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로 별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은아씨가 실망할까, 무척 두려워요…..”

“…………”

“은아씨가 나를 알고 나면 저 멀리 도망가고 말 거예요.”

“…………”

“나는 음울한 실체를 가진 사람이거든요”

음울한 실체라. 음울한 실체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은아는 앞에 앉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사람같아 보인다. 술 기운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긴 하지만 전혀 심성이 나쁘거나 불량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죽거리는 듯 하나 조용한 말투와 차갑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생김새가 굳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해도 어딘가 믿음이 가고 가까이 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 평범하고 단정한 남자다.

지난 번 그 커피숍이 있던 호텔. 이번엔 지하에 있는 바이다. 남자는 진 토닉을, 그리고 은아는 맥주 한병을 앞에 놓고 앉아 있다.

“내 나이가 올해 서른 아홉이예요. 알고 있지요?”

“예에….”

은아는 남자의 얼굴에 눈을 떼지 못하면서 대답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나 은행원같아 보이는 저 깔끔하고 모범적인 모습 뒤에 도대체 어떤 실체가 숨겨져 있기에 아까부터 자꾸 실체라는 얘기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이 나이 되도록 결혼을 안 한 게 뭣 때문이라 생각해요?”

“………….”

“내가 결혼을 안 한 거라고 생각해요?은아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글..글쎄요……”

“나는 결혼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했어요”

“………..”

사실은 나 역시 그렇다, 하고 은아는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게 뭣때문이겠어요.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헐레벌떡 몇 시간씩 운전해 와서 당신이라는 남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은 나 역시 지금까지 결혼을 못해서예요. 그래서 혹시라도 선이라는 제도를 통해 꿈을 이루어 볼까, 하고 이렇게 기웃대고 있잖아요….

“대학 때 깊이 사귀던 여자가 있었어요. 결혼까지 생각했던, 내 영혼을 받쳐 사랑했던 여자였지요….”

내 영혼을 받쳐, 라는 대목에서 은아의 가슴으로 얼음 한 줄기가 지나가는 느낌이 왔다. 영혼을 받쳐 사랑한 사람이라. 왜냐면 은아에게는 여지껏 영혼을 받쳐 사랑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누구였을까. 저 남자가 영혼을 받쳐 사랑했던 여자는.

“그…그래서…”

은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 여자랑은 왜 안 됐어요?”

“여자집에서 반대했어요. 반대가 극심하니까 여자가 극복을 못하더라구요. 눈물을 머금고 놓아주었죠. 그랬더니 금방, 나랑 헤어진지 3개월만에 다른 데로 시집 가버렸어요. 내가 놓아준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요. 그녀가 나를 찬 거예요. 한 마디로 내가 채인 거지요.….”

“………..”

“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고 사회에 나와서도 그렇고 나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깡통처럼 여자들한테 채이고만 살아 왔어요. 참 불쌍한 인생이지요”

남자가 헛, 하고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명문대학 재학생이라는 타이틀만 보고, 그리고 의사라는 내 직업만 보고 많은 여자들이 다가왔지요. 그 중에는 괜찮은 여자들도 참 많았어요”

“…………”

“그 괜찮은 여자들이요. 끝까지 괜찮으려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해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실체를 밝히지 말아야 해요. 내 위로 극빈자로 사는 누나들이 셋입니다. 나한테 목을 매달고 있는 누나들이요, 하고 말하면 금방 여자들의 표정이 변해버려요.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윽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차를 마시고 밥을 같이 먹던 여자들이, 생선 가시를 발라서 내 밥 숟가락에 올려놓아 주던 여자들의 표정이 싸악 변해요. 어떻게 변하냐구요? 은아씨 혹시 한국 소설책 읽어봤나요? 한국 소설책에 이런 표현 많이 있지요? 똥 씹은 표정이더라. 바로 그 똥 씹은 표정!”

남자가 하하하, 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방금전까지 생글생글 웃으며 천사같은 미소를 짓던 여자들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싸늘해지는 것을 안 본 사람은 몰라요. 얼마나 당혹스러운지.얼마나 무서운지”

얼마나 무서운지,라고 말하면서 남자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남자의 당혹과 무서움이 이해가 될 것 같은 기분으로 은아는 남자를 따뜻하게 바라본다. 불쌍한 사람. 은아는 생각했다. 저 남자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고 싶다…….

