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구석 할 일은 많은데 일손은 모자라고, 그래서 신이 자기 할 일을 좀 나누기 위해서 만든 존재가 ‘엄마’라고 합니다. 엄마를 만들고 나서부터는 신이 좀 편해졌다지요. 그렇습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주는 무한대적인 사랑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능가하는 사랑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남녀간의 사랑은 일시적입니다. 내 목숨처럼 사랑하네, 어쩌네 해도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달라지면 그 사랑도 결국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불변입니다. 오히려 상황이 곤란하고 어려울수록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나이 지긋한 어느 남자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십대의 아들과 계곡으로 야영을 갔답니다. 그때가 한여름이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더니 계곡물이 불어나기시작했다는 겁니다. 피할 새도 없이 삽시간에 물이 다리까지, 허리까지 차오르는 위기일발의 상황에 도달했었다고 합니다. 캠핑도구를 다 팽개쳐놓고 정신없이 거센 물결을 헤치고 헤엄쳐서 나오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허리를 꽈악 잡더랍니다. 아들이었습니다. 엉겁결에 아들 손을 뿌리치는데 아들 또한 사력을 다해서 아버지의 허리와 다리에 엉겨붙더랍니다. 아들이고 뭐고 머리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더랍니다. 일단 내가 먼저 살아야겠다는 급박한 한가지 일념밖에는. 죽을 힘을 다해 정신없이 물 밖으로 헤엄쳐 나왔는데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아들도 뒤 따라서 물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내가 고아 출신이라 평소엔 아들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끔찍히 귀하게 여겼어요. 그런데 생사의 갈림길에 딱 서니까 아들은 뒷전이 되더라구. 아들보다 내가 우선 먼저 살아야겠단 생각이 먼저 들더라니까. 만약 아들이 잘못되었더라면 평생을 죄책감속에 살았어야 했는데 왜 내가 그때 허리에 매달리는 아들의 손을 뿌리쳤는지 지금 열번을 생각해 봐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만약 나라면, 다른 엄마들이라면 과연 그 사람처럼 행동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단언하건데 우리 엄마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물에 빠져죽더라도 아들을 우선 살리고봤을 겁니다.

지진이나 화재같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천재지변 속에서도 아이를 지키려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그만큼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고 대단한 것입니다.

내가 윤승준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 아이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는 절대로 우리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울 수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과 관심을 듬뿍받으며 자라도 시원챦을 어린 아이들이 날이면 날마다 아버지로부터 두들겨맞는 엄마의 모습만을 보고 자라서 어떤 심성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까요.그것이 제일 걱정스러웠습니다.

나는 나보다는 아이들을 우선으로 하는 엄마였습니다 아이들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이 내 목숨처럼 소중한 아이들을 달가와하지 않고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만났던 미국남자, 프랭크였습니다.

그는 내가 일하는 다방의 손님으로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한 번 딱 보고는 그만 사랑에 빠져버렸다고했습니다. 세상에 저렇듯 신비하고 오묘한 분위기의 여자가 있었나 싶었답니다. 독신주의였던 그는 나를 만나고나서 이런 여자라면 얼마든지 결혼해도 좋겠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이둘이 있다고 하자 그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 아이들도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앞편에 잠깐 얘기했었지만 나는 그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의 구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일까요. 첨엔 내 아이들까지 사랑해 주겠다던 남자가 나랑 몇 번 데이트를 하고나더니 마음이 변했습니다. 내게 딸린 아이들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나 혼자라면 결혼은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겠는데 두 아이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버겁다는 것입니다.자기는 설사 결혼을 한다하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풍진 세상에 아이들의 의견이나 뜻은 전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덜컥 내어놓는 일이 이기적이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에게 남의 아이란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을까요. 더구나 한명도 아니고 둘씩이나. 나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사랑만으로도 끝내 극복하지 못한 문제가 아이들이었습니다.

