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쟌과 결혼을 했습니다. 물론 서류상으로만의 결혼이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부부로 등록이 되었지만 따로 결혼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쟌이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왔지요. 그는 결혼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총각이었습니다. 당연히 가족이나 친구와 친지, 그리고 직장 동료들의 축복 속에 근사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고 싶었을 겁니다. 멋진 턱시도를 입고 만인들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마다했습니다. 나는 이미 한 번 결혼식을 올렸던 여자입니다. 두 번씩이나 면사포를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혼식하는 걸 내가 망설이니까 쟌은 좀 섭섭해 하는 눈치였지만 강요는 하지 않았습니다.

“뭐든지 은영씨 편한대로 하세요. 결혼식하는 게 별로 내키지 않으면 안 해도 좋아요….”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입니다. 여자는 물론이지만 남자 역시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나 기대같은 게 있을 겁니다. 내가 만약 결혼식을 한다면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야지, 하는 나름대로의 청사진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쟌은 나 때문에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결혼식을 올려보지 못한 것입니다.

어디 한 군데 빠질 데 없이 훌륭한 조건을 가진 남자가 나 같은 여자를 만나 결혼식장에도 한 번 서보지 못하다니.

내키지 않더라도 그냥 눈 질끈 감고 그때 쟌의 의사를 따라 줄 걸, 하는 후회가 지금도 생깁니다. 쟌이 나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났더라면 정식으로 결혼식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사실은 당시에 쟌에게 오랫동안 사귄 여자가 있었습니다. 양품점을 하는 한국여자였습니다.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쟌이 나를 만나는 바람에, 그리고 내가 결혼을 서둘러야 할 입장에 있는 바람에 그 여자와는 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별 문제없이 잘 사귀어 오던 커플이 나로 인해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여자의 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매우 깊고 지고지순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쟌이 이별을 고한 뒤에도, 그리고 나랑 결혼을 한 뒤에도 쟌이 근무하는 부대앞에서 거의 1년을 매일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쟌의 얼굴을 한 번 보기 위해, 그리고 쟌의 목소리를 한 번 듣기 위해 그렇게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쟌은 그녀를 보고도 그냥 냉정하게 지나쳤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모습을 분명히 보았으면서도 못본 척 지나쳤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흐느껴 울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수위 아저씨의 입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그 얘기가 내 귀에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얘기를 전해듣고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리고 미안하고 죄스러웠습니다. 윤승준의 약혼녀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녀도 나 때문에 윤승준으로부터 버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나 때문에 또 한 여자가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뭐길래. 나란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장래까지 약속한 여자들을 그렇게들 저버리는지....

쟌과 결혼을 하고나서 내 생활은 다시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는 미군부대에서 꽤 직급이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받아 오는 급료는 우리 네 식구가 먹고 살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쟌은 나를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페니 하나 빼지 않고 월급을 통째로 갖다주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살림하나는 알뜰살뜰 잘 산단 소리를 늘상 듣던 사람입니다. 종이 한장, 콩나물 한 오라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검약하게 살림을 잘 꾸려나갔습니다.

쟌도 내 살림 솜씨에 매우 만족하는 눈치였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말했지만 쟌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고 염원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 만나서 아침에 배웅받으며 출근하고 저녁엔 온 가족이 노란 불빛 아래의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게 꿈인 사람. 그렇게 알콩달콩 살아가는 게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와의 결혼생활을 매우 만족해 했습니다. 나는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미군 부대 근처에는 미군과 사는 여자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나처럼 정식으로 결혼을 한 여자들도 있었고 일시적으로 살림을 차려서 사는 여자들도 많았습니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여자들도 몇몇 있었지요. 그래서 나는 그녀들이 미군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여서 하루종일 화투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다룬 영화에서 나오지요? 손님들이 없는 날, 여자들이 반나의 차림으로 온갖 쌍소리들을 해가면서 담배들을 피워가면서 낄낄대가면서 화투를 치는 모습을.

