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방금 배달된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립니다.이렇게 이른 아침에 누굴까.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가운의 앞섶을 여미며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엽니다. 쟌입니다. 쟌이 두툼한 점퍼 차림으로 서 있습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미안. 내가 너무 일찍 왔지? 오늘 오후에 내가 할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쟌이 잔디를 깎으러 오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좀 들어 와요. 커피 안 마셨지요?

나는 몸을 비틀어 쟌이 집안으로 들어오게 틈을 내 줍니다. 그리고 급히 커피 한 잔을 쟌에게 갖다줍니다.

“바쁘면 굳이 안 오셔도 될 걸 그랬어요. 겨울이라 잔디가 별로 자라지도 않아서 한 일주일쯤 더 있다가 깎아도 되는데…..”

“그래도…당신, 지저분한 걸 싫어하쟎아…..”

쟌은 말 없이 내가 건네준 커피잔을 받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뒷뜰로 난 슬라이딩 글래스 문에 둔 채 커피를 마십니다. 그런 쟌을 보면서 나는 지갑에 현금이 얼마 있나 계산을 해봅니다. 쟌이 잔디를 깎고나면 얼마간의 돈을 줄 것입니다. 쟌은 한사코 받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그래도 나는 억지로 그의 손에 쥐어줍니다.

사업에 크게 성공한 내 아들로부터 받은 돈입니다. 맛있는 것 사 먹고 좋은 옷 사 입으라고 아들이 준 돈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돈의 일부를 쟌에게 줍니다. 그냥 주면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일 주일에 한 번씩 와서 잔디를 깎게 하고 그 수고비조로 줍니다. 아직까지 형제들의 뒷바라지에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쟌은 경제적으로 많이 쪼달립니다.

“당신, 이제 그만 재혼을 하지 그래요….”

내 말에 쟌은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습니다.

“나이 들어서 혼자 지내고 있는 모습이 딱해서 그래요…”

쟌이 다 마신 커피잔을 부엌 카운터에 가져다 놓으며 대답합니다.

“재혼, 하지. 당신과 똑같은 여자가 나타나면 그때, 그때 할 거야……”

잔디를 깎기 위해 뒷뜰로 나가는 쟌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의 뒷모습이 웬지 쓸쓸해 보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결혼에 있어 상대방이 가진 백그라운드와 조건을 우선시한다고 합니다. 배우자 될 사람의 집안,직업, 학력, 부모의 경제력 등. 이 사람과 결혼해서 얼마나 안위하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겠냐, 나아가서 신분상승을 할 수 있겠냐를 먼저 따진다 하지요. 내가 상대방을 얼마나 사랑하고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보다는 물질적인 것을 먼저 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조건과 배경이 훌륭하고 뛰어나서 결혼을 했다, 칩시다. 그 배경과 조건이 끝까지 가면 별 탈이 없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그 배경과 조건이라는 게 얼마나 오래 갈까요. 상대방의 직장이 괜찮고 좋아서 결혼했는데 나중에 해고를 당할 수도 있고 또는 본인 스스로가 그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있는 겁니다.그러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하나요. 그 결혼을 물려야 하나요.

결혼에는 사랑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을 우선으로 한 결혼은 아무리 큰 역경과 고난이 밀려와도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사랑없는 결혼은 언젠가는 막다른 골목이 옵니다. 왜냐면 나 역시 그랬으니까요. 나는 쟌이 가진 조건, 그러니까 나와 내 아들 둘을 미국으로 데려다 줄 수 있다는 조건을 보고 결혼한 사람입니다.

쟌은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쟌을 사랑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냥 우리들에게 잘해 주어서 참 고맙고 감사하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그만하면 괜찮다, 하는 마음이 드는 정도였지 진정으로 우러나는 사랑이 없었으므로 나의 결혼생활은 늘 춥고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주제에 쟌 처럼 훌륭한 남편을 만나 끼니걱정 안 하고 살면 되었지 언감생심 무슨 사랑씩이나.….