“은영씨가 혼자의 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이 없이 홀가분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프랭크는 아예 숨기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표시를 표출했습니다. 정말로 아이들이 싫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가 나를 죽도록사랑한다해도 내 아이들을 꺼려하는 남자라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아이들을 위해서 미국에 가는 게 지상최대의 과제라 하지만 그렇게 우리 아이들을 싫어하는 남자에 얹혀서 미국에 가면 뭐 하나 하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그건 나는 물론, 내 아이들도 바라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나는 프랭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아이들까지도 사랑해 줘요. 내 아이들을 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같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내 아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는 것 같았지만 끝내 마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다른 나라로 발령받아 한국을 떠났습니다. 한국을 떠나던 날 그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은영씨를 위해서 기도하겠어요….잘 살아요….부디 잘 살아요…”

미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동아줄인줄 알았던 프랭크가 떠났습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어딘가에는 나와 내 아이들을 같이 사랑해 줄 남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몸가짐을 조신하고 깨끗하게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다방레지 생활을 하지만 남들의 손가락질 받는 여자는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나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컸을 때, 나의 과거에 대해 얘기를 해 줄 계기가 있을 때 떳떳하고 자랑스런 엄마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쟌’입니다. 다방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소개해 준 남자입니다. 깎아놓은 밤톨마냥 깨끗하고 단정하게 생긴 남자였습니다. 그는 내가 다른 다방레지마냥 마구 헤프게 굴지 않아서 마음에 든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착하고 얌전하고 현숙한 여자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 했습니다.

나는 그 남자 쟌이 마음에 들었냐구요? 별로 안 들었습니다. 그러나 맘에 들고자시고를 따지고 말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아이들이 한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한국땅을 떠나야했습니다. 그렇게 조급해서 지푸라기라도 잡을 판국에서 쟌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역시 처음엔 내가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합니다. 친구가 말했습니다. 혹시라도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무조건 싫다고 할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남자가 나를 아주 맘에 들어하는 것 같으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숨겼다고 했습니다.

그 말도 사실 일리는 있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내게 딸린 조건만으로 마다할 수도 있으니까요. 남자가 내게 흠뻑 빠졌을 때, 그러니까 마음을 바꾸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을 때 말하면 자기가 어쩌겠어요?

그러나 나는 그러기가 싫었습니다. 내 아이들이 장애자가 아닙니다. 똘똘하고 착하고 맑은 아이들입니다. 내게 아이들이 있다는 게 큰 흠도 아니고 큰 흉도 아니고 시비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습니다. 아이들이 자랑거리였으면 자랑거리였었지, 내 보물이었으면 보물이었었지, 숨겨야 할 존재들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번째 쟌을 만났을 때 나는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나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무리 담담하려고 했지만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만 아이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떠나가버린 프랭크가 자꾸 떠 올랐습니다.

“내게 사내 아이가 둘 있습니다. 만약 내 아이들이 꺼려진다면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셔도 좋습니다. 그냥 떠나가세요…..”

그는 내 말에 흠칫,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은 남자였습니다. 내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프랭크처럼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괜찮아요…은영씨의 아이들이라면 함께 사랑해 줄 준비가 되어있어요……”

쟌은 나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얼른 나랑 결혼을 해서 같이 미국으로 가서 새살림을 시작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기다리던 바였습니다.

비자를 받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 결혼식은 나중에 하더라도 결혼신고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부랴부랴 서류를 꾸며 미군 부대에 위치한 사무실로 수속을 밟으러 갔더니 안된다고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때가 윤승준과 이혼한 지 4개월 무렵이었었는데 이혼한 후 6개월이 지나지 않으면 결혼허가를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잔뜩 실망하면서 울것 같은 마음으로 부대 밖를 걸어나왔습니다. 쟌은 다시 일을 하러 들어가고 혼자 터덜터덜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미군부대 근처의 보건소를 지나치는데 여자들이 떼거지로 몰려 있었습니다. 미군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자들이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건강검진을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입니다.