내가 아는 여자들이 딱 그랬습니다. 남편들이 출근하고 나면 모두 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만해도 달러 가격이 매우 높을 때였습니다. 몇십불에 집안일을 해줄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집안일은 남한테 시켜놓고(나중에 그녀들은 말합니다. 한국에서 ‘식모’두고 살았다고) 그녀들은 모여서 음식들을 해먹으며 돈내기 화투들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시비가 붙으면 머리채를 거머쥐고 뒹굴며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쟌의 기대에 부응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집안을 반들반들 윤이나게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쟌의 식성에 맞는 음식을 매일 대령했습니다. 미국음식에 대해서 일절할 줄 아는 게 없었지만 주위에 묻고 또 물어서 매일 식탁을 다르게, 그리고 풍성하게 꾸몄습니다.

쟌을 위해서라면 모든 정성을 다했습니다. 모든 것을 쟌 위주로 했습니다. 밤 열두시라도 쟌이 뭐가 먹고 싶다고 하면 벌떡 일어나서 그 음식을 해다바쳤습니다. 나는 마땅히 그래야 했습니다.

쟌은 총각의 몸으로 애가 둘이나 딸린 이혼녀랑 결혼을 해주었습니다. 흔히들 말하지요. 서양인들은, 미국인들은 우리 한국인들이랑은 사고방식이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고요.

그러나 미국인들과 이리저리 관계를 맺으며 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감정은, 느끼는 감정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수치스러워하고 고마워하고 부끄러워하고 애통해하고 창피해 하는 감정. 그런 감정은 미국인이라고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번도 하지 않은 그가, 가난한 아시아 한쪽 구석의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여자와 결혼을 결심하는 게 어디 쉬웠었겠습니까.

쟌은 내 아들 둘을 ‘선물’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표현을 하긴했었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자식을 둘이나 걷어들인다는 게, 그리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여자와 앞으로 평생을 살 각오를 한다는 게 쉬웠겠습니까. 나름대로 고민도 많았고 생각도 많았을 것입니다. 나랑 결혼해서 얻는 게 무엇일지, 잃을 게 무엇일지 득과 실을 따져 저울질도 해보았겠지요.

또한 쟌의 집안에서 순순히 승락을 했을리 만무합니다. 어쩌면 극구만류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든 어려운 절차와 손해를 무시하고 나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나랑 결혼을 해주었습니다. 내 머리칼을 잘라서 그의 신을 만들어 준다해도 그 고마움은 갚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했습니다. 다른 여자들이 하는 짓을 똑같이 답습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쟌을 실망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입속의 혀 노릇을 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했고 원치 않는 것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쟌은 매우 성실하고 착하고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술이나 담배는 일절 하지 않았습니다. 포커나 게임, 당구같은 잡기는 손도 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미군들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요, 유흥이던 한국 술집이나 클럽같은 데도 전혀 발을 디디지 않는 바른생활 사나이였습니다.

그가 퇴근하고 집에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내가 정성껏 차려준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책을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학구파였습니다. 손에서 책이나 신문을 놓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늘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는 환갑의 나이가 넘은 지금도 학교를 다닙니다. 취득한 학위만도 몇개나 되고 자격증만도 이루 헤어릴 수 없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평생을 쉬지 않고 학교에 다녔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아는 것 보다 더 많다고. 새롭게 배울 게 산처럼 쌓여있다고.

참 이상하지요. 학교라고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겨우인 나인데도 만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대학졸업자들, 지식인들입니다.

그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 나도 신문 한 쪽이라도 더 읽으려고 애썼습니다. 학교야 못가더라도 신문이나 책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현재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가 초등학교 중퇴 학력을 가진 사람인 줄 전혀 모릅니다. 책과 신문을 열심히 읽은 덕분에 어딜 나가도 무식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게 된 것입니다.