“그쯤에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해요.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기 위해서요. 그리고 말 해요. 죽을 때까지 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덤으로 중증 뇌성마비에 걸린 여동생이 있어요. 그 아이를 평생 책임져야 해요, 하고……”

“…………..”

“그렇게 말 하잖아요?그러면 여자들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에서 아이구, 뜨거라. 이거 잘못걸렸군, 하는 걸로 얼른 바꾸어집니다. 그리고는 어떻게 1초라도 빨리 내뺄까, 궁리들을 하느라 표정들이 복잡해져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눈알들을 마구 굴린다 이 말입니다. 다음에는 정해진 순서지요. 온갖 핑계거리를 대고는 도망을 가버리는 거지요, 바람처럼 날쌔게요”

“…………”

“그런 일을 수도없이 많이 당했어요. 한 열 번쯤? 아니, 열다섯 번쯤?”

남자의 눈길이 허공을 향했다가 다시 내려왔다.

“아니, 다 합해서 스무 번쯤 되겠군. 내 인생에 스물이나 되는 여자들이 다가왔다가 그냥 떠나버렸어요”

“…………”

“ 남자의 조건과 배경이 여자들에겐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표면적인 내 배경은 최악이지만 나는 좋은 애인, 좋은 남편이 될 자신이 있어요. 그런데 여자들은 그 기회를 아예 주지도 않았어요….”

“……….”

“ 그런 일을 수없이 당하고 부터는 여자를 사귀지 못했어요. 공부하고 일 하느라 바빠서,라고 자위했지요. 그런데 이것 알아요, 은아씨?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잠자는 시간, 밥먹는 시간, 심지어 오줌 누는 시간을 아껴서라도 전화할 수 있다는 것. 여자의 얼굴을 5분 보기 위해 2시간을 운전해 갈 수 있다는 것. 공부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라는 말은 그저 핑계에 불과해요. 나는 상처받기 싫었어요. 상처받는 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여자를 만나게 되면 사랑에 빠지기 전에 얼른 경계부터 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그리고 털어놓은 습관이 생겼어요. 자, 얼른 도망 가거라. 의사라는 좋은 허울 뒤에는 홀로 된 늙은 아버지와 지지리도 가난한 누나들과 평생 짐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여동생이 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가버려라. 얼른 도망가거라……”

“캐빈씨…….”

“다 도망갔어요.한 여자도 빠짐없이 다 도망가버렸어요…그래서 나이 사십이 되도록 결혼도 못하고 결혼상담소나 전전하는 신세가 된 거예요”

“캐빈씨…..”

“은아씨도 그럴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지난 번, 첫번째 만남에 나갈 때도 아무런 기대를 갖지 않았어요. 아무 기대나 희망없이 그냥 차나 한 잔 하자,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간 거지요….”

그랬구나. 그래서였구나. 그날 봄날의 아지랑이같은 무료와 권태를 온몸으로 표출했었던 게 그래서였구나.

“그리고 은아씨를 만나서도 사실 별다른 관심도 흥미도 없었어요”

“알..알고 있었어요”

그랬더랬다, 저 남자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앞에 앉아 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러다가 공원으로 가서 한참을 잤다. 처음 만난 여자 에게 절대로 하지 못할 무례한 짓을 저 남자는 했었다.

“왜냐면 앞에서 얘기했듯이 내 사정을 듣게 되면 금방 도망 갈 여자라고 생각했기에요”

은아가 쿡, 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직 도망 안 가고 앞에 앉아 있는데요…..

“도망갈 여자에게 이런저런 정성과 예의를 차리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래서, 하고 은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차문도 열어주지 않은 거예요?기본적인 매너도 지키지 않은 거예요?”

은아의 말에 남자가 미소지었다. 그렇다는 긍정의 표시였다.

