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몹시 피곤한 것 같았다.

풀리지 않은 피로가 어깨에 덕지덕지 내려와 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며칠 밤을 잠 못자고 일한 사람같이. 가리지도 않고 하마처럼 입을 크게 벌리면서.

“매우 피곤한가 봐요”

은아가 웃으며 한 마디 했다. 남자는  아, 예. 조금요, 하고 대답했다. 반쯤 감은 눈을 뜨지도 않고서. 마지못해 억지로 대답하는 사람처럼 짧고 간단하게.

그때 은아가 그 남자에게서 발견한 것은 권태였다. 그것은 피곤한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심드렁하고 시들하고 귀찮아 하는 것 같은.

그는 그 자리에 억지로 끌려나온 사람같았다. 그는 선이라는 대해, 그리고 은아라는 여자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그는 은아에게 아무 얘기도 묻지 않았다.

기린처럼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와서 은아의 이름을 확인한 후 의자에 털썩 앉았을 뿐. 그리고 금방이라도 의자에 누울 듯이 비스듬하게 기대앉아 눈을 반쯤 감고 있을 뿐.

커피가 왔을 때에야 그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는 손을 뻗어 잔을 들고 급하게 한 모금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는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내뱉았다. 아이고. 써라. 무척 쓰군!

은아가 말했다. 설탕을 넣지 그래요. 그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귀찮잖아요. 은아가 피식 웃으며 그의 커피잔을 앞으로 당겼다. 그리고 설탕과 크림을 알맞게 넣어 저은 후 그의 앞으로 도로 밀어 놓아 주었다.

그는 실눈을 뜨고 은아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는 앞에 놓아진 커피잔을 들었다. 그는 은아에게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지 않은 사람처럼 은아도 별말 없이 그녀의 몫으로 놓아진 커피를 마셨다. 둘은 그렇게 이십여분 동안 입을 다물고 커피를 마셨다. 마치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이 세상의 최대 과제인 사람처럼. 시선은 서로의 어깨 너머로 둔 채. 모르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커피를 다 마셨을 때 마침내 남자가 말했다.

“우리 지금 뭘하고 있지요?”

은아가 대답했다.

“선 보고 있잖아요. 결혼 상담소를 통해 만나서 누가 밑지나, 서로를 저울질 하러 나왔잖아요.”

그렇게 말해놓고 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쿡, 하고 웃었다. 백주대낮에 한잔에 10불 가까이나 하는 비싼 호텔 커피샵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지금 둘은 선을 보고 있는 것이다. 둘은 서로 앞에 앉은 상대방을 살펴보고 이리저리 탐색해 보러 나와 앉아 있는 것이다. 마치 제사상에 올릴 조기를 고르듯이.

저 남자가 앞으로의 내 일생을 편하게 책임져 줄 적임자인가.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하얀색 샤넬 백을 돌아오는 생일 선물로 안겨줄 사람인가. 만약 결혼을 하게된다면 몇캐럿트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 줄 사람인가….

물론 앞에 앉은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사 와이프로서 손색 없을 지혜와 현명함을 갖춘 여자인가. 시부모에게는 잘 할 착한 심성을 가진 여자인가. 이 여자와 결혼함으로 얻을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둘은 별로 상대방에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 으레적으로라도 물어봐야 할 것들을 묻지도 않은 채 침묵만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일어납시다”

젖은 빨래처럼 의자에 처져있던 남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나가요”

둥그렇게 눈을 뜨고 있는 은아의 손목을 남자가 낚아채듯이 잡았다. 그리고 강력한 힘으로 자기 쪽으로 잡아 끌었다. 은아는 별 저항을 하지 못한 채 남자에게 손목을 잡혀 그가 이끄는대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 꼼짝말고 있어요. 차를 가져 올 테니까”

꼼짝하려고 해도 못할 상황이다. 차가 없으니까. 차는 엄마가 가져갔다. 이 동네 어딘가에 사는 친구들을 만난다고 했다.

“어쨌든 잘 해. 잘 하라고”

엄마는 고칠 데도 없는 은아의 화장을 다시 한번 고쳐주면서 신신당부했다. 나도 너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 이제 지겹다. 제발 이번엔 잘 해. 남자 마음에 쏙 들게 잘 하란 말이야.

글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일까. 엄마의 손에 이끌려 수십번 선이라는 걸 봤지만 은아는 아직도 엄마의 그 잘 하라는 말의 뜻을 이해 못한다.