쟌과 결혼을 하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영어를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다방에서 일하면서 미국 남자들을 많이 대해왔기에 어느 정도의 대화는 손짓,발짓으로 통했습니다. 정 답답하고 모르면 영한 사전에서 찾아낸 영어 단어 하나로도 뜻은 대충 통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의 집으로만, 남의 집으로만 굴러다닌 덕분에 눈치가 남달리 빨랐기에 상대방의 눈빛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내게 원하는 게 뭔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내 의사를 전달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던 것입니다. 나는 확실하게 영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미국에 가서 살려면 무엇보다 정식 영어를 습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내 주위에 이렇게 저렇게 알게 된 많은 여성들이 있었지만 거의 다 나처럼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정식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전무했습니다. 미군 부대 근처의 유흥업소로만 떠돌아다니면서 어깨 너머로 대충 배운 영어, 그러니까 모두 문법이 맞지 않고 불정확한 ‘부론큰 잉글리쉬’였습니다. 나는 문법이 맞는,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수소문끝에 대학을 나와 미군과 결혼해 살고 있는 한 여자를 알아냈습니다. 나는 그 여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요청했습니다.

“제발 제게 영어를 좀 가르쳐 주세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찾아와 영어를 가르쳐 달라니까 그 여자는 매우 당황하고 의아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내 얼굴에서 간곡함과 진실을 읽었는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영어를 가르쳐주는 대신 우리집 빨래와 청소를 해주겠어요?”

일주일에 두번, 집안 일을 해주기로 하고 나는 그 여자에게 영어를 배우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틈만 나면 텔레비젼의 어린이들 프로그램을 시청했습니다. 당시 내가 즐겨 보던 어린이 프로그램이 ‘세사미 스트리트’ 등 만화영화입니다. 만화영화는 내 영어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영어를 완전히 익히기도 전에 미국으로 들어가야했습니다.쟌이 미국 버지니아 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결혼한 후 1년이 막 지난 79년이었습니다.

처음 미국땅에 발을 디딘 순간 내가 느낀 환희와 감격과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완전 신천지, 별천지였습니다. 크고 넓고 광활한 미국땅. 앞으로 내가 내 아들들과 살아야 할 미국땅. 그 미국땅은 인자한 모습으로 내게 인사했습니다.

“은영아, 왔니? 마침내 네가 여기 왔구나. 환영한다. 은영아!”

나는 무릎을 꿇고 땅에 입이라도 맞추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오오, 여기가 미국이구나! 내가 그토록 오고 싶어 했고 그리워 했고 꿈꾸어 왔던 미국이란 나라로구나!”

미국에 와서 2년여를 살던 중 나는 첫딸을 임신 했습니다. 사실은 두번째 임신이었습니다. 쟌과 결혼 몇달 후 나는 첫번째 임신을 했더랬습니다. 쟌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분신을 가지게 되었다며 눈물까지 글썽거렸습니다.

“고마와요, 은영씨. 내 아이를 가져주어서 고마와. 정말 너무 고마와….”

그러나 그 아이를 몇 달 안 가서 잃게 되고 맙니다. 윤승준과 살면서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지고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몸이 열달 동안 아이를 키워내기에는 무리였나봅니다. 아이를 잃고 통곡하며 우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쟌이 말했습니다.

“사실 약간 불안했었어..너무나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아서. 당신같이 좋은 와이프에 두 아들에 내 피를 이어받은 자식까지. 세상일이란 게 그렇게 물 흐르듯 순탄하게 잘 흐르면 뭔가 이상하지. 행복이란 놈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 곁에 머무르지 않으니까……”

사실 나도 조금 불안했던 게 사실입니다. 어릴 때부터 하도 불행과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는지라 뭔가 조금 잘 나가고 잘 진행되고 조용하다 싶으면 폭풍전야의 고요가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거였습니다.

쟌과 결혼해서 한동안 정말 이렇게 따뜻하고 행복해도 되는 건가 싶었습니다. 만사가 순조롭고 편안하고 안정된 나날이었던 것입니다. 아니가 다를까. 쟌과의 첫 아이가 유산되고 만 것입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아이는 다시 가지면 되니까…….”

쟌의 말이 맞았습니다. 첫 아이를 잃은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임신이 된 것입니다.