“그때 놀라왔어요. 은아씨가 별로 화내는 기색이 아니라서…”

은아 자신도 조금 놀랬다. 무엇보다도 매너를 중요시하는 은아였다. 그런데 남자가 그렇게 함부로 행동했는데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아서. 왜 그랬을까. 왜 화가 나지 않았을까. 은아 역시 남자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아서였을까

“그런데 오늘은 무척 긴장이 되네요. 은아씨에게 거절당할까봐. 거절당할 각오를 하고 왔지만요”

“…………”

“누나들이 결혼상담소에 내 결혼을 맡긴다고 했을 때 질색을 했지요.내가 어물전에 놓인 생선도 아니고 정말로 이런 식으로 해서까지 결혼하기 싫다. 그런데 누나들이 그래요. 예쁜 아가씨들을 실컷 만나는 일이 뭐가 그리 싫냐구요. 손해볼 일도 없지 않냐. 나가서 커피 한 잔만 사주면 될텐데.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처녀가 있음 잡는 거고. 그래서 누나들이 시키는대로 했어요.꼭둑각시 노릇을 그동안 잘 한 거지요. 내키지 않으면서도 억지로 . 그런데 은아씨를 만나고서는 누나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슨 뜻일까.누나들이 고맙다는 뜻은.

“은아씨는 지난 번 나를 만나러 나올 때 무슨 마음 마음이었어요? 나랑 같은 마음이었나요? 예쁜 얼굴 보여주고 그냥 커피나 한 잔 얻어 마시자는 심산으로?”

“……”

“지난 번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커피 한 잔 얻어 마시자고 몇시간 운전해 여기까지 내려오진 않았을 텐데…”

남의 얘기하듯, 마치 어제 저녁 본 연속극 얘기를 하듯 주섬주섬 혼자 얘기를 늘어놓고 있는 남자 옆으로 웨이츄레스가 다가왔다.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술 한 잔을 더 시켰다.

“은아씨같이 예쁜 여자가 결혼상담소를 통해 남편감을 찾아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가만 있어도 줄 설 남자들이 쌔고 쌨을 텐데……”

“………..”

“그나저나 은아씨. 왜 내뺄 궁리를 안 해요? 내 실체를 알았으니 얼른 도망가야 정상인데요……”

“………..”

“다시 한번 말할께요, 은아씨. 나랑 엮이는 것은 지옥의 구렁텅이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거요. 홀시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모시고 살아야 하고 가까운데 살면서 온갖 참견들을 다 할 누나들이 셋이나 있어요. 그 누나들은 지지리 궁상으로 살고 있어서 매달 적지 않은 생활비를 보태주어야 해요. 게다가…”

웨이츄레스가 주문한 술을 날라왔으므로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술잔을 받자마자 남자는 단숨에 다 들이켰다. 그 독한 술을 마치 주스 마시듯이.

“온몸이 오래된 나무뿌리처럼 비비 뒤틀린 여동생이 있어요. 똥오줌을 받아내야 하고 음식을 떠먹여 줘야 하고 생리대까지 갈아채워야 하는 여동생이 바윗덩어리같이 무거운 짐으로 내 어깨에 얹혀 있어요. 그 짐을 같이 지고 나가야 해요”

그는 멀리 있는 웨이츄레스를 손짓해 다시 불렀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또 한잔.

술을 시키고 남자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리고 남자는 앞으로 몸을 숙여 은아를 가깝게 쳐다보았다. 여지껏 냉소가 가득 차 있는 것 같던 남자의 눈빛이 바뀌어 있었다. 흐린 하늘처럼 우울하게.

“은아씨, 은아씨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대답해 봐요, 은아씨”

“…………”

“그러지 않겠다고 대답 해요. 오늘 이 자리가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는 마지막 자리가 아니라고 대답해 줘요”

은아는 대답해 주고 싶었다. 도망가지 않겠다고, 오늘 밤 열두시까지라도, 아니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같이 있겠다고 남자를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은아는 걱정이 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엄마를 마주할 일이 걱정이 된다. 지금 앞에 앉은 남자, 캐빈이 털어놓은 그 ‘실체’라는 것을 엄마가 알면 뭐라고 할 것인가. 엄마는 아마 단칼에 ‘노’ 할 것이다.

