쟌과 이혼 후에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20년의 결혼생활 뒤에 내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래된 집 한 채뿐이었습니다. 세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이 된 것입니다.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쟌은 어떻게해서든지 양육비를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만 앞에서 얘기했듯이 그는 가난하고 무능한 부모와 형제들 돕기에도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작은 액수나마 주면 좋겠지만 안 주어도 뭐라고 불평할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나는 본격적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해야 했습니다.

영어를 뛰어나게 구사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종사할 곳은 예나저나 한국식당입니다. 웨이츄레스나 부엌 일.

다행히 그때 나는 젊었습니다. 아이를 넷이나 낳았지만 아가씨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어느 식당에서든지 웨이츄레스로 환영받았습니다.

한국식당 웨이츄레스 일은 무척 힘들고 고됩니다. 보통 강단가지고는 버텨나갈 수 없는 직업이 바로 한국식당 웨이츄레스라는 직업입니다.

첫째, 한국식당은 타식당보다 테이블로 날라야 할 것이 많습니다. 쟁반 가득 밑반찬들을 날라야 하고요. 그릇들이 대부분 다 두껍고 무겁습니다. 돌솥들, 뚝배기들, 생선구이들을 담아 내가는 철판 접시들. 그리고 국물이 철철 넘치는 탕, 찌개, 국 종류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쇠처럼 팔 힘이 세어야 할 수 있는 직업이 한국식당 웨이츄레스입니다.

그리고 웨이츄레스 한 사람당 대여섯 테이블만 맡는 미국식당과는 달리 혼자서 전 식당안의 테이블을 도맡아 서빙해야 하기에 하루종일 동동거려야 합니다.

한국 식당및 미국 식당 웨이츄레스로 다년간 일 한 경험이 있는 어느 사람이 그랬습니다. 미국 식당 웨이츄레스는 한 테이블 당 아무리 많아도 다섯번 정도만 가면 되는데 한국식당, 한국인 손님 테이블에는 적어도 스무번은 가야 한다고.

가만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일단 미국 식당에 손님이 온다 칩시다. 물과 메뉴를 갖다 주러 한번 갑니다. 주문을 받으러 두번째 갑니다. 주문한 음식을 갖다주러 세번째 갑니다. 중간에 뭐 필요한 게 없는지 살펴보러 네번째 갑니다. 계산서를 갖다주러 마지막으로 갑니다.

한국식당의 한국손님들은 다섯번 가지고는 택도 없습니다. 떨어진 밑반찬을 그때그때 채워줘야 하기에도 그렇지만 요구하는 게 참 많기에 그렇습니다.

중간에 냅킨 더 달라, 젓가락을 떨어뜨렸으니 새걸로 갖다 달라는 요구도 많구요. 서비스로 찾는 것도 많습니다. 후식으로 커피 달라, 과일 달라……

그러나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쓸데 없는 트집을 잡는데는 사람 미칩니다. 짜다. 싱겁다.왜 이렇게 맛이 없냐. 왜 이렇게 양이 적냐. 맛도 없는 것을 배 터져 죽으라고 이렇게 많이 주냐, 젓가락도 대기 전에 미리 질리겠다. 왜 이렇게 비싸냐. 밑반찬 꼴이 이게 뭐냐..

하인부리듯이 사람을 오라가라, 진을 빼게 해놓고 음식값의 1%도 안되는 팁을 놓고 가는 사람들…

어쨌든 내가 할 일은 그쪽 분야밖에 없었기에 나는 열심이 일했습니다.

한국 식당에서 나는 ‘미스 양’으로 통했습니다.

나의 원래 성(姓)은 고씨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국식당에서 내 원래 성을 밝히기가 싫었습니다. 손님만 아니라면 절대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온갖 진상들에게도, 술 먹은 손님들에게도, 별 거지같은 인간들에게도 마구 불리워 질 내 성이었습니다. 내 성이 그런 사람들에게 함부로 더럽혀지는 게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식당일을 그만 둔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나를 미스 양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엘리쟈벳을 잃고나서 이혼을 한 후 그렇쟎아도 폐쇄적인 내 성격은 더욱 폐쇄적이 되어갔습니다.

