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숙씨가 쓴 ‘털어놓기도 부끄러운 이야기’ 라는 장편 넌픽션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섹스중독자인 미국인 남편에게 10년여동안 짐승처럼 학대당하며 살았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 눈이 멀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강도높은 폭력을 당하며 살아온 이정옥씨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 여자들의 인생은 왜 이리 기구하고 가혹할까요.
밤을 새다시피 그 긴 글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윤승준과 살았던 과거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라서입니다. 이정옥씨가 살아낸 핏빛 세월이 내가 겪었던 무서운 세월과 오버랩 되었기에 나는 몇번이나 몸서리를 쳤습니다.
정말이지 꿈에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는 끔찍하고 고통스런 나의 과거였습니다.누구에게도 함부로 털어놓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며 덮으며 지나 온 세월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몰랐기에, 너무나 순진했기에 당해야만 했었던 일들이었습니다.
다음은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의처증은 단어의 의미 그대로 아내나 애인의 불륜을 의심하는 질병이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집착하며 나아가서는 폭언과 폭력을 휘두른다. 정신의학과에서는 이를 망상장애의 한 종류로 분류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망상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득해도 전혀 변하지 않는 잘못된 믿음을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본인은 물론이고 사회에서도 흔히 의처증을 질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정신과적 치료를 받아야 정도로 큰 문제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배우자나 가족 전체가 이로 인해 크나큰 정신적 피해를 받는 것.
특히 사회적 인식 또한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식으로 배우자가 의심이 될 만한 원인제공을 했다고 여겨 이를 묵과하기 쉽다.
의처증의 원인은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주로 심리적 요인으로 설명된다.
성격적으로는 주로 편집증적 성격의 소유자가 많은데 다른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대해 예민하고 과장해서 생각하는 경우나 남을 잘 믿지 못하고 남이 한 행동을 절대 이해고 넘어가거나 잊지 못하는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나는 이 내용을 읽으며 가슴이 저렸습니다. 진작 이에 대한 것을 알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좀 더 일찍 내 행복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을.
그랬습니다. 윤승준은 의처증이라는 정신병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남자가 그런 병을 가진 사람이라고는 꿈에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남의 남자 무릎에 앉았다는 이유로 첫 번째 폭력을 당한 후 두 번째로 입술이 찢어지고 코피가 터지고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나 빠지는 무자비한 폭력을 또 당했으면서도 나는 그를 용서하고 이해했습니다.
실직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일 거야. 내가 잘못했지.다 내 잘못이야…..
그리고 윤승준이 나를 때린 것은 나를 많이 사랑해서라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폭력이라는 다른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믿으려고 애썼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참 바보같은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동안 가장 큰 후회가 있다면 폭력을 계속 당하면서도 왜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방어하고 대처하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인격체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 서로 때리고 맞아서는 안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털어놓기도 부끄러운 이야기의 주인공도 그랬지만 나에게도 이에 대해 바르게 조언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우리에게는 폭력이 잘못된 거라고 애기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의 결혼 생활은 피로 점철되었습니다. 하루라도 안 맞고 넘어가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요. 늘 온몸에는 푸릇푸릇한 멍이 가시지 않았고 상처투성이었습니다. 피투성이를 한 채 땅바닥을 짐승처럼 뒹굴었던 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내가 흘린 피로 바닥을 흥건하게 물들게 한 게 셀 수도 없습니다.
‘하얀 꽃을 좋아하는 여자’란 이 글의 제목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왜 하필이면 하얀꽃일까요? 빨간색 꽃도, 주홍색 꽃도, 보라색 꽃도 많은데 하필이면 하얀색 꽃일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붉은색만 보면 몸서리를 치기에 그런 것입니다. 내가 수도 없이 흘렸던 피가 붉은 색이었습니다. 그래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색만 보면 지금도 숨이 가쁘고 심장박동이 요동을 칩니다. 정신이 아득해 옵니다. 그래서 나는 붉은색 계통의 의상을 입지못합니다. 붉은색 계통의 립스틱 역시 없습니다.
현재도 나는 유령처럼 항상 어둡고 가라앉은 색의 옷만 입습니다. 그런 색의 옷을 입어야만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내 주위의 사람들은 성화를 해댑니다. 제발 밝고 산뜻한 옷을 좀 입으라고. 붉고 푸른 색의 화사한 옷을 입어야 더 젊어보인다고. 그러나 나는 선뜻 그러지를 못합니다. 7년 7개월을 함께 했던 윤승준의 그림자가 아직도 나의 취향과 인성을 좌우하고 있는 것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그렇게 당장 죽일 듯이 때려놓고는 금방 싹싹 빌고 공주처럼 떠받들고 잘해 준다고 합니다.