“얘, 네가 그 나이 돼 시집가서 남의 집 종살이 할 일 있니? 당장 관둬라, 관둬. 드글드글한 시누이들에다 홀시아버지, 게다가 병신 동생까지 똥오줌 받아내며 수발을 해야 한다니. 일찌감치 치워라. 너를 처녀로 늙혀 죽였으면 죽였지 그런 집으로는 시집 못 보낸다. 아이구, 그럼 그렇지. 그런 구질구질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구만. 대학병원 의사에, 괜찮은 인물에, 그 나이되도록 왜 장가를 못 갔나 했더니 역시 뭐가 있어도 있었구만. 팔리지 않은 과일엔 분명 흠집이 있다니까…..”

은아는 항변하고 싶다. 엄마, 나 역시 흠집이 있는 사람이잖아. 엄마 말대로 이혼한 언니에다 직업도 변변찮은 아버지에다 또한 내가 서른을 앞둔 나이 많은 신부감이잖아. 내가 여지껏 팔리지 않고 이러고 있는 게 흠집있는 과일이라서 그런 거잖아. 엄마, 나 처녀로 늙어 죽기 싫어. 나도 결혼이라는 걸 하고 싶어. 큰집이 아니라도 좋아.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작고 깨끗한 집에서 아이들 낳고 행복하게 알콩달콩 살아보고 싶어….

그러나 은아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집어 내어서 못할 것이다. 정말이지 죽었다 깨어나도. 엄마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감히 엄마에게 대적할 수 없으니까.

“나는 지쳤어요, 은아씨”

은아가 남자를 쳐다보았다.

“없는 시간 쪼개어 선이라는 걸 보러다니는 것에 이제 지쳤어요.똑같은 일을 영화배우처럼 반복하는 일에 지쳤어요”

남자의 얼굴은 정말로 지쳐보였다. 그리고 힘들어 보였다. 나 역시 그래요, 하고 은아는 속으로 말했다. 나 역시 인형처럼 꾸미고 선보는 자리에 끌려다니는 일에 지치고 지쳤어요…...

“은아씨”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은밀해졌다.

“내 이름 한 번 불러 줘요”

“예에?”

“그동안 난 몇번이고 은아씨 이름을 불렀는데 은아씨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요”

“…………”

“내 이름 알고 있죠?”

“예에…”

“불러 봐요. 지금”

“………..”

“빨리요. 캐빈씨, 라고 해 봐요”

“캐…캐빈씨이”

남자가 반짝, 하고 아침햇살같은 미소를 지었다. 은아는 생각했다. 미소가 참 순진하고 착해보인다……

“고마와요”

남자는 다시 앞에 놓여진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나는 정말로 두려워요.은아씨가. 당신이 그동안 내뺐던 많은 여자처럼 또 내빼버릴까 두려워요”

남자가 다시 몸을 앞으로 굽혀 은아쪽으로 얼굴을 갖다댔다. 훅, 하고 술냄새가 배인 숨결이 은아 앞으로 뿜어져 나왔다. 은아는 얼굴을 돌리지 않았다. 웬지 얼굴을 돌리면 안될 것 같아서. 얼굴을 돌리면 남자가 슬퍼할 것 같아서.

“ 아까도 얘기했지만 사실 나는 처음부터 결혼상담소를 통해 만난 여자들에게 별다른 기대를 한 적이 없었어요. 누나들이 하도 성화와 재촉들을 해서 그냥 시키는대로 선을 보러 나갔을 뿐….”

“………..”

“우리 누나들 대단하거든요. 나는누나들의 말을, 아니, 말이 아니라 명령이죠. 그들의 명령을 절대 거역할 수가 없어요. 안간힘을 쓰면 거역할 수도 있겠지만 그 뒤의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무엇보다 귀찮고 성가셔요”

“………..”

“누나들과 말싸움 하는 게 지겨워요. 그렇잖아도 신경쓸 일 천지인데 누나들과 옥신각신 싸우고 싶지 않아요. 나는 뭐든지 물 흐르듯 순탄하게 흘러가는 게 좋거든요. 그런데…”

남자가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은아씨를 만나고는 마음이 달라졌어요……”

“…………”

“은아씨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난도 무서울 게 없겠다, 물리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누나들과 피터지는 투쟁을 하라면 할 수도 있겠다…..”

은아의 가슴이 훈훈해졌다. 추운 겨울 날 활활 타오르는 난로 앞에 앉은 것 처럼.