“너는 도대체 애교라는 게 없어. 얼굴만 예쁘면 뭐하냐고. 남자를 녹이고 꼼짝못하게 하는 것은 애교야. 애교를 부려야 해, 애교를….”

누구나 한번쯤은 돌아볼만한 예쁜 얼굴과 균형잡힌 몸매를 가지고 있는 은아가 수십번 선을 보고도 지금까지 결혼을 못하는 이유를 첫째는 집안 형편 때문이요, 둘째는 은아가 애교가 없어 남자를 끌어당기지 못한 때문이라고 엄마는 진단했다. 그래서 엄마는 늘 은아에게 애교, 애교, 애교를 주문했다.

“여자가 깎아놓은 배같이 사근사근한 맛이 있어야지.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산다는 말이 그냥 나왔겠니?”

지난 번 부동산 재력가의 아들과 선을 보고, 그리고 그 선이 일회성으로 끝난 걸 알고 났을 때 엄마는 마구 은아를 닥달질 했다.

“남자 마음에 들려는 노력이라도 조금 해 봐라. 너는 그저 얼굴만 예쁜 마네킹같아. 뻣뻣하기가 마른 명태같은 애를 어느 남자가 좋아하니? 제발 애교를 부리든지 그게 안 되면 교태라도 좀 부려 봐!”

마침내 엄마가 ‘교태’라는 말을 썼다. 아버지가 지나가다가 그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불같이 화를 냈다.

“딸한테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지. 지금 그게 에미가 되어가지고 할 말이야! 결혼을 못하면 말지 은아가 뭐가 아쉬워서 놈들한테 교태까지 부려야 해!”

아버지도 질겁을 했지만 은아도 아연실색을 했다. 은아는 지금도 화가 난다. 애교라는 말까지는 그래도 봐줄만 하다. 엄마가 오죽 답답했으면, 하는 미안함도 있었다. 그러나 교태라니! 팁을 더 바라는 술집여자같이 교태부리라는 말을 하다니.

그게 정녕 엄마가 바라는 것인가.그렇게 해서라도 시집을 보내야 하는가 말이다.

그러나 은아는 엄마에게 단 한 마디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뻔하니까. 한 마디 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하니까.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직싸게 깨지고 말 테니까.

엄마는 잔소리 대장, 신경질 대장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늘 짜증과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아버지에게도 은아에게도 그리고 금아에게도.

엄마는 자신이 매일 쏟아내는 잔소리가 항상 옳고 합당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거의 대부분이 엄마의 주장을 합리화 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또한 엄마의 주관에 의해 세워진 의견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들이었고 그 중에는 부당한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은아는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살았다. 엄마가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다 너 잘 되라고’하는 포장을 씌워 속사포처럼 퍼붓는 잔소리가 자기 뜻과는 전혀 무관하다 해도 여지껏 단 한 마디 말대꾸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은아는 싸우는 게 싫었다. 언니 금아가 가끔씩 엄마와 부딪쳐 집안공기를 싸늘하게 만들곤 했는데 은아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 불편했다.

은아가 원하는 건 따뜻한 가정이었다. 낮은 음악소리와 높은 웃음소리와 다정한 대화소리가 어우러지는 행복하고 화목한 가정을 은아는 갈구했다.

얼른 자신을 시집보내지 못해 혈안이 되어있는 엄마에게 은아가 별 불만없이 동조를 하는 것도 따지고보면 얼른 이 집을 탈출하고 싶기때문이었다. 은아가 지금 살고 있는 가정은 썩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기에.

하루종일 가도 다정스런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엄마와 아버지와 언니 금아. 그들 세 사람이 입을 열 땐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처주고 푸념하고 탓하고 그리고 경멸할 때 뿐이었다.

집안 분위기는 언제나 무겁고 살벌했다. 그런 좋지 않은 분위기에 자신까지 나서서 보태고 싶지 않았다, 은아는. 내가 좀 속상하고 말지. 내가 좀 슬프고 말지. 내가 손해보고 굽히고 참고 말지.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의 마음이 편하고 집안이 편할 수만 있다면….

빵빵, 하는 차 클랙션 소리에 은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앞에는 낡은 트럭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조금 전에 은아랑 같이 앉아 있던 남자가 운전대를 잡고 이쪽을 바라 보고 있다. 남자는 손짓으로 은아에게 차에 타라는 시늉을 했다.