힘 없이 그녀들 앞을 지나치는데 누군가가 나의 팔을 잡았습니다. 제복을 차려입은 미군이었습니다.

“건강검진에 합격했다는 합격증을 보여 주시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몸 파는 여자가 아니라고 변명했더니 그럼 왜 그 보건소 주위를 얼쩡거렸냐고 눈을 부라렸습니다. 결혼허가를 받기위해 준비한 서류를 눈 앞에 보여주고야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나는 느꼈습니다. 아무리 내가 몸가짐을 깨끗하게 한들 그 동네에 머물러 있는 한 남들 눈에는 다 그렇고 그런 여자로 보인다는 사실을. 얼른 그 곳을 벗어나는 길은 쟌을 붙잡는 길밖에 없다고.

하루 빨리 6개월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는 그날 쟌을 만나기 위해 한 다방에 앉아있었습니다. 지금도 다방 이름을 기억합니다. 내가 단골로 다니던 의정부 역전 앞에 있는 ‘늘봄 다방’이었습니다. 겨우내 숨을 죽이고 있던 새싹들이 푸릇푸릇 움을 튀우기 시작하던 초봄이었습니다.하늘색의 자잘한 꽃이 수놓아진 커튼이 쳐진 다방 유리창 밖으로 눈을 주고 쟌을 기다리면서 나는 앉아 있었습니다.

그저 막연하고 불안한 마음 감출 길이 없었습니다.

6개월까지는 한 달 정도가 남아있었습니다.앞으로 한달이면 나는 쟌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한국땅을 떠날 것입니다. 쟌과의 결혼은 내가 간절히 바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안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은 남자랑 결혼이라는 것을 한 나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그저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국땅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 아이들은 미국땅에서 잘 적응해 나갈지, 그리고 쟌은 변함없이 지금처럼 나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껴줄지, 만약 쟌이 미국땅에서 변심이라도 한다면 나와 아이들은 낯선 이방인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모든 게 염려스럽고 걱정스러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는데 쟌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 활짝 웃었습니다. 하얀 이가 눈부셨습니다.

쟌이 내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 2,3분쯤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며 키가 큰 한 남자가 들어섰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몸과 심장이 일시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바로 전 남편 윤승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주위를 쓱 훑어보더니 곧 나를 발견한 듯 했습니다. 한치의 망설임없이 내가 앉은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새파랗게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의 양쪽 팔목을 나꿔채더니 뒤로 확 꺾었습니다. 아아악, 하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미칠 듯이 비명을 질렀지요.

“네가 이럴려고 나를 떠나갔구나! 이런 미국놈을 만나 히히덕거리려고 이혼을 못해 그 안달을 했구나! 내 오늘 너를 아예 병신을 만들어 버리겠어!”

쟌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지더니 벌떡 일어나 윤승준을 제지했습니다. 그러나 독이 오를때로 올라 씩씩거리는 윤승준을 이기지는 못했습니다.

“저리 비켜! 이 양키 새끼야!”

유능준의 발길질에 쟌의 몸이 저만치 나가떨어졌습니다. 윤승준은 이를 바드득 갈았습니다.

“오늘 너희 둘을 간통죄로 집어놓고 말겠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분명 이혼을 한 사이인데 간통죄라뇨!

“이 여잔 내 여자야. 나랑 싸우고는 잠깐 집을 나간 것 뿐이야. 아직도 이 여잔 내 여자야! 내 마누라라구!”

다방안에 있던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들고 주방장이 뛰어나왔습니다. 주방장은 예전에 한가닥 했던 듯 몸집이 거대하고 우람한 남자였습니다. 그가 윤승준의 양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결박을 지었습니다. 그 바람에 내 양쪽 팔목을 뒤로 비틀어 쥐고 있던 윤승준의 손에 힘이 빠졌습니다. 주방장이 내게 소리쳤습니다.

“얼른 도망 가요, 얼른!”