직장과 집 외는 일절 문밖에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나 주위사람들이 크게 걱정할 정도로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습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았습니다. 아이들과 먹고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직장에 출근은 했습니다만 사람들을 만나는 게 그렇게 싫고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10년 가까이를 그렇게 어둠에 갖혀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식당을 그만 두고 이 지역의 가장 큰 쇼핑센타에 있는 한 옷가게의 매니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말 없이 열심히 일 하는 나를 매우 마음에 들어한 한국인 손님의 제의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렇쟎아도 식당일은 내게 무척 힘이 부쳤기에 다른 직장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디 약한 내가 무거운 것들을 매일 나르며 식당에서 일하다 보니 건강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내가 매니저로 일하게 된 곳은 젊은 여자들을 대상으로 옷을 파는 곳이었습니다. 주인은 나를 매우 전폭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했습니다. 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옷가게 열쇠를 내게 맡겼습니다. 가게 문을 내가 열고 닫아야 했고 하루 매상도 내가 다 확인하고 계산해 다음날 은행에 임금했습니다.

벼라별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어가며 하루에도 수십차례 무거운 쟁반을 들어 날라야 하는 식당과는 비교도 안되게 일은 편했습니다만 종업원 관리도 해야 하고 매상도 책임져야 하고 여러가지 의무가 따라야 하는 일이라 스트레스가 좀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나를 믿고 열쇠까지 맡겨 준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A식당의 주인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딸 죽고,이혼하고 바깥에 아예 나오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은 알지만 교회의 구역예배에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A식당은 내가 잠깐 일 했던 스시집입니다. 주인 언니의 인심이 후하고 좋아서 오랫동안 일하고 싶었는데 주인 언니의 조카가 일을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부득이 그만 둘 수밖에 없었던 식당이었습니다.

“미스 양이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잘해서 아주 좋았는데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다시 부를 테니 그땐 우리 꼭 같이 일하자?”

내게 레이 오프를 주던 날 주인 언니가 내 두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차갑고 냉정하게 생긴 것과는 달리 나는 한번 맺은 인연을 내 쪽에서 먼저 끊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해 가는 것입니다.

A식당 언니와도 단 두달 동안 같이 일한 사이였지만 오래도록 친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미스 양아. 이제 그만 세상밖으로 나와라. 응? 사람이 사람 얼굴을 보고 살아야지..구역예배에 가면 좋은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야….날 봐서라도 이번에 한 번만 따라 가자”

A식당 언니가 간곡하게 말했지만 나는 거절했습니다. 직장에 나가는 거야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돈을 벌러 나가는 거지만 그 외에의 곳에는 정말이지 아무 곳이에도나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 여자 딸이 죽었대. 그리고 남편이 바람나서 이혼했대,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식당 주인 언니는 집요했습니다. 내가 싫다고 거절을 하는 데도 몇 번이고 계속 전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마침내 구역예배에 따라가기로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언니의 성화때문에 할 수 없이 가는 거예요…..”

“그래. 잘 생각했다. 일단 이번 한번만 가자….”

A식당 주인 언니가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언니의 차를 타고 구역예배 장소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언니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신발 수선가게를 잠깐 들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비싼 신발인데 하도 이것만 주구장천 신고 다녀서인지 벌써 뒷굽이 나갔지 뭐야?

A식당 언니가 차를 세우고 한 구두 수선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나는 차안에서 그녀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5분이면 된다고 했는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나는 무료하게 차창 밖을 내다보며 기다렸습니다.

“ 저 구두 수선가게 주인 남자말이야….”

한참만에 돌아온 언니가 차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습니다.

“ 참 괜찮은 남자야…..”

나는 창밖만 내다보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남자가 괜찮던 말던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기에.

구역예배 장소로 다시 차를 몰면서 A식당 주인 언니가 지나가는 말처럼 다시 무심하게 말했습니다.