은아는 서둘러 차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이건 좀 놀랍다. 현재 유능하게 잘 나가는 의사라더니. 그래서 근사한 차를 기대했었는데 트럭이라니. 그것도 이십년은 더 되어 보이는 낡은 트럭. 가난한 노동자들이나 타고 다닐 그럴 볼품없는 트럭.

은아의 실망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앞만 보고 차를 출발시켰다. 은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눈알을 굴려 차안을 휘리릭 둘러본다. 더러운 냄새가 풀풀 날 것 같은 낡아빠진 외양과는 달리 차안은 그런대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마셨을 종이 커피컵이 꽂혀 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쓰레기도 내팽겨쳐져 있는 물건도 없다.

“어딜 가는 거예요, 지금?”

은아가 물었다. 참 엉뚱하고 이상한 남자네, 생각하면서.

남자가 고개를 돌려 은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딜 가고 싶은데요?”

“…………”

“공원에 가요”

“공원?”

“시원한 바람 쏘이려…..”

“………..”

“괜찮죠. 은아씨?”

아예 관심 조차도 없는 것 같더니 다행히 내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았네. 은아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냐면 이번 남자와의 만남도 처음부터 별로 조짐이 좋지 않은 것 같아 내심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면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으므로. 그래서 적어도 몇달은 만남을 이어가야 했으므로. 그런 다음 헤어지던지 해야 엄마가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지 않나 말이다.

“음. 몇번 만나봤는데 은아가 싫대. 처음엔 몰랐는데 눈을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다나 어쨌다나….”

한번만 만나고 헤어졌다면 누구든지 이상하게 생각한다. 아마 남자가 은아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나 보지. 그러니까 다음번 만나자는 요청을 하지 않았겠지….

상대방을 은아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남자가 은아를 마음에 들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다음 번 만남이 지속되니까. 상대방이 은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데 여자가 먼저 나서서 만나자고 할 수는 없으니까.

남자가 말한 공원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공원안은 한적했다. 아무리 평일이라고 도심 한복판에 있는 공원이 이렇게 적막하고 고요할 수가 있나. 한 무리의 비둘기 떼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고 분수에서 은빛 색깔의 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공원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 주차되는 것과 동시에 은아는 백에서 거울을 꺼냈다. 화장이 번지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했으니까. 아까 남자 모르게 백미러도 살펴보긴 했지만 어쨌든 불안하니까.

“거울 보지 않아도 이쁩니다. 얼른 내려요”

남자가 열려진 차창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앞장서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이 남자 봐라. 차문도 안 열어 주네? 은아가 남자를 만날 때 매너가 있는지 없는지 첫번째 요소로 꼽는 차문 열어 주기.

은아는 차문을 열고 스스로 차에서 내렸다. 별다른 섭섭함이나 노여움이 들지 않는 게 이상했다.

앞선 남자를 따라가기 위해 은아는 종종 걸음을 쳐야했다. 뾰족한 하이힐 때문에 휘청, 넘어질 뻔 하면서.

앞서서 걷던 남자가 나무 벤치를 발견하자 뒤돌아서서 은아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은아는 남자가 가리키는대로 벤치에 앉았다.

“나는 잠이 필요해요”

은아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남자가 벌러덩 은아쪽으로 누웠다. 남자의 머리가 자연히 은아의 무릎에 놓여졌다.

“잠깐이면 되니까 무릎 좀 빌려 줘요. 괜찮죠?”

“………..”

괜찮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쾌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은아는 혼란스럽다. 이럴 경우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어맛!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욧!하고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빼자니 상대방이 무안할 것 같고, 아니 무엇보다 촌스러워 보일 것 같고 그렇다고 잠자코 가만히 무릎을 내어주자니 너무 호락호락하게 보일 것 같다.

엄마가 각 상황에 따른 행동지침을 내려주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다짜고짜 무릎을 베자고 할 땐 어떻게 하라는 지시는 없었다!

네가 지금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바가 아니다, 하는 표정으로 남자가 은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잠자는 데야 호텔이 최고겠지만 첨 보는 여자에게 호텔로 올라가자는 건 무리이니까 이리로 왔지요.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한 삼십분 자고나면 세상이 달라질 테니까…….”

말을 마치자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깊은 잠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마치 늪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이 쉽게. 숨소리의 높낮이가 일정해졌다.

처음 보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금방 잠속으로 빠져드는 남자. 얼마나 피곤했으면. 은아는 남자가 측은해졌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처음 보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잠 잘 생각을 할까.