너를 사랑하기에 그랬다고. 네가 내 말만 잘들었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눈물까지 흘려가며, 무릎까지 꿇어가며 싹싹 빌면서 ‘내가 미쳤지. 다시는 안 그럴께. 사랑해’하고 달콤한 말로 회유를 한다고 합니다.
상대방 여성들이 처음에는 열이면 열, 모두 그 말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또 속수무책으로 당합니다. 같은 일이 반복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여성들은 차차 길이 들여집니다.폭력에 내성(耐性)이 생기고 마는 것입니다. 무기력해지고 대항할 방법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성들은 자기 위안을 합니다. 내가 떠나가면 저 사람은 폐인이 되고 말거야. 내 한몸 희생하더라도 옆에 있어주어야 해. 나는 한 인간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있어. 나만 참으면 돼. 나만 희생하면 돼……
어리석게도, 정말 어리석게도 나 역시 그런 여자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윤승준이 변화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7년7개월동안 끊임없는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러나 나는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을 바뀌게 할 수 없고 구원할 수 없다고. 그나마 인간을 조금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의사의 상담과 치료뿐이라고. 의처증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입니다. 내가 무조건 참고 희생한다고해서 치유되는 병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태를 더 악화시킬 뿐. 7년 7개월이 지나서 내 몸이 폭력으로 병들대로 병들고 나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의처증 환자의 폭력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무조건 주위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부모,형제, 직장상사,동료, 이웃, 친척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창피하다는 이유로 쉬쉬합니다. 자식때문에, 혹은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헤어지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일만 크게 벌리게 된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내가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과거를 털어놓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요. 10년 가까이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고 살았어도 내 주위의 사람은 아무도 내가 그러고 사는 줄을 몰랐습니다.
나의 부모는 결혼식에 한번 참석하는 걸 마지막으로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내가 어떻게 사나, 한 번 찾아오지도 않았고 나 역시 그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서로 왕래가 있었다해도 나는 내가 남편에게 맞고 산다는 걸 그들에게 얘기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를 무시하고 구박하고 학대한 계모에게 본때를 보이기위해서라도 잘 살아야 한다는 단단한 각오로 시작한 결혼생활이었습니다. 내가 맞고 산다는 걸 그녀에게 알려줘서 고소해하게 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윤승준과 살면서 이런저런 동네 아줌마들을 친구로 사귀어 친하게 지냈지만 그녀들 역시 내가 매맞고 사는 여자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내가 일절 내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투성이로 맞을 때 나는 신음 한 번, 비명 한 번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이를 악물고 견뎌내었습니다. 알려지면 창피하다는 이유, 바로 그 이유 하나 때문에요.
그래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도 못하고 의논도 못하고 하소연도 못한 채 혼자 묵묵히 그 무시무시한 폭력을 견디어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기로 어떻습니까?
매맞고 사는 여성이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지요? 많습니다. 조금만 더 주의깊게 주위를 살펴보세요. 내 친구 중에, 내 친척 중에, 혹은 내 여동생이, 내 언니가 걸핏하면 이유없이 몸에 피멍이 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선반에 물건이 떨어져서, 가구에 부딪쳐서라는 말로 어색하게 그 상처나 멍을 대수롭지않게 지나가려는 여성이 없지는 않습니까? 푹푹 찌는 한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는다던가 흐린 날씨에 얼굴을 덮는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여성은 없습니까?
어떤 통계를 보니 폭력남편의 대부분은 화이트 칼라라고 하였습니다. 사회통념상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을 대학교수나 고급 공무원, 학자들이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몇 번 얘기했듯이 윤승준 역시 조용하고 진중하고 품위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 벼슬을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영의정 벼슬을 한 후손답게 그 어디에 내놔도 대접받고 존경받을 만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폭력의 ‘폭’ 자도 모를 사람같아 보이는.