나는 쟌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밖으로 뛰었습니다.얼른 택시를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택시는 단 한 대도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급한대로 눈에 뜨이는 어느 제과점으로 쫓아들어갔습니다.서너개의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들과 주인이 놀라서 우리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윤승준의 눈에 뻘겋게 선 살의를 보았습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제과점 카운터에는 과도가 두어개 놓여져 있었습니다. 나는 다급하게 주인에게 소리쳤습니다.

주인은 나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서 영문도 모른채 얼른 칼을 감추었습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때가 오후 1시 쯤이라 클럽 안은 비어있었습니다. 몇 시간 후에 있을 영업을 위해 주인만 나와서 청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들이닥친 쟌과 나를 보고 클럽 주인이 어리둥절해 있는 차에 곧이어 윤승준도 들이닥쳤습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제과점에서 포획한 나무 밀대가 들려 있었습니다. 어떻게 찾아냈는지 칼도 들려있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도망을 가지 못하게 출입문을 걸어잠구었습니다. 그리고 칼과 나무 밀대를 든채 쟌과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아. 이제 죽었구나. 나는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도망 갈 데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독안에 든 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윤승준이 밀대와 칼을 바닥에 떨어트리더니 그냥 땅에다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은영아.은영아. 은영아…………..”

그는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제발 내게로 도로 돌아 와 줘…제발..제에발….”

그때 웨에엥, 하고 사이렌 소리가 바깥에서 나더니 경찰관이 두 명 클럽안으로 급하게 들어왔습니다. 클럽 주인이 경찰을 불렀던 것입니다.

“무슨 일이요?”

경찰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는 윤승준을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게 물었습니다.

“아가씨를 죽이려고 위협한다는 남자가 바로 저 남자요?보아하니 사람을 죽일 것 같지는 않은데?”

경찰관은 일단 쟌을 바깥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게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을 얘기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하나도 빼지않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경찰관들에게 다 얘기했습니다.

“진짜로 이혼했어요? 진짜로 이혼을 했는데도 저 남자가 저런단 말이요?”

두 경찰관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연신 나와 윤승준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그럴 것이 누가 봐도 학자풍으로 고고하게 잘생긴 남자가 무릎을 꿇고 눈물 칠갑을 하면서 울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에 비해 몸집도 작고 별볼일 없어 보이는 여자는 맨숭맨숭한 얼굴로 빳빳하게 서 있지 않습니까. 그 누가 보아도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던 그림인 것입니다.

“일단 경찰서로 갑시다.”

바깥으로 나오니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있었습니다. 얼핏 쟌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뭐라고 말 할 정신적인 여유와 기회가 없었습니다. 나는 윤승준과 나란히 경찰차에 올라탔습니다.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남자, 꿈에서라도 다시 보고싶지 않은 남자인 윤승준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조사를 받기위해 다시 나란히 차를 탄 것입니다.

“이것 좀 봐. 은영아”

윤승준과 눈길이 마주 닿는 것이 싫어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나를 윤승준이 불렀습니다. 마지못해 보니 윤승준의 내게 사 진 한장을 보여주었습니다. 내 사진이었습니다. 다방일을 처음 시작할 때 활짝 핀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찍은 나의 독사진. 언제부터인지 내 앨범에서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그 사진이 어느새 윤승준의 손에 가 있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너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어……”

윤승준이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떠난 후 매일 이 사진을 들여다 보면서 울어. 네가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너를 사랑해….. 아직도 너를 많이 사랑해….”

나는 비호같이 그 사진을 낚아챘습니다. 그리고 갈기갈기 그 사진을 찢어발겼습니다.

“당신과 나와의 인연을 벌써 끝났어요. 이런다고 내 마음이 돌아설 줄 알아요?”

“으..은..은영아…..”

“당신이 내게 한 짓이 있쟎아. 이것 안 보여?”