어떻게 생각하면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명색이 선을 보는 자리, 첫 대면을 하는 자리가 아닌가 말이다. 상대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어떻게 여자를 이런 식으로 대접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함부로 굴수 있을까.

공원까지 따라올 게 아니라 커피샵에서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마땅할 일이었다. 그러나 은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다 엄마때문이었다. 엄마는 지금 이 도시에 사는 친구들과 만나 지금 은아가 선을 보는 남자가 얼마나 훌륭한 조건을 갖춘 사람인지를 설명하느라 신바람이 나 있을 것이다.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어야 했다.

남자의 무례에 화나서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자리를 파하고 나왔다면 엄마가 또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실망은 둘째치고라도 엄마의 쏟아지는 잔소리를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은아는 없었다.

네가 뭘 또 잘못했길래 남자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을까. 일단 엄마는 은아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은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엄마는 또 지청구를 할 것이다. 왜 그리 넌 맹하니? 남자가 그렇게 나오더라도 살살 웃으며 일단은 받아주었어야지. 어쩌면 그 남자가 너를 시험하고 있는 줄도 모르잖니. 앞뒤 꽉 막힌 여자같이 팩, 하고 돌아서 나오면 어떡해. 이 먼 데까지 와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면 어떡하냐고. 하다 못해 몇번 데이트를 하다가 명품백이라도 한 개 얻어가지고나서 쫑을 내더라도 내야지. 아이고, 너 때문에 내가 못살아. 정말!

엄마의 쇳소리 섞인 잔소리를 듣는 것이 무섭다. 정말로 무섭다.

은아는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는 가볍게 코까지 고는 남자의 얼굴을.

못생기지도 잘생기지도 않은 남자다. 어딜 갔다놔도 튀어보이지는 않을 얼굴. 두꺼운 안경만 아니라면 전혀 의사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그동안 은아는 선이라는 제도를 통해 의사들을 많이 만났었다. 그들에겐 한가지 특징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눈빛이 매우 날카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은아의 무릎을 베고 자고 있는 남자는 눈을 거의 보지 못했다. 커피숍에 앉아 있는 동안에는 눈을 거의 반을 감고 있었기에. 그리고 지금은 자고 있기에.

은아는 어제나 오늘 아침에는 파랬을, 그러나 지금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뭇거뭇하게 수염이 자라고 있는 남자의 턱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가슴이 훈훈해지는 것을 은아는 느꼈다.

피곤한 것도 피곤한 거지만 이 남자는 내가 얼마나 편안했으면 이렇게 단잠을 잘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가슴이 더워지는 것이다.

은아는 남자의 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간절히 바랐다. 이 남자, 캐빈이 자기를 마음에 들어하기를. 그래서 에프터 신청을 해오기를. 그래서 시간을 두고 데이트를 하기를. 그래서 마침내 결혼을 할 수 있기를.

은아도 지쳤다. 주말마다 사자같이 부푼 머리에 신부화장을 하고 선 보는 자리에 끌려다니는 일이.

그리고 이제는 초조한 것도 사실이다. 은아의 나이 서른이 목전이다. 아무리 만혼이 유행이라지만 여자로서의 상품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은아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빛나게 해주던 젊음이 점점 사그러지고 있다는 것을.

바람이 잔뜩 든 공처럼 탄력있던 피부가 점점 처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비싼 아이 크림을 덕지덕지 발라도 눈가의 주름은 눈에 뜨이게 깊어만 가고 볼과 턱살이 조금씩 늘어지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대학 동창들이 어쩌면 늙지도 않고 똑같냐고 시샘어린 칭찬들을 하지만 은아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상대가 의사가 아니라도 좋았다. 성격 원만하고 밥 굶기기 않을 정도의 경제력만 갖춘 남자라면.

사실은 은아는 욕심도 야심도 없는 여자였다. 평범한 남편 만나 아들딸 낳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여자로서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여자였다.

사실 미인대회 입상경력이라는 타이틀만 빼면( 그 역시 자신의 의사로 출전한 게 아니고 엄마를 비롯한 주위의 압력때문이었다) 자신이 정말이지 별 볼일 없는 여자라는 것을 은아는 잘 알고 있었다. 고르고 따지고 할 입장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은아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 하는 듯 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지만 엄마는 은아를 최고의 신붓감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 의사, 공인회계사등 ‘사’ 자 아니면 시집을 안 보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것이다.

