 권하지는 않을 테니까.하도 단속이 심해서 말이야…..”

창민은 혹시 편집국장의 귀가길을 여름이가 책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렇지않고서야 저렇게 마음놓고 술을 마시고 있을 수가 있을까. 대리 운전을 부르는 걸까…..

“지난번 제 작품말입니다….”

대리운전일까. 여름이일까.

창민은 편집국장의 귀가길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편집국장이 어떻게 집에 가던 말던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지. 여름이가 관계된 일일지도 모르니까 .

“시상소감에서도 잠깐 밝혔지만 제 작품은 실화를 토대로 쓴 것입니다.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직접 겪었던……”

창민의 말에 편집국장이 아, 하고 얼른 반응을 보였다.

“실화라고 해서 흥미가 더한 작품이었지요”

“미국에서는 음주운전을 너무 심하고 엄중하게 취급하는 것 같습니다. 거의 살인범수준이예요. 사회생활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술도 한잔 할 수 있는데 그걸 가지고….”

창민은 편집국장의 기색을 살폈다.

“제 친구, 아직도 그 일을 완전히 해결해내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동안 들인 시간과 금전을 생각하면 두번 다시는 음주운전을 하지 말아야지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게 어디 그렇습니까. 좀전에도 얘기했듯이 어쩌다보면 술 한두잔 쯤은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고 그러고 나서 무심하게 운전도 할 수 있는데……”

“그래서….”

편집국장이 핫핫핫 하고 다시 호기롭게 웃었다.

“그래서 나는 술 먹을 일이 있을 땐 이렇게 전용기사를 데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한잔이든 두잔이든 음주운전에 적발되었다하면 돈에, 시간에, 망신에, 감당해야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니까….”

“전용기사?”

창민이 짐짓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편집국장이 옆에 앉은 여름이를 가리켰다.

“우리 한 여름 기자가 술먹는 날 내 귀가를 책임져주고 있지”

창민의 짐작이 맞았다. 여름이었다……..

“같은 방향에 있어서요…”

여름이가 수줍은 듯 말했다.

“편집국장님 댁이 저희 집 가는 길목에 있어서……”

창민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짖궃은 농담 잘 하고 호방한 성격의 편집국장이랑 같은 차를 탄단 말이지. 저 작자가 여름이의 손을 잡지는 않을까. 여름이의 무릎에 손을 올리지는 않을까. 술 취한 척 하고 말이지……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두 사람이 눈치챌까 봐 안주를 집는 체 하며 고개를 숙이는 창민.

편집국장이 말했다.

“여름이 아빠와 내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예요. 내 딸이나 진배없는 여름이가 있으니까 내가 맘 놓고 술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거지…..”

그 말에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창민.

아무리 술 취해 이성을 잃는다해도 친구의 딸한테 이상한 마음을 품지는 않겠지 하는 안도의 숨이었다.

창민은 앞에 앉은 여름이를 슬쩍 다시 바라보았다. 눈이 부셨다. 앞으로 이 아이와 자주 통화할 수 있고 한 달에 한 번은 볼 수 있다…..정말이지 살 맛 안 나는 요즘같은 생활에 여름이가 달고 시원한 청량음료같은 위안이 될 것 같다…..

창민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버리기 위해 옆 화단의 나뭇잎을 하나를 땄다. 나뭇잎에 꽁초를 싸서 호주머니에 넣고 창민은 천천히 일어섰다.

별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마냥 바깥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가 온 이후라서 그런지 봄인데도 제법 기온이 쌀쌀했다. 더구나 찬 시멘트 계단에 장시간 앉아 있었으니 한기가 들어 등이 으실으실 떨렸다.

창민은 집을 향해 두어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열발자욱만 움직이면 집 문 앞인데 눈에 띄게 발걸음이 느려진다. 창민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놓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여름이를 밀어내고 대신 창민의 머리에 들어 온 사람, 미진이었다. 미진이 생각만 하면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것이다.

지금 문을 열고 들어가면 펼쳐질 광경.

보지 않아도 뻔했다. 미진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맞을 거였다. 여느때와 다를 것 없는, ‘ 나 지금 무척 불행해’하고 쓰여있는 것 같은 불만과 짜증과 우울함이 가득 찬 얼굴.

밥은 먹었어? 하고 미진은 물을 것이다. 애정과 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담기지 않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먹었어’ 하고 대답하면 ‘알았어, 그럼’ 하고 조개처럼 입을 다물 것이다. 어쩌면 늦은 시간이니까 먼저 자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창민은 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으므로 보통은 미진이 먼저 들어가 잔다. 미진은 항상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다. 돌아누운 등에서 냉랭하고 차가운 기운이 감돈다.

나름대로 이해는 한다고 창민은 생각했다. 힘들겠지. 혼자 네 식구의 생계를 꾸려나가려니 여러모로 힘들겠지. 그러나 일부러 취직을 안 하는 게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나름대로 이력서도 여기저기 넣어본다. 창민이 전공한 에니메이션과 연관된 회사에다, 각 영화사에다. 그러나 별로 신통치 않았다. 졸업만 했지 일단 경력이나 작품을 완성해 본 전력이 없으니.