아들 둘을 키우면서 그들의 귀에 딱지가 앉도록 타이른 말이 있습니다. 양아버지인 쟌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고마움을 잊어서는 안된다. 혹시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가슴에 품어두지 말고 무조건 잘해 드려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쟌은 스물 여섯 총각의 몸으로 아이가 둘이나 딸린 나와 결혼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세 모자를 미국에 데려왔으며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에게 쟌의 고마움을 주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내로서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의 말을 거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군복을 항상 날카로운 줄이 서게 다려 대령했으며 집안을 먼지 한톨 없게 반들반들 청소했으며 퇴근시간에 맞추어 뜨거운 음식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습니다.

쟌은 내게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자기 주위를 다 둘러봐도 나같이 가정생활에 헌신하는 부인을 둔 사람이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일’만 없었다면 쟌과 나는 지금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일만 없었다면.

그 일이란 어떤 여자 하나가 우리집에 들락거리면서 시작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지애라고 했습니다. 나보다 대여섯살이 어린 여자습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늘씬한, 길을 가다가도 누구나 한번 쯤은 돌아볼 정도로 외모가 뛰어난 여자였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다고 했습니다. 미국인과 결혼해 미국에 들어와서 이혼하고 혼자 사는 여자였습니다.

싹싹하고 애교 많고 붙힘성이 좋아 그 누구와도 금방 친하게 지내는 성격의 여자여서 주위에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았는데 나 역시 그녀와 금방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몇번 얘기했다시피 자라온 환경이 순탄하지 않아서인지 내 성격은 소심합니다. 그래서 나와 반대인 사람의 성격, 그러니까 지애같이

명랑하고 활기차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항상 부러웠습니다.

지애는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습니다. 그녀는 아무하고나 금방 친해지는 특유의 친화력을 가지고 쟌과도 스스럼 없이 어울렸습니다.

쟌도 그녀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애와 같이 있을 땐 늘 얼굴이 환하게 밝았습니다. 그런 쟌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남자들은 자기를 웃게 해주는 여자랑 있을 때 행복해 하는구나…

어느 봄날의 휴일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지애가 우리집을 찾아왔습니다. 소풍을 겸해 근교의 산으로 고사리를 꺾으러 가자는 것입니다. 이곳 캘리포니아는 높은 산이 많습니다. 조금만 산에 깊이 들어가면 고사리가 지천입니다. 연하고 통통한 고사리는 한국사람들에게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봄만 되면 한국사람들이 도시락을 싸가지고 고사리를 꺾으로 원정들을 많이 갑니다.

“언니. 고사리 꺾으러 한번도 안 가 봤지? 나는 두어번 가봤는데 공기도 맑고 아주 좋더라. 오늘 우리 둘이 같이 가요”

지애의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 별로.. 나는 안 가고 싶어….”

당시 나는 둘째 딸 엘리자벳을 졸지에 잃고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만사에 의욕을 잃고 죽지 못해 겨우 연명만 하는 상태로 유령처럼 살고 있는데 고사리는 무슨 고사리입니까.

“언니. 집에 이러고 있으면 뭐해? 죽은 엘리쟈벳이 살아 돌아 올 것 도아닌데. 그러지말고 바람도 좀 쐬고 야외로 나갑시다,응? 언니의 얼굴 좀 거울로 확인해 봐. 하도 집에 처박혀 있으면서 햇볕을 보지 않아서 누렇게 떴어요….꼭 병자같아..”

지애가 내 팔을 흔들며 재촉을 했습니다.썩 내키지 않았으나 지애가 거의 강권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나는 할 수 없이 그러자고 허락을 했습니다.

“그럴까, 그럼….”

도시락을 싸고 음료를 준비하면서 나는 쟌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는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고사리 따러 산에 가는데 당신도 같이 갈래요?”

나는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물어보았습니다. 같이 갈 것을 별로 기대하지 않고서 물어본 말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쟌의 얼굴이 환해집니다.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사람처럼 그러겠다며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그러지 뭐. 집에 있어봤자 별로 할 일도 없는데…
나는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별로 개의치 않기로 했습니다. 온 집안의 커튼을 다 내리고 집안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나를 지켜보는 것도 괴로웠을 테니 기분전환이라도 하고 싶었겠지 뭐, 하고.