나는 머리를 숙여 내 정수리 한복판에 난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재떨이로 내려친 상처. 잘 익은 수박벌어지듯이 쩍 벌어졌다가 힘들게 아문 상처. 피를 됫박으로 쏟던 그 무시무시한 기억……

“이래놓고도 나를 사랑한다는 말이 나와?”

경찰서에 도착한 우리는 몇시간 동안 조사를 받았습니다. 경찰은 구청에 의뢰해 윤승준과 나의 이혼서류를 팩스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혼한, 완전 남남이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우리는 풀려났습니다.

경찰서 앞에서 나는 윤승준에게 일갈했습니다.

“이것으로 당신과 나의 악연이 끝나길 바래.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줘. 당신이란 사람, 정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예의 그 클럽으로 갔습니다. 어쩌면 쟌이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였습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걱정과 긴장이 가득한 모습으로 클럽에 앉아 있었습니다. 쟌이 내 얼굴을 보자 장마철에 모습을 보인 햇볕처럼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도깨비처럼 두껍게 화장을 한 여자가 쟌 옆에 앉아 아양을 떨고 있다가 나를 보자 입을 비쭉거리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쟌이 나를 품에 얼싸안았습니다.

“오, 은영씨! 무사히 돌아와주었군요!”

“예. 걱정많이 하셨지요?고마와요 기다리고 있어줘서…”

“은영씨. 배고프지요? 일단 여기를 나갑시다.”

택시를 타고 가면서 쟌은 내 팔을 조심스레 살펴보았습니다. 윤승준에 의해 한참동안 뒤로 꺾였던 내 팔은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그는 나의 팔을 연신 쓰다듬고 어루만져주었습니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식당에서 쟌과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주문한 음식이 날라져 왔으나 쟌과 나는 손도 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할 이야기도, 들을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음식 먹는 게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진실을 알고 싶어요…”

쟌이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습니다.

“얘기해 줘요. 오늘 그 남자, 전 남편인 것 같은 데 왜 그렇게 했어요?내가 알기로는 이혼이 다 끝난 걸로 아는데 한국에는 전남편이 그렇게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거예요?”

쟌이 말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항상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사연이 많은 여자로구나, 하고 생각했었다는 것입니다. 저 갸날픈 여자의 어깨 위에 지워졌던 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으나 내가 먼저 말할 때까지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없이 고생고생하다가 만난 남편이라는 사람이 의처증 환자였다는 것. 8년 가까이의 결혼생활중 첫 1년 만 빼놓고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맞고 살았다는 것. 그래서 천신만고 끝에 이혼을 했으나 아직도 윤승준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늘 불안하다는 것.

“그랬군요….”

쟌은 내 얘기를 듣더니 혀를 끌끌 찼습니다.

“걱정말아요. 6개월이 되자마자 결혼신고부터 해줄 테니까. 법적으로 내 부인이 되고나면 그 남자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요……”

참으로 고마운 남자였습니다. 나는 쟌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내 뒤를 지겹게 따라다니는 불행과 고난이 쟌을 만남으로 인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빌면서.

저녁을 먹고 어쩌고하다 보니 밤 9시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주인집 아줌마에게 가 있었습니다. 내가 일 가고 없을 때 우리 아이들 끼니를 챙겨주고 보살펴 준다는 조건으로 주인집 아줌마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도, 주인 아줌마도 서로 좋아해서 나는 안심하고 아이들을 맡겨놓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이 일요일이라 부대로 다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해서 쟌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왔습니다.

대충 씻고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웠습니다만 잠이 올리 없습니다. 쟌이 섹스를 시도를 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쟌과는 몇개월 정도 데이트를 했습니다. 일 주일에 두세번 정도 자주 만났으나 그때까지 우리는 손밖에 잡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미국인들은 만나면 바로 섹스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쟌 역시 나의 의사를 존중해 우리는 섹스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쟌의 손이 내 가슴 위로 올라왔습니다. 쟌의 손이 닿자마자 내 몸이 빳빳하게 경직되었습니다.