견습생으로 최저 임금을 받으며 일하려면 오라는 데는 많지만 창민은 그런 데로 가기엔 자기는 너무 고급인력이라 생각한다. 그런데서 잡일이나 하며 썩느니 차라리 참신한 게임을 개발하는 게 낫다. 창민은 온 세상이 놀랄만한 게임을 개발해서 대박을 터트릴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창민을 미진은 못마땅해하고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창민을 볼 때마다 한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본래 잘 웃지 않고 명랑하지 않은 여자이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한숨 쉬는 빈도가 더 높아지고 얼굴에는 더욱 짙은 구름이 덮혀 있다. 미진의 웃는 얼굴을 본 게 언제 였는지. 웃는 얼굴은 고사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들어 본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둘은 아예 대화라는 것을 하지 않으니까. 둘 사이에 견고한 벽이 있다. 벽을 두고 하나는 안에, 다른 하나는 바깥에 서 있다. 창민은 자신이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외투 하나 없이 추운 바깥에 서 있는 사람. 바로 지금같이. 무방비로.맨손으로.

창민은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거실은 캄캄하고 부엌 식탁쪽에만 불이 커져있다. 식탁에 미진이 우두커니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늘 그랬듯이 무표정한 얼굴이다.

창민은 미진을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어쨌든 늦게 들어가는 것은 미안한 일이니까.

“왜 안 자고 있어?”

창민은 양복저고리를 벗으면서 미진에게 말을 걸었다. 최대한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피곤할 텐데 먼저 자지…..”

“전화는 왜 안 받았는데?

미진이 도전하듯 물었다.

“무슨 전화?”

창민은 신문사 사람들과의 대화에 방해가 될까봐 전화를 꺼놓았던 것을 기억해 낸다. 창민은 들고 있던 양복저고리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부재중 전화가 네 통이나 와 있다.

“무슨 일 있었어?”

“제이가 아팠어”

“제이가?”

“열이 100도까지 올라서 가능하면 빨리 모임을 끝내고 해열제 좀 사오라고 몇번이나 전화했는데 받지 않더군”

“뭐라고?제이 지금 어딨는데?”

창민의 목소리가 크게 올라갔다. 그러나 미진은 피식 웃는다. 같잖다는 듯. 뒤늦게 뭔 호들갑이냐는 듯. 창민은 그런 미진을 애써 무시하고 황급한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

“제이 괜찮아.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급한대로 앞집으로 뛰어갔었지. 그 집도 어린아이를 키우는 집이니까 구급약이라도 있겠지 하고. 다행히 해열제가 있다면서 몇알을 나누어 주더군”

“그래서? 그래서 제이 괜찮냐고, 지금?”

“잠들었어……”

잠들었다는 미진의 말에 창민은 휴, 하고 한숨을 내쉰다.

“다행이네…..”

오늘 편집국장과 나누었던 얘기. 앞으로 신문사에서 일 할 것 같다는 얘기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창민이다. 제이가 아팠다는 말에 쑥 들어가 버린 것이다. 하긴 그 따위 소식에 반응할 미진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적어도 용돈정도는 벌어 쓸 수 있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잠깐이나마 밝아지는 미진의 얼굴을 보고싶었는데. 내일이나 언제 적당한 기회 봐서 얘기를 해야지.
창민은 소파에다 양복 저고리를 던진다.

“혼자 수고가 많았군……”

미진은 대답하지 않는다. 고개를 외로 꼬고 식탁만 내려다보고 있다.아이가 아픈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는 중요한 사안에 비해 미진이 크게 화를 내지 않는게 좀 이상하다.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별로 말이 없다. 그 말 없음이 마음에 걸린다. 침묵은 웅변보다 더 깊은 뜻을 내포할 수도 있으니까. 폭풍전야인가. 얼마나 크게 터트리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일까.

창민은 방으로 들어간다. 무조건 피하고 보는 게 장땡이다. 들어봤자 그 소리가 그 소리 일 거니까 오늘 들어도 내일 들어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으니까.

뻔한 소리일 터였다. 아이가 이렇게 아픈데, 자기는 혼자 당황하고 무서워서 쩔쩔매고 있는데 태평스럽게 전화마저 꺼놓고 나몰라라 하고 있었냐.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데 왜 전화는 꺼놓았냐. 그렇게 꺼놓고 다닐 전화를 뭣하러 가지고 다니냐…..

방바닥에서 제이와 케이가 평화롭게 자고 있다. 보통은 두 아이들이 침대를 점령하는 편이다. 그래서 창민과 미진은 침대 귀퉁이에 끼어서 자야한다. 오늘은 아이들이 침대를 버려둔 채 바닥에서 자고 있다. 아마 바닥에 전기장판을 켜져 있으리라. 아닌게 아니라 침대보다는 뜨뜻한 전기장판이 오늘같은 날씨에는 더 나을 것이다. 더구나 제이는 아픈 아이니까.

창민은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벌렁 눕는다.

천정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창민의 얼굴에 오늘 만났던 여름이의 동그랗고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언제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고 해야겠군. 앞으로 같이 일을 해야할 터인데 미리 친해놓아야지…..

창민의 얼굴에 설핏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