“한번 이혼하고 혼자 사는 남자야. 성품도 원만하고 잘생기고 키도 커서 여자들이 많이 따를 건데 왜 아직까지 혼자 사나 몰라….”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말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다 귀찮았던 나는 그냥 예사로 그말을 흘려들었습니다. 대꾸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A식당의 주인 언니 말대로 구역예배 장소에는 좋은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습니다. 염려했던 것처럼 나의 신상에 대해 일절 묻지 않았습니다. 성경얘기만, 하나님 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나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배려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하고 따뜻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구역예배 모임에 언니를 따라 참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A식당 주인 언니를 따라 구역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언니가 오늘은 날도 더운데 어디 가서 시원한 맥주라도 한 잔하고 가자며 차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를 따라 간 곳은 이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 술집’이태원’이었습니다.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으나 A식당의 언니의 차를 타고 갔기에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발을 들여야 했습니다.

실내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예쁘고 깨끗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한쪽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와 춤을 출 수 있는 스테이지가 있었고 각종 양주들이 즐비하게 진열된 곳에 카운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구석의 테이블에 가서 앉았습니다. 거기서 나는 카운터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키가 크고 아주 멋지게 잘생긴 남자였습니다. 콧수염이 근사하게 잘 어울리는 남자였습니다. 그 남자는 카운터에 앉아 우리가 앉은 테이블을 , 특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조금 후 곁눈질로 카운터를 보니까 그때까지도 남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귓속말로 A식당 언니에게 말했습니다.

“언니. 이상해, 저 남자. 왜 저렇게 이쪽만 쳐다보고 있을까?”

A식당 언니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알아챘다는 듯 그 남자 쪽을 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 미스터 김 아니야? 언제 왔었어?”

A식당 언니가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우리 테이블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미스 양, 인사해. 이쪽은 제이씨”

남자가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얘기지만 A식당 언니와 제이씨는 미리 각본을 짜놓고 있었습니다. 시간 맞추어 그곳에 서로 나타나기로 말입니다.

제이씨는 훨씬 전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리 약속한 시간이 되었는데도 우리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내가 안 나타나는 줄 알고 굉장히 실망하고 있었답니다. 그러고 있다가 내가 모습을 보이자 기쁜 마음에 그렇게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제이씨였습니다. 그 남자 제이씨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깊이 사랑한 남자였습니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부터 이 남자는 나의 운명이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내가 마구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조건에 떠밀려서 어쩔수 없이 선택한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원해 이루어진 사랑이었습니다.

내 인생에 두명의 남자가 거쳐갔습니다. 윤승준과 쟌. 그러나 그들이 나를 선택했습니다. 나는 그들의 선택에 순응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초라하고 못났다는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 앞에서 나는 당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등하지 않은 관계로 출발했으니까요. 그들로부터 수혜만 늘 받아야 하는 내 입장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제이씨 앞에서는 나는 처지고 꿀릴 게 없었습니다. 그는 나랑 동등한 관계였습니다. 그도 한번 이혼했고 나 역시 같은 처지였습니다.무엇보다도 미국에 와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남자에 종속되지 않고도 혼자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 자신감은 어디에 가든지, 누구 앞에 서든지 나를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제이씨 앞에서 망설이고 주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나는 여자이기 전에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였습니다. 벌써 두번의 이혼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항상 큰 딸에게 타일렀습니다.

“여자는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된다. 난잡하게 굴면 안 된다.”

자유분방한 미국이지만 어쨌든 여자는 몸가짐을 조신하게 해야 한다는 관념이 내 머리에 뿌리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혼자 모든 것을 깨닫고 터득했습니다. 옆에서 누가 조언해 준 이도 없었고 타일러 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자의 바른 행동가짐에 대해서 책을 통해 일찍이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 남편이었던 쟌과는 결혼 전까지 섹스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야 당연히 간절히 원했지요. 그러나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허락할 수 없다는 나의 신념에 순순히 따라주었던 것입니다.

제이씨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나의 운명적 사람이라는 감은 들었으나 선뜻 내 쪽에서 다가 가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함부로 인연을 맺고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는 신념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는 한국 인구가 만명도 안되는 작은 곳입니다. 옆집에 숟가락이 몇개인지 젓가락이 몇개인지까지도 서로 훤히 알고 사는 동네였습니다.

특히 나는 다년간 한국식당 웨이츄레스 일을 했기에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제이씨와 단 둘이 만나는 걸 극도로 피했습니다. 만나야 할 일이 있을 때는 A식당 언니를 대동했습니다. 그렇게 셋이서 만나 차도 마시고 밥도 먹었습니다. 물론 우리집 전화번호도 주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제이씨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집에 남자가, 특히 한국남자한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처음이라 그의 굵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절할 듯이 놀랐지요.