업어가도 모르게 곤하게 자고 있던 남자가 마침내 눈을 떴다. 남자는 눈을 뜨고도 지금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자기가 머리를 올려놓고 있는 여자가 누군지 감이 오지 않는 듯 했다. 황소처럼 몇번이고 눈을 껌벅대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불현듯 모든 것을 인지한 듯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아, 미안! 예쁜 아가씨를 앞에 놓고 잠을 자다니. 내가 실례를 많이 했네요…”

은아는 미소지었다. 엄마가 그랬지. 남자가 실수를 저질러 계면쩍어하거나 쑥스러워 할 때는 무조건 미소를 지으라고. 관대한 미소, 뭐든지 다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 담긴 미소를. 부처님같이 한량없는 자비를 담긴 미소. 모나리자같이 부드러운 미소.

“꽤 많이 잔 것 같은데……”

남자는 풀어진 와이셔츠의 윗 단추 두개를 채웠다. 그리고 은아를 향해 물었다.

“괜찮아요?”

“예……”

엄마의 메뉴얼대로라면 이제 약간 토라진 모습을 보여줄 차례였다. 그러나 은아는 엄마의 메뉴얼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진짜로 괜찮았으므로.

따뜻한 평일의 봄날 오후. 사람의 자취가 전혀 없는 호젓하고 한적한 공원. 벤치에서 잠에 빠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한가지 걱정이라면 엄마가 혹시 기대치를 높힐까,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친구들을 만나고 있지만 모든 촉각은 전화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남자랑 헤어졌어. 나 어디 있으니 데리러 와, 하는 은아의 전화가 금방 걸려오지 않는 것을 얼마나 큰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엄마는 은아의 전화가 늦으면 늦을수록 남자가 은아를 마음에 들어하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은아가 남자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을수록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시간 넘어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이루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전혀 성과가 없는 것이다.

미리 알고는 나왔겠지만 남자는 최소한 지금 은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조차도 묻지 않았다. 은아 역시 남자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물어보려면 물어볼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별로 궁금하지가 않았기에.

“점심은 먹었어요? 배 안고파요?”

남자가 물었다.

“아니요.점심 안 먹었어요. 그렇지만 배 안 고파요”

은아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다. 내려오는 차에서 이것저것 군것질을 많이 했다.

“하긴 이슬만 먹고 살게 생겼는데 배가 고프겠어요?”

남자가 한 말은 칭찬일까. 은아는 남자를 바라 본다. 정면보다는 옆 얼굴이 그런대로 보기좋은 남자다.

“일어 나요. 밥 먹으러 갑시다.

“배 고프지 않은데….”

“내 배가 고파요. 어젯밤 부터 지금까지 아무 것도 먹지를 않았더니”

맙소사. 어젯밤 부터 지금까지 굶었다니 얼마나 배가 고플까. 참 의사라는 직업도 쉬운 일이 아니야.

남자가 아까처럼 먼저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은아는 빠른 걸음으로 남자의 뒤를 따랐다.

“밥도 먹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바빠요?그렇게 많이요?”

남자가 은아를 내려다 보았다. 은아가 그리 작은 키가 아닌데도 워낙 남자의 키가 크니 어른이 아이를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고 만다.

“바쁘지 않아요”

“예에?”

“바빠서 밥 못먹은 것 아니예요”

“그..그럼?”

“한국에서 친구가 왔어요. 라스베가스에 가고 싶대서 어젯저녁에 차로 같이 갔었더랬어요.”

“………..”

“그 녀석이 처음 해보는 슬럿 머신에 정신줄을 깜빡 놓은 거라. 그래서 밥 먹을 챤스를 놓쳤어요. 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지만 혼자 먹기가 그래서…”

“그 그럼….”

“오늘 아침에야 돌아왔지요.”

“잠 한숨 못잔 채…..”

“………..”

오늘 저녁 당직근무인데 잠이 필요했어요. 토막 잠이라도…”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음을 떼놓는 남자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면서 은아는 웃었다.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구나. 잠 못자 피곤하다길래 병원일 때문인 줄 알았더니 노름장에 가서 밤을 새워서라니!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것 좀 눈 부쳤다고 한결 머리가 맑아졌네”

남자가 은아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미안해요”

남자가  미소지었다.

몸을 가까히 한 채 파란 잔디밭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 남자와 여자. 그 모습은 누가 본다해도 의심할 여위없는 다정한 연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