쟌이 운전을 하고 내가 조수석에 탔습니다. 지애는 뒤에 앉았습니다.

차로 두어시간 운전을 해 산에 가는 동안 지애는 연신 조잘거려댔습니다. 쟌이 지애의 말에 하하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습니다. 나는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라 웃지 않았으나 쟌이 웃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좀 좋아졌습니다.

지애가 안내하는대로 운전해 간은 산은 깊디 깊었습니다. 대로가 산 꼭대기까지 나 있어서 걸을 필요는 없었으나 바위며 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음침한 곳이었습니다.우리는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습니다. 차에서 내려 몇분 걸어올라가지도 않았는데 고사리가 지천으로 있었습니다. 마치 누가 씨를 뿌려서 키운 것 같이 소복소복 무더기로 피어 있었어요.

고사리를 보고 나는 환성을 올렸습니다.

“와아, 이 고사리 봐라. 오늘 아주 횡재했구나!”

엘리쟈벳이 죽고나서 처음으로 내보는 나의 밝은 음성이었습니다.

지애가 말했습니다.

“봐, 언니. 내 말 듣고 같이 오기를 잘 했지?”

우리 셋은 비닐 봉지를 하나씩 쥐고 각자 흩어져서 고사리를 꺾기로 했습니다. 쟌과 지애가 고개를 숙여 고사리를 꺾는 걸 보고 나도 고사리를 꺾기 시작했습니다.

고사리 꺾는 데만 집중하니까 아무런 잡념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그렇게 정신없이 두어시간 고사리를 꺾었을까.

비닐 봉투로 가득 찰 만큼 고사리를 꺾었습니다. 이만 하면 되었다 싶어 일손을 멈추었습니다. 고개와 허리가 아파왔습니다. 배도 고팠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옆에 아무도 없는 겁니다. 가까운 곳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을 줄 알았던 쟌과 지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얼른 그들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어디들 있어요? 이제 그만들 하고 나와 봐요…”

몇번이나 그들의 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으나 그들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서움이 왈칵 몰려왔습니다.괴괴하고 아무도 없는 산속, 갑자기 곰이나 늑대라도 나타나면 어떡하지.

나는 다시 목청껏 그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메아리만 공허하게 날아왔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숲속 저쪽에서 쟌과 지애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나는 반가움에 그들에게 쫒아갔습니다.

“어디들 있다가 이제 나타는 거야?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쟎아요…..”

“둘 다 길을 잃었어요..한참 헤매고 있는데 저 쪽에서 쟌을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같이 오는 길이야….”

쟌은 아무말 하지 않았고 지애가 더듬거리며 변명했습니다.나는 그때 눈치챘습니다. 둘 사이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어색하고 야릇한. 뭐랄까,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친근함이 둘 사이에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괜한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으려 애써 태연한 척 했습니다.

“배들 안 고파요?빨리 밥 먹읍시다…..”

그러나.

며칠 후에 산에서 같이 찍은 사진을 찾아왔을 때 다시 기분이 팍 상하고 말았습니다.

쟌은 나랑, 그리고 지애랑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나랑 찍을 때는 웃지도 않고 전봇대처럼 뻣뻣하게 서 있던 사람이 지애와 찍은 사진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습니다. 지애의 허리에 팔을 감고 있는 쟌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그 자세가 그렇게 다정하고 자연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그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을 줄때는 쟌의 팔이 지애에게 가 있다는 것을 몰랐었어요.

나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내가 자기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조심을 해서였을까, 별 이상한 낌새를 알아 챌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안심했습니다. 지애가 워낙 친화력이 좋으니까 별 뜻 없이 그렇게들 행동 한 거겠지.. 그리고 쟌은 나에게서 느낄 수 없는 점들을 가진 지애가 여동생처럼 사랑스러웠겠지.설마 제 아이를 둘이나 낳아준 나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겠어?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설마가 나를 잡았습니다.

그날은 크리스마스날이었습니다. 내 딸 엘리쟈벳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맞는 명절이었습니다.