“미스 양의 예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그래서 전화했습니다…”

나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혹시 아이들이라도 들으면 어쩔까 싶어서요.

“남의 집에 함부로 전화하지 마세요…”

나는 얼른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얼른 A식당 언니에게 전화해 따졌습니다.내 전화번호를 줄 사람은 그 언니밖에 없었으니까요. 처음에는 자기가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내가 계속 다그치자 언니가 나중에 실토했습니다.

“네 전화번호를 달라고 하도 보채서 줄 수밖에 없었어. 이제 그 남자 속 좀 그만 태우고 확신을 좀 주지 그러니?”

그가 직접 집으로 전화하는 것을 내가 달가와하지 않자 나중에는 여자를 시켜 전화를 하기도 했습니다.물론 나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요. 매일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남자를 사귄다는 것을 아이들이 눈치챌까 두려웠습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상태로 6개월이 지나갔습니다. 물론 그때까지 제이씨와는 단둘이 만난 적도 없었고 손도 잡지 않은 사이였습니다.

하루는 A식당 언니와 같이 가까운데로 일일 여행을 가기로 약속 했습니다. 제이씨도 같이 가기로 했지요. 내가 A식당의 언니를 픽업해서 다시 제이씨네로 가서 그를 픽업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A식당의 언니집으로 픽업을 하러갔더니 갑자기 몸이 아파서 여행을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냥 니네들 둘이만 갔다 와라. 나는 가고 싶긴 한데 도저히 안 되겠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손꼽아 기다렸던 계획이 허물어지다니….

당시 나는 휴대폰이 있었습니다. 옷가게 매니저 일을 하니까 시도때도 없이 급한 일이 생겼어요. 그래서 새로 장만한 휴대폰이었습니다.

나는 제이씨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신호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나는 제이씨 아파트를 행해 운전을 해가면서(A식당의 언니와 함께 몇 번 놀러간 적이 있어서 제이씨의 집은 알고 있었습니다)계속 전화를 했어요. 정 전화를 안 받으면 문에 쪽지라도 써서 붙혀놓고 돌아올 심산이었습니다. 오늘 여행 계획이 최소되었다고. 정말이지 제이씨와 단 둘이서 여행을 갈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참 이상하지요. 아파트에 도착할 때까지도 전화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집에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아파트에 막 도착해서 다시 전화를 했더니 제이씨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으셨어요. 괜히 당신 아파트 앞에까지 왔쟎아요. 어쨌든 오늘 여행가기로 한 계획 취소입니다. A식당 언니가 몸이 아파서 갈 수가 없대요…”

“그래요?그럼 할 수 없지요, 뭐”

여행을 갈 수 없게 되었다는데도 별로 놀라지도, 실망하지도 않는 제이씨의 목소리였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전화 끊을께요. 다음에 또 봐요..”

내가 전화를 끊으려하자 제이씨가 전화기 속에서 황급히 나를 불렀습니다.

“미스 양.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봐요….”

곧 문이 열리며 제이씨가 뛰어나왔습니다. 금방 샤워를 하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잠깐만 들어갔다가 가요”

제이씨가 열려진 운전석 창문으로 허리를 굽혀 얼굴을 들이밀면서 말했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가겠어요…”

내가 차의 시동을 걸자 제이씨가 급하게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습니다.

“미스 양에게 뭘 꼭 보여주어야 할 게 있어서 그래요. 시간 많이 안 뺏을 테니 잠깐만 들어 와요. 10분만, 아니 단 5분만요”

그렇게까지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뻣대려니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는 차 시동을 끄고 제이씨를 따라 그의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나를 앞세우고 뒤에 따라오던 제이씨는 내가 아파트에 발을 들여놓는 걸 확인하자 얼른 문을 걸어잠갔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나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무,,무슨 짓이예요, 이게?”

뭐라고 말 할 사이도 없이, 저항할 사이도 없이 제이씨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강한 힘으로 나를 번쩍 들어다가 안방의 침대로 갔습니다.