나는 겉보기엔 아이를 가지기 매우 힘들어 보이는 체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20인치도 안 되는 허리, 100파운드도 안 나가는 몸무게. 갸녀리고 약하디 약합니다. 내 몸 그 어디에도 아이가 들어설 만한 데가 없어보입니다.

그러나 나는 임신이 무척 잘 되는 체질이었습니다. 남자랑 눈만 마주쳐도 임신이 되는 체질이 있다더니 내가 바로그랬습니다. 동침만 했다하면 아이가 들어서는 것입니다. 임신이 잘 되는 대신 유산도 잘 되었습니다. 아이가 들어서긴 잘 들어서는데 끝까지 붙잡고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연유산한 아이만도, 그리고 인공 유산한 아이만도 거의 열명이 넘습니다. 참 희한한 것이 내 몸에서 그렇게 많은 아이가 빠져나갔는데도 내가 아직도 별 아픈 데 없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낙태를 하든, 유산을 하든 아이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정식으로 출산하는 것과 거의 맞먹는 것과 같이 산모의 몸에 영향을 주는 거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잃었어도 내 몸에 전혀 무리를 주지 않았는지 지금도 나는 그저 씽씽하기만 합니다.

어쨌든 나는 다시 임신을 했습니다

이번엔 끝까지 아이를 지켜야지…..

나는 살얼음판을 딛듯. 계란 위를 걷듯 만사를 조심조심했습니다. 이번에 또 아이를 잃으면 쟌한테 면목이 설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를 낳아야 쟌과의 관계가 더욱 굳건해질 것 같았습니다.

서류상으로는 결혼이란 것을 했지만 나와 쟌과의 관계는 사실 좀 위태로왔습니다.쟌이 맘 변하면 언제 어느 때고 허물어질 모래성같은 관계였습니다. 이 세상에 둘도 없이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처럼 나를 사랑한다고해도 사람의 마음이란 변할 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라는 튼튼한 끈으로 쟌과 나 사이를 묶어놓아야 했습니다.

미국에 와서 2년을 살던 중 임신을 했고 임신 8개월 째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나가야했습니다. 물론 쟌의 직장때문이었습니다. 쟌이 한국으로 다시 발령을 받는 데는 나의 바람이 컸습니다. 그렇게 오고 싶어했던 미국이었지만 사는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는 이 하나 없고 지리로 몰라 집안에만 꼼짝없이 갇혀있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배워놓았던 영어도 제대로 써먹을 기회가 없으니 다 잊어버렸습니다.

미국에서 좀 더 살다가는 우울증에 걸릴 것만 같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들어오더라도 당분간은 한국에서 좀 살아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쟌에게 한국으로 다시 나갈 것을 종용했던 것입니다.

한국에 가서 딸을 낳았습니다. 한번 유산의 경험을 한 이후 낳은 딸 아닙니까. 쟌은 자신의 딸을 낳아준 나를 공주처럼 애지중지했습니다. 거의 한달을 침대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게 하고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었습니다. 내 인생에 있어 그렇게 편안하고 호사롭게 지내본 적은 또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생활은 더욱 바빠졌습니다. 아이가 이제 세명이나 된 것입니다. 갓난쟁이 딸은 한시도 내손을 필요로 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나는 딸아이를 낳고 몇년동안은 집안에서 그야말로 평범한 주부로만 살았습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딸아이가 서너살이 될 무렵.

나는 이웃 여자들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제물건 장사를 해서 돈을 갈쿠리로 끌듯 번다는 얘기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여자는 번쩍번쩍 빛나는 갖은 보석에, 비싼 밍크에 우선 척보기에도 화려하고 돈이 많아 보였습니다. 외모는 못생긴 편이었으나 그렇게 온갖 값나가는 걸로 꾸미고 다녔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더랬습니다. 남편들의 직급이 아무리 높으다하나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편의 월급만 받아서는 저렇게 사치를 할 수 없을 건데.

무척 궁금해 하던 차에 미제물건 장사로 돈을 번다는 얘기를 들은 것입니다. 눈이 번쩍 뜨이면서 구미가 바싹 당겨졌습니다.