윤승준이 내게 폭력을 행사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여자가 맞을 짓을 했기에’ 매질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다분히 자신을 기분나쁘게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말대꾸를 했다는 이유로, 대문 여는 것을 조금 지체했다는 이유로, 재떨이를 깨끗하게 비워놓지 않았다는 이유로, 눈을 크게 떴다는 이유로, 밥상이 늦게 차려졌다는 이유로, 아이를 울렸다는 이유만으로, 그러니까 정말 말도 안되는 사소한 이유로 그냥 나를 때렸습니다. 내가 잘했건 잘못했건 무조건 자기 비위가 틀리면 눈에 보이는대로 집어들고 때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폭력은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아침에 세수를 하고 방으로 들어오다가도, 화장실을 가다가도, 같이 외출을 하려 집을 나서려다가도 여름 날 번개가 치는 것 처럼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발작처럼 일어났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은 이유가 시장이나 미장원에 가서 늦게 돌아왔을 때, 그리고 윤승준과 같이 외출 중 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거나 웃었을 때(나는 전혀 그러지 않았지만)였습니다. 그런 날은 집에와서 반죽음이 되도록 맞았습니다.
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은 항상 미래에 희망을 건다고 합니다.
첫 아이가 태어나면 나아지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 새끼를 낳아 준 사람을 패겠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괜찮아지겠지. 지금 저렇게 나를 때리는 것은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럴 거야…
외출했다가 늦게 들어온 날, 두 번째로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을 때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맞았다는 놀라움과 아픔보다는 윤승준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직장에서 펄펄 날아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집에 갖힌 신세가 되니 얼마나 답답하면 저럴까. 취직을 하게 되면 괜찮아 질 거야.....
나의 간절한 바램때문인지 윤승준은 다행히 금방 취직이 되어 다시 출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대로 그의 폭력이 멈추어졌냐구요?그랬다면 내가 여기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리가 없습니다.
직장을 다니게 되었어도 한 번 시작된 그의 폭력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아니 강도가 더 심해졌습니다. 나를 감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새로 다니게 된 직장은 집에서 먼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물론이고 시간나는대로, 틈나는대로 집으로 뛰어 와서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돌아갈 수 있었던 먼젓번 직장과는 달리 두 번째 직장은 버스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대신 윤승준은 30분마다 한 번씩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한 번이라도 전화를 늦게 받거나 못받으면 생난리가 났습니다.
그런 날은 내가 죽는 날이었습니다.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내 따귀를 올려부쳤습니다. 머리채를 감아쥐고 바닥에 패대기를 쳤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와 힘으로 나를 때려댔습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앞에서 얘기했듯이 나는 윤승준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었고 변화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아내로서 해야할 도리와 의무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입속의 혀처럼 굴었습니다.
첫 아이를 그렇게 잃고 난 얼마 후 나는 다시 임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잘생긴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다시 둘째 아들이 생겨났습니다. 남들이 보면 아주 걱정없고 단란하기 짝이 없는 행복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40키로도 안되는 나의 갸늘프고 연약한 몸은 아이를 둘이나 낳아도 계속되는 윤승준의 폭력에 점점 병들고 시들어갔습니다.
그렇쟎아도 어릴 때부터 계모로부터 학대를 받은 기억때문에 기 못펴고 숫기없이 소심한 성격의 나는 더욱 어둡고 침울한 여자가 되어갔습니다.
처음에 윤승준은 주먹과 발로만 나를 때렸습니다. 주먹으로 퍽퍽 소리가 나게 내리치고 구두를 신은 발로 마구 발길질을 해댔습니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기구나 물건을 사용했습니다. 가죽혁대나, 재떨이나, 파리채나, 빨래 방망이나 연탄집게나 손에 닥치는대로 휘둘러댔습니다.
오오, 그리고 나의 머리채. 걸핏하면 휘감아쥐고 나를 꼼짝 못하게 하던 방편으로 쓰던 나의 머리채.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내 머리채에 대한 무서운 기억 한 가지가 있습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해서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시기였다고 기억됩니다. 배가 남산만하게 불러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할 때였습니다.
윤승준이 텔레비젼을 함께 사러가자고 했습니다. 집에 있는 텔레비젼이 너무 오래돼 성능이 시원치 않으니까 좀 더 좋은 것을 사자는 것 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나는 윤승준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전자제품 대리점에 도착해서 이견이 생겼습니다. 원하는 것이 서로 일치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현재 집에 있는 것과 비슷한 크기의 것을 사자고 했고 나는 이왕 살 것, 좀 더 큰 것을 사기를 원했습니다.
“가격 차이도 얼마 없네요. 이번에 사면 두고두고 오래 쓸 것이니까 돈을 조금만 더 보태 큰 것을 사요, 네?”