“미스 양. 당신을 사랑해요.많이 사랑해요. 하늘 만큼 땅 만큼 사랑해요. 그래서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을 가지고야 말겠어…”

그렇게 어이없이 제이씨와의 첫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창피하고 분하고 괘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곧 체념했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그의 그런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밖에 나를 가질 수 없었던 그를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왜냐면 나 역시 그를 아주 많이 사랑했으니까요.

제이씨는 요리를 아주 잘하는 남자였습니다. 나를 위해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그중에서도 그의 된장찌개는 참 일품이었어요. 내 퇴근시간에 맞추어 끓여놓던 된장찌개는 지금도 제이씨를 추억할 때면 아련히 떠오르는 음식입니다.

제이씨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주었습니다. 윤승준도, 그리고 쟌도 나를 많이 사랑했었습니다만 제이씨가 나를 사랑하는 것과는 강도가 다르고 색깔이 달랐습니다.

우리는 많이 사랑했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항상 불안했습니다. 아이들이 나와 제이씨와의 관계를 알게 될까봐.

그리고 제이씨를 그렇게 사랑했으면서도 그랑 끝까지 갈 수 있을지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왜냐면 그는 정말이지 굉장히 불성실한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구두수선 가게를 운영하고는 있었지만 돈을 버는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술 먹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남자였습니다.

구두수선가게는 하향길에 접어든 사업이었습니다. 더구나 그의 가게는 위치도 별로 좋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매달려도 될까말까한 가게인데 그는 가게 운영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가게가 안 되니까 하루종일 하는 일 없이 심심했겠지요. 친구들을 부릅니다. 친구들이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우루루 몰려듭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가.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하다가 화투를 치는 것이 일이었겠지요. 그리고 술을 사다가 마시는 것입니다.

그렇쟎아도 손님없는 가게인데 왁자지껄 한국말 소리가 들리고 자욱한 담배연기와 술 냄새가 가득 찬 곳에 어느 손님이 오겠습니까. 손님들의 발길은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퇴근하고 가끔 제이씨의 구두수선 가게에 내가 들릴 때가 있습니다. 파킹랏에 내 차가 들어서는 것 같으면 가게 문이 급하게 열립니다. 그리고 모여서 화투를 치던 친구들이 황급하게 떠나가는 게 보입니다.

쌀쌀하고 얼음장같이 차갑게 생긴 나입니다. 친구들이 모여서 그러고 있는 모습을 웃으며 봐줄 리가 없습니다. 차가운 내 얼굴이 더욱 차갑고 좋지않게 변하겠지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지레 겁을 먹고 떠나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나는 제이씨에게 강경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좀 더 비지니스에 신경쓸 수 없어요?여기가 노름장이예요?술집이예요?이제 그만 좀 친구들을 못오게 해요….”

제이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동안에 쟤네들한테서 개평을 뜯어서 아파트 렌트비를 냈어 …”

참으로 기절할 노릇이었습니다. 화투판을 벌이게 하고 개평을 뜯어 아파트 세를 냈더니 말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아파트 렌트비, 앞으로 제가 보태줄 테니까 더 이상 그런 짓 하지 말아요….”

옷가게 매니저로 일한다고는 하나 월급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세 아이들과 먹고 사는데 빠듯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제이씨가 그런 식으로 사는 게 싫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박봉에서 그의 아파트 세를 보태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돈에 그리 인색하지 않습니다. 꼭 써야 할 때는 아끼지 않고 씁니다. 나를 위해서는 햄버거 한 개 안 사먹으면서도 그렇게 제이씨를 위해서 돈을 나눈 것입니다.

제이씨와 내가 사귄다고 하자 주위 사람들이 많이 만류했습니다.

하필이면 그런 남자냐고 말했습니다. 가진 거라곤 아무 것도 없고 불성실한 그런 남자를 왜 택했냐고요. 남자랑 사귀면서 온갖 선물을 얻어가지지는 못할 망정 돈을 보태 줘 가면서까지 뭐 하러 사귀냐고요.

그렇지만 나는 제이씨의 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믿었습니다. 물질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제이라는 한 인간을 보고 내가 마음주고 사랑을 준 것입니다. 물질이나 배경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우리의 사랑을 질투했던 것일까요? 그 남자 제이씨와 나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