그녀에게 미제물건 장사에 손을 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을 키우고 쟌의 입맛에 맞게 집안일을 하느라, 그리고 처음으로 살게 된 미국생활에 적응하느라 다른 생각이나 일을 해 볼 생각을 내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지리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영어가 서투니 무엇을 해본다는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내가 활개를 칠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일단 말이 통하니까요.

그래서 이웃여자의 도움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 미제물건 장사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만들어내는 공산품과 식품은 품질이 조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 산다하는 집은, 그리고 유학이나 주재원으로 미국에 발을 한 번 디뎌 본 사람들은 미제물건만을 선호했습니다. 국산품에 비해 값도 매우 비싸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들은 미제식품을 먹고 미제물건을 쓰는 것이 상승된 신분을 과시하는 방법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그들의 허영심을 이용한 미제물건 장사가 호황을 이루고 있었던 거지요.

미제물건 장사는 거의 국제결혼 출신 여자들이 했습니다. 흔히 PX((post exchange)라 부르는 美군사 주둔지의 군인과가족들을 위한 영내 매점과 카미소리(commissary) 라 불리는식품점에서 대량의 물건을 사다가 몇 배의 이문을 남기고보따리 장사들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비누, 치약, 샴푸등과 치즈, 양주, 쥬스등 자질구레한 식료품이 주를 이루었지만 나중에는 면도기, 화장품, 비타민 등으로 옮겨갔습니다.

나는 눈치가 백단인지라 한국인들이 어떤 물건을 선호하는지 금방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선호하는 알짜 물건들만 빼다가 팔았지요.

워낙 단가가 높으니까, 그리고 양이 많으니까 계산원들에게 충분한 수고료를 떼주고도 돈이 많이 남았습니다.

몇년을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아 나중에는 점차 대담해졌습니다. 텔레비젼 냉장고 등 덩치 큰 가전 제품에까지 손을 대게 되었습니다.

쟌이 출근하고 아이 둘을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할 일이 없습니다. 온통 내게 남는 시간을 미제 물건 장사에 투자했던 것입니다.

한국으로 나가 산 기간이 8년 남짓했는데 실제로 나는 차까지 한 대 샀습니다. 미제 물건 장사로 벌어들인 돈으로 자가용까지 샀던 것입니다. 물건을 실어나를 차가 필요해서였겠지만 얼마나 돈을 잘 벌었으면 차를 다 삽니까.

지금 생각하면 불법을 자행한 일이지만 그런 일을 할 때만 해도 그런 짓이 나쁜 일인 줄 나는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쟌은 내가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지요. 쟌이 출근해 일 하는 동안 PX와 카미소리로 차를 몰고 다니면서 서너탕을 뛰고 쟌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얌전히 집에 돌아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법을 어긴 미제 물건 장사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쟌은 그냥 가만 있을 사람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법을 지키고 규칙을 지키는데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대생활을 한 사람답게 모든 일을 군대식으로 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로 재로 잰듯 정확하고 반듯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집안의 모든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식사는 항상 정해진 시간에 1분도 늦는 법 없이 차려져야 했습니다. 그가 부르면 부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예, 하고 다가가 대령해야 했습니다.

그의 성격때문에 결혼생활을 시작한 처음에는 약간 힘이 들었습니다만 곧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잡초처럼 그 누구의 보살핌이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세상 풍파를 헤치고 살아온 나는 자생능력(自生能力) 이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그 어떤 상황이나 위치에서도 거기에 쉽게 적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어린 두 아들이었습니다.

다음회 부터 나의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부모 잘못 만나 어릴 때부터 온갖 험한 꼴을 다 보면서 성장한 내 아들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짠하게 아려오는 내 아들들…..

동화책을 보면 계모에게 학대당하는 소녀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콩쥐팥쥐도 그렇고, 신데렐라도 그렇고, 백설공주도 그렇고, 장화홍련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부(繼父)한테 학대당하는 아이들의 대한 스토리는 거의 전무합니다.

그렇다면 모질고 못된 계부가 세상에는 없었다는 말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