옆에 있던 점원도 내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윤승준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보았습니다. 윤승준의 얼굴이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을. 아뿔사,내가 잘못했구나.
나는 재빨리 후회했습니다.윤승준이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그의 의견에 따라야했습니다.그런데 내가 반론을 편 것입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윤승준이 내게 차갑게 명령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아무 것도 사지말고 그냥 집으로 가자!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나의 머리채를 휘감아 쥐었습니다. 윤승준이 나를 때릴 때는 항상 허리까지 오는 나의 숱많은 머리채를 휘감아 쥐어 나를 꼼짝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머리를 짧게 자를 생각을 하지 않고 늘 긴 머리를 유지했습니다.
“아아악!”
머리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아픔에 나는 비명을 질렀습니다.나의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윤승준은 눈을 까뒤집고 나를 패기 시작했습니다. 주먹으로 나의 얼굴을 내려치고 팔을 꺾고 구둣발로 나의 몸을 마구 내질렀습니다. 당장 지 눈앞에서 나를 요절을 내버려야 분이 풀리겠다는 듯이. 복날에 개 패듯이. 자기 새끼를 임신한 나를, 내일 모레 해산을 앞둔 나를.
“이 미친년아. 내가 고분고분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 듣니?그 사람들 많은 데서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 날 망신을 줘? 오늘 너는 죽어야 돼. 죽도록 맞아봐야 정신을 차려…”
나는 뱃속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새우처럼 둥글게 말았습니다. 그리고 터진 봇물처럼 나를 강타하는 그의 주먹과 발길질에 내 몸을 맡겼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정신을 잃었나봅니다.
눈을 떠보니 마당 한가운데 내가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내 머리통에서 빠져나간 머리카락 뭉치가 널려져서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내 몸에서 흐른 피가 여기저기 칠갑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얼른 배를 만져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랫도리에 얼른 손을 가져다 대었습니다. 그렇게 무자비한 폭력을 당했는데도 다행히 아이는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나는 나의 둘째 아이의 얼굴을 보면 그때의 일이 어제 일처럼 가끔 떠오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둘째 아이에게 말합니다.
'고마워. 민수야. 끝까지 생명줄을 붙잡고 있어줘서 고마워….어디 한 군데 잘못된 데 없이 무사하게 태어나줘서 고마워….'
무더운 여름의 어느 일요일이었습니다. 윤승준과 나는 점심으로 국수를 먹고 있었습니다. 물을 떠 주고 모자란 열무 김치를 더 갖다 놓는 등 심부름을 하던 나는 윤승준이 국수 그릇을 거의 다 비울 무렵에야 겨우 상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앉는 것과 동시에 윤승준이 상에서 물러나더니 호주머니를 뒤적거렸습니다. 그러더니 내게 명령했습니다.
"담배가 없군. 너 얼른 나가서 담배 한 갑 사와라."
국수 한 젓가락을 마악 입에 넣던 나는 우물쭈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담배를 파는 구멍가게까지는 한참을 걸어 나가야 합니다. 담배를 사갖고 돌아오면 내 대접의 국수는 퉁퉁 다 불어터질 것입니다. 나는 입안 가득 든 국수를 대충 씹어 꿀꺽 삼키고 말했습니다. 잠깐만 있다가요. 얼른 이 국수 마저 먹고요..…
내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꽝, 하고 벼락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상 앞으로 푹 쓰러졌습니다. 그가 옆에 있던 유리 재떨이로 나의 머리를 내리친 것입니다.
나의 머리통은 잘 익은 수박쪼개지듯이 반으로 쪼개졌습니다. 피가, 시뻘건 피가 분수같이 옆으로 솟구치더니 앞으로 콸콸, 쏟아져 내리는 걸 나는 상위에 얼굴을 내려 놓고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아픔은 없었습니다. 그냥 정신없이 멍했을 뿐입니다.
내 얼굴은 금방 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때 옆방에 살던 새댁 남편이 나를 업고 병원으로 뛰지 않았다면 나는 출혈과다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월급제 택시기사였던 새댁 남편은 일요일에도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토요일, 늦은 밤에 먹었던 라면이 잘못되었는지 토사곽란이 일어나서 일요일에 일을 가지 못했답니다.
그는 세든 사람 전부 공용으로 쓰는 변소를 다녀오다가 그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더운 여름이어서 방문을 열어놓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윤승준은 유리재떨이로 내 머리를 가격한 후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방안에서 바보처럼 그냥 앉아만 있더랍니다.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아이고, 세상에! 여기 큰일 났다!사람 하나 죽겠다!”