만사에 맥을 놓고 있다가 남아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정신을 추스리고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지애도 같이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혼자 아파트 방에서 쓸쓸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을 지애가 불쌍하고 측은하게 생각되어서지요.

오래간만에 화기로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쳤습니다. 비어 있는 엘리쟈벳의 자리를 보고 가슴이 찢어졌으나 나는 억지로 눈물을 감추고 웃음을 보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다가 나는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산더미같이 쌓여있는 설거지를 마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손님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일회용 용기를 아예 안 씁니다. 그래서 설거지가 많았습니다. 밤이 늦어도 설거지를 깨끗하게 마치고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성격의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거실에 있는 아이들과 쟌, 그리고 지애를 잠깐 바라보았습니다. 씽크대가 있는 부엌 카운터가 거실쪽으로 향해 있는 구조로 되어있어서 설거지를 하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게 가능했습니다. 아이들은 게임을 하고 있었고 쟌과 지애는 술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미소를 한 번 지어주고 설거지를 열중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거실이 조용한 것 같아 고개를 들었습니다.

아, 나는 거기서 못볼 장면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지애가 쟌의 몸위에 올라 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핥고 빨고 물고 비비고 만지고 있는 것입니다. 둘이 온갖 유사한 성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들은 그 행위에 몰입하고 열중해 있어서 내가 자기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접시 하나가 바닥으로 미끄러졌습니다. 접시는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습니다. 접시 깨지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그들이 동작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뭐…뭐하는 짓들이야…지금?”

턱이 덜덜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으나 나는 간신히 한마디 소리쳤습니다.

“니네들 짐승이야? 감히 내 앞에서…내 앞에서…”

아무리 막가는 인생들이라 해도 예의라는 게 있습니다. 그들은 그 예의라는 것을 저버리고 있는 인간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참 궁금한 게 엄연한 부인인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어쩌면 그런 행동들을 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아무리 술에 취했다고 해도 내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리에서!

둘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겸연쩍게 물러나 앉았습니다.

“뭘 그래? 그냥 장난 좀 한 것 가지고?”

지애가 별 대수롭지 않는 일을 가지고 웬 난리냐는 투로 내게 말했습니다.

“뭐? 장…장…장난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나는 기절할 뻔 했습니다. 장난이라니? 남자 무릎에 올라 타고 앉아 온갖 짓을 다 해 놓고 장난이라고?

지애는 옷매무새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핸드백을 찾아들더니 현관문으로 향합니다.

“언니 나 갈께. 저녁 식사 고마왔어”

전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태연작약하고 당당한 태도였습니다.그런 그녀의 태도에 더욱 기가 막혔습니다. 나는 하던 설거지를 팽겨쳐두고 안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습니다.

지애야.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는 거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배신 할 수 있는 거니?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분했습니다. 그리고 비참했습니다. 그들의 그런 행동은 나를 무시하고 기만하는 행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나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쟌이 문을 마구 두드렸습니다.

“은영. 문 열어요. 그리고 일단 내 말을 들어 봐요….”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나는 커피를 가지러 나갔다가 부엌에서 쟌과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란 인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분간 딴방을 쓰도록 해요. 엘리쟈벳의 방이 비어었으니 그 방을 쓰면 되겠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쟌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딸의 죽음으로 인해 매일 눈물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를 두고 어떻게 남의 여자와 그럴 수 있는지.

사실 쟌은 엘리쟈벳을 썩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첫째딸은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처럼 아끼고 귀하게 여겼으나 엘리쟈벳에게는 이상하게 대면대면하게 굴었어요. 내가 엘리쟈벳의 죽음에 더욱 애통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이 가지 않는 자식이라해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이 열살의 나이에 비명에 갔는데 어떻게 남의 여자가 눈에 들어올까요. 십년, 이십년 세월이 흘러 상처가 다 아물었다면 모르겠습니다. 겨우 1년밖에 세월이 가지 않았는데.

나는 그저 비참하고 비참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신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나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나이도 많습니다.