만약 내가 그를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상하고 인자하고 좋은 남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서 우리 두 아이에게 더할 나위없는 좋은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쉽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입술을 갖다대고 내 몸을 어루만져도 내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까 쟌은 동작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쉬며 돌아누웠습니다.

새벽이 되었습니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던 쟌이 잠을 깨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다시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의 숨결과 손이 불덩이같이 뜨거웠습니다.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뻣뻣했습니다. 몇시간 전에 열리지 않았던 몸이 새벽이라고 다시 열릴 리 없습니다. 그는 몇번 내 몸을 달아 오르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키쓰를 하기도 하고 내 가슴을 빨아보기도 하고 내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습니다.

“은영씨. 당신은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군요…....”

그는 벗어놓았던 옷을 주섬주섬 줏어입었습니다.그리고 벌컥 문을 열고 나가버렸습니다.

쟌과의 인연도 끝났구나! 미국으로 갈 기회를 또 놓쳤구나!

나는 쟌이 떠나가버린 빈 방안에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허탈하고 아쉽고 안타까왔습니다. 억지로라도 몸을 열어 줄 걸……

그러나 후회는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내가 아이들을 위한다고는 하나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몸을 허락하기가 너무나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요.

그날 나는 다방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프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전날, 윤승준에게 놀란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아선지, 쟌이 떠나가버렸다는 허탈감때문인지 꼼짝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있었습니다. 좀 쉬고 싶었습니다.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만 있었습니다.

벌써 두 미국남자가 내게 왔다가 떠나갔습니다. 나랑 미국남자와는 인연이 맞지 않은 것은 아닌가. 내가 괜한 헛수고를 하는 것은 아닌가. 착실하게 돈을 벌어 작은 양품점이라도 하나 차려 한국에서 그냥저냥 살아야 되는 것 아닌가. 머리가 혼란스럽고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1시쯤 무렵입니다. 골목쪽으로 난 우리방 창문을 누가 톡톡 두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힘 없이 들창문을 열었습니다.

“ ! ”

놀랍게도 쟌이 웃으며 서 있었습니다. 나랑 인연이 완전히 끝난 줄 알았던 쟌이 말입니다!

“쟈안!?”

그의 손에는 내게 줄 선물이 들려있었습니다. 샤넬 5번 향수와 쵸콜릿 상자였습니다. 완전히 내게 떠나버린줄 알았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것만도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인데 선물까지! 더구나 당시 모든 여성들의 로망이던 샤넬 향수 5번을! 그때부터 몇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샤넬 향수만 씁니다.

나는 쟌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의 진심이 내게 전해졌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이 크게 전해져왔습니다. 이 정도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내 평생을 맡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 그까짓 게 무어랍니까? 내가 그를 사랑하고 안 하고는 이제 별 문제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준다는 사실만이 중요했습니다. 나는 그를 위해 마음의 문을, 육체의 문을 열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당시 복무 기간이 다 되어 한국을 떠날 예정에 있었습니다만 나를 위해, 나와 결혼을 하기 위해 한국 체류기간을 1년 연장했다고 합니다. 그 지루하던 6개월이 마침내 지나갔습니다. 쟌은 지체없이 결혼수속을 밟아주었습니다. 우리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습니다.

쟌이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 아내입니다. 더 이상 다방에서 일 하지 마세요”

쟌은 내 아이들을 위해 방 두개짜리 전세를 얻었습니다. 깨끗하고 아담했지만 별로 크지는 않은 집이었습니다. 그동안 좁아터진 방에서 마음대로 뛰놀지 못하던 아이들이 환호성을 올리며 좋아했습니다.

쟌은 내게는 물론 내 아이들에게도 참 좋은 아버지 역할을 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목말을 태우고 장난을 치면서 아이들과 참 잘어울렸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여러 악연을 거쳐서 드디어 이제 좋은 인연의 사람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제발 쟌과의 좋은 인연이 끝까지 가게 되길 기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