새댁의 남편은 슬리퍼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나를 들쳐업고 동네 입구에 있는 한 병원으로 바람처럼 달려갔다고 합니다. 윗옷이 내가 흘린 피로 흥건하게 젖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뛰면서 그는 신께 간절하게 빌었다고 합니다. 제발, 제발 병원이 문을 열었기를. 그래서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천우신조였습니다. 일요일에는 항상 굳게 닫혀 있던 병원 문이 열려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모습으로 찾아가기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실 오늘은 병원 문을 여는 날이 아니지요. 그런데 점심약속이 있어 시내에 나갔다가 갑자기 병원에 뭘 두고 간게 생각나서 잠깐 들렀지요. 문을 닫고 나오려고 하는데 창문너머로 셔츠에 피칠갑을 한 남자가 사람을 업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게 보여요. 그래서 직감으로 알았지요.큰 상처를 입은 환자가 오고 있다는 것을. 급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절한 채로 그의 등에 업혀 병원으로 실려갔던 나는 물론 그 어떠한 일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인사차 찾아갔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전해준 말입니다.
남편에게 곤죽이 되도록 맞고 상처를 치료하러 오는 동네 여자들을 많이 본 때문인지 의사 선생님은 별로 놀라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은 다만 측은하고 동정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혀를 끌끌 찰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시장에 갔다 돌아오다가 동네 어귀에 새 양품점이 생긴 것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이 생겨 문을 밀고 들어갔지요. 주인은 내 또래의 젊은 여자였습니다. 자연히 고향에서부터 나이까지 물으며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옷을 몇벌 사들고 양품점 문을 나섰을 때는 윤승준이 허락한 시간보다 시간이 한참 지체되어 있었습니다.
나의 외출에는 항상 윤승준이 동행했습니다. 일을 하는 시간에는 몰라도 일요일, 자기가 집에 있을 때는 시장은 물론 어디에든 같이 붙어 가야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엔 몇시 몇분까지 돌아오라고 시간을 정확하게 정해주었습니다.
아이고, 오늘도 죽었구나!
가슴을 졸이며 집을 향해 종종 걸음을 걸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들어서다가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 앉는 걸 느껴야했습니다. 윤승준이 마당에 저승사자처럼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닙니까.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의 손에는 연탄집게가 들려 있었습니다.윤승준은 나의 손목을 비틀어 쥐고 부엌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 너 당장 바른대로 말해! 어디서 어떤 놈과 바람을 피우다 오는 건지 바른대로 말해!?”
윤승준은 연탄집게로 나의 아랫도리 부분을 마구 쑤시고 헤집어대었습니다.그날 내가 청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쟎았으면 날카로운 연탄집게가 나의 아랫도리를 만신창이로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폭력에 젖어 살았지만 내 한 몸 부서지더라도 끝까지 잘 살아야겠다고 참고 또 참던 내가 정작 미치게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섹스였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는 변태성욕자였습니다. 내가 결정적으로 윤승준과 헤어져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그의 변태적인 취향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죽도록 때리고나서 피투성이인 내 몸 위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내가 아픔에 까무라치든 말든, 눈물과 피로 얼굴이 범벅이 되든 말든 제 욕심을 채우고 마는 것입니다.
내 아랫도리를 플래쉬 불로 요리저리 들치고 헤집어 보는 버릇도 여전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나는 차라리 죽어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치욕감과 굴욕감으로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 점잖은 모습 그 어디에 그런 해괴망칙하고 괴상한 버릇이 있었을까요. 겉모습을 보고 어찌 사람의 본성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만은 윤승준은 겉모습과는 달라도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사람이었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참고 감수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를 낳고 동네 여자들을 사귀고 남편과의 잠자리 얘기까지 서로 나누면서 나는 알게 된 것입니다. 그때서야 나는 알게 된 것입니다. 윤승준이 내게 하는 행동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이들이 점점 자라면서 제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방 두개의 작은 공간에서 매일 얻어맞고 터지고 이상한 섹스를 당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무리 아이들이 어리다한들 눈치채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사랑스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윤승준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열악하고 이상한 환경에서 내 사랑스런 두 아이들을 키워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게는 원수같은 남편이지만 어쨌든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한살이라도 어릴 때 헤어져서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만 남겨주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