반면 지애는 대학을 나온 여자고 얼굴도 예쁘고 몸도 훌륭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보다 한참이나 젊습니다. 하루종일 가도 필요한 말 몇 마디 외에는 하지 않는 나와는 달리 지애는 분위기를 환하게 살아나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남자가 흠뻑 빠질 만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자식을 잃고 늪같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여자입니다. 그런 내 앞에서 어찌 둘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쟌과는 계속 각방을 썼습니다. 도저히 쟌과 한방에서 몸을 부딪칠 용기가 나지않았습니다.

그러는 중 나는 동네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지애가 남자 킬러라는 것입니다. 가정 파괴범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남의 남편을 홀려낸 게 한두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그런 여자를 집으로 불러들인 게 나의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런 여자를 집으로 불러들인 게 나의 잘못일까?그녀에게 빠진 쟌에게는 잘못이 없는 것일까?

그런데 참 그녀는 뻔뻔도 합니다. 양심이라는 게 없는 것일까요?어느 날 그녀가 우리집을 다시 찾아 온것입니다.

초인종소리에 큰 딸이 현관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더니 쾅, 소리가 나게 다시 닫았습니다. 나는 잡상인이 찾아온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딸을 나무랬습니다. 아무리 잡상인이라도 그러면 못써. 큰 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엄마. 그 여자야, 그 여자. 엄마를 슬프게 만들었던 그 여자…..

쟌과 나 사이에 흐르는 이상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아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상한 낌새가 지애라는 여자때문이라는 걸 못할 아이가 아닙니다.큰 딸은 그런 식으로 지애에게 분노를 표출한 것입니다.

나는 얼른 쫒아나가 문을 열었습니다.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지애가 또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문을 열었습니다.

“왜 왔니?여긴 뭐하러 왔어?”

나는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정말이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집에 찾아 온 사람을 쫒아낼 정도로 모질지 못합니다. 그리고 은근한 기대도 가지고 있었어요. 자신의 잘못을 사과해 주길 바라는 기대.

그러나 지애는, 그 여자는 나보다 한 수 위였습니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언니, 왜 그래?내가 뭐 못올 데 왔어?내가 뭐 잘 못한 것 있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습니다. 저 때문에 한달동안 내가 지옥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있었는데! 얼마나 고통스럽게 내가 그 지옥을 헤매고 있었는데!

“일단 들어 와라. 얘기 좀 하자”

나는 그녀의 팔을 끌어다가 거실 소파에 앉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머리 검은 짐승을 거두지 말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이런 법이 어디 있니?”

“뭔 말이야 언니, 지금?”

전혀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그녀의 얼굴 표정. 사람하나 병신, 천치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닌 것 같은 그녀의 마일간 표정.그 천연덕스러운 표정.

나는 기가 질리고 말았습니다.

“너 지금 나를 갖고 노는 거니?”

가슴이 떨려서 말이 더듬거려졌습니다.그 치욕스런 장면을 목격한 것을 다시 되풀이 해 줘야 이 아이가 기억을 하려나?

“지…지난 크리스마스 때…..”

“응…크리스마스 때….그래서?”

“네가…네가 쟌..쟌이랑….”

“오, 그래 그날 저녁밥 아주 잘 먹었지. 그날 언니의 겉절이 김치가 끝내줬어…그런데 그날이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전혀 기억에 없다는 표정, 지금 내가 저한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지애에게 나는 혼심을 다해 한 마디 했습니다.

“정말 너 그날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 못하겠니?”

내가 가슴을 치면서 말하자 지애가 잠깐 골똘히 생각하는 듯 하다가 대답했습니다.

“그날 내가 술이 좀 과했지. 소파에서 쟌과 아이들하고 잠깐 얘기하다가 집에 돌아간 기억밖에 없는데?”

하도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니까 정말 이 아이가 그때의 일을 기억못하나 싶은 생각마저 드는 것입니다.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단도직업적으로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내가 목격한 장면을 지애에게 얘기했습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지애는 경악스런 표정을, 그리고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 손을 잡으며 짐짓 나를 달래는 투로 말했습니다.

“언니. 내가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난 그런 적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어.언니가 뭘 잘못봤겠지. 뭘 잘못봤을 거야…”

“내가 잘못봤다고? 그럼 왜 쟌은 내가 잘못봤단 얘길 안했을까? 며칠전 너 여기 왔을 때 우리 큰 딸이 왜 그랬다고 생각해?”

“그래. 그렇쟎아도 이상하게 생각했었어.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문을 소리나게 닫아버리대. 그날 기분 참 더러웠어…..”

지애는 며칠전의 일이 생생하게 생각난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 아이에게 뭐라고 더 말을 하고 뭐라고 더 추궁을 하겠습니까.

어쩌면 이 아이가 정말로 술김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술이 잔뜩 취했다면 그런 행동을 했다치더라도 기억을 전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죽이고 싶도록 원망스럽고 밉던 마음이 봄햇살에 눈 녹듯 스르르 없어지는 것입니다. 술먹은 개라는 말도 있듯이 술이 죄지, 이 아이가 무슨 죄냐, 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거의 한달동안 속을 끓인 내가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지애는 용서했으나 쟌은 용서가 안 되는 데 있었습니다. 지애는 남이고 쟌은 내 내 남편입니다. 그래서 더욱 쉽게 용서가 안되는 지도 몰랐습니다.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얼음장같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비록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항상 고맙고 미안한 마음은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에는 그런 마음마저 씻은 듯이 싹 없어져 버렸어요.

한집에 같이 사는 게 지옥이었습니다.

각방을 쓴다하나 어쩔 수없이 얼굴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그를 외면합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괴로웠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엘리쟈벳의 죽음으로 마음이 천갈래,만갈래 찢어져 있는 나를 배신했다는데 대한 미움과 증오가 극에 달했습니다.

만약 당시에 엘리쟈벳의 죽음이 없었다면 넘어가기가 좀 쉬웠을까요? 쟌을 용서했을까요?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그런 식으로 한 집에서 쟌과 살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쟌과 헤어져야겠다고 나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시 나는 한국 식당의 웨이츄레스로 일하며 적지 않은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쟌과 헤어져도 경제적인 문제때문에 압박과 곤란을 당하지는 않을 정도였습니다. 아니, 압박과 곤란을 받아도 할 수 없습니다. 목이 졸리는 듯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상태에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는 도저히 없었으니까요.

아이들이 없는 틈을 타 나는 쟌과 마주앉았습니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알아챘는지 쟌은 눈치를 슬글슬금 보며 내 앞에 앉았습니다.

“이혼해요…..”

나는 단도직업적으로 말했습니다.

“당신이 어떠한 마음으로 지애와 그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지 않고 알 필요도 없어요. 지금 분명한 것은 그런 짓을 한 당신과는 앞으로 도저히 같이 살 수없다는 것입니다….”

쟌은 아무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개만 떨구고 있을 뿐.

“아이들은 제가 다 맡겠습니다. 양육비는 필요없어요. 대신 위자료로 집을 주세요”

이혼한다는 말을 하는데 전혀 마음의 동요가 생기지 않았어요.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습니다.

“당신에게 항상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그러나 이제 남은 것은 미움과 원망뿐입니다. 이런 상태로 당신과 같이 한집에서 지내는 게 괴롭습니다. 헤어지는 게 피차 나을 것 같아요….”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쟌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떨리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나를 처음부터 사랑하지 않았던 것, 다 알고 있었어. 내가 가진 조건만 보고 결혼했던 것 다 알고 있었어… 언젠가는 나를 떠나가리란 것도 알고 있었어….”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은 여자와 결혼해 이십년을 같이 산 남자. 그 여자로부터 이혼 통고를 받고 있는 남자.

나는 쟌에게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미안해요…그리고 고마와요…당신의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그날 오후.

그라지로 무엇을 가지러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보았습니다. 쟌이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것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나는 다가가서 쟌을 끌어 안았습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해요, 그래? 나 없는 데서 하지. 그 얘가 나보다 좋았다면, 그래서 한번 안아보고 싶었다면 차라리 나 없는 데서 하지……”

쟌과의 20년 결혼생활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