“은아씨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달게 잔 후 돌아오는 차안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세요?”

“………”

“무릎에 곱게 포개져 있는 은아씨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 그 생각을 했네요”

은아는 얼굴을 붉힌다. 왜냐면 은아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므로.운전대 위에 걸쳐져 있는 남자의 손. 큰 키에 맞게 길쭉한 손가락. 저 손을 한번 잡아보고 싶다…..

“ 손을 잡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든 여자는 아까 말했던 그 여자 이후로 은아씨가 처음이요”

고마와요, 하고 은아는 모기소리만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와요…..

“은아씨!”

남자가 갑자기 큰 목소리로 은아의 이름을 불렀다.

“도망가지 말아요”

“………..”

“도망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줘요”

“………..”

“ 내 옆에 머물면서 지난 번 공원에서처럼 내 턱을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그렇게 쓰다듬어 줘요”

은아는 얼굴을 붉혔다. 깊은 잠에 빠진 줄 알았는데 자기 턱을 쓰다듬은 걸 알고 있었구나….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을 잠에 빠진 동안 꿈을 꾸었어요. 비를 맞으며 내가 산속의 어디엔가를 가고 있었어요. 가도가도 인가가 보이지 않는 깊고 험한 산속이었어요. 매우 습하고 더운 날씨였어요 헉헉대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맑은 물이 찰랑찰랑한 하얀 욕조가 나타난 거예요. 나는 몸에 붙어서 축축하고 찝찝한 옷가지를 훌훌 벗어제치고 욕조로 뛰어 들어 갔지요. 그리고 물속에 몸을 담그고 누워 있었어요. 그런데 어디선가 은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떼가 나타난 거예요. 그 물고기떼는 욕조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내 주위를 유영하기 시작했어요. 물고기의 지느러미가 물에 잠긴 내 몸을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했어요. 아, 편안하다,하고 느끼면서 눈을 잠깐 떴는데, 그때 은아씨가 내 턱을 쓰다듬고 있는 걸 알게 된 거예요”

“……….”

“마치 엄마의 자궁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 따뜻하고 부드러운 양수속에 잠겨 있는 느낌이었어요”

남자가 말을 끊고 은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간 충혈되어 있는 남자의 눈. 술기운 때문일까. 지난 번에는 거의 말을 하지 않던 남자가 오늘은 마치 가두어 놓았던 봇물이 터진 것처럼 말이 많다. 남자들은 다 그럴까. 아버지도 그렇다. 평소엔 묻는 말에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 아버지. 그러나 술이 두어잔 들어가면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정말이지 그렇게 편안하고 안정된 느낌은 여지껏 살면서 처음이었어요. 고마와요. 그런 느낌을 갖게 해줘서”

저도 고마와요. 처음 본 제 무릎을 베 줘서, 하고 은아는 말하고 싶었으나 입술만 달싹거려질 뿐이다.

“은아씨가 미리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남자가 자신의 술잔에 술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앞에 놓인 은아의 맥주를 가져다가 한모금 마셨다. 은아가 거의 입에 대지 않은 맥주를.

“아니, 한가지 물어봅시다. 은아씬, 나에 대해 뭘 알고 있어요?”

갑자기 공 던지듯 넘어온 기습적인 질문에 은아는 당황했다. 글쎄요. 제가 캐빈씨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뭘까요. 결혼상담소에서 알려준대로 나이, 직업 그리고 형제가 몇인가 하는 정도….

“내가 모셔야 할 홀아버지에 부양해야 할 누나들, 그리고 장애자 동생이 있다는 걸 말했죠. 그거말고 또 있어요!”

남자가 킬킬거리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는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인 몸짓으로 뒤로 쓸어 넘겼다.

“내가 앞으로 갚아야 할 빚이 있어요. 얼만 줄 알아요? 십만불이 넘어요”

“빚이요?”

“그래요. 빚, 공부하느라 빌려 쓴 학자금 빚이요”

“예에….”

은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결혼상담소에서는 캐빈의 수입만 얘기해 주었지 빚이 있다는 것 까지는 밝혀주지 않았었다.

부모의 경제사정이 넉넉치 못한 학생들은 빚을 내어 공부한다는 걸 은아도 알고 있다. 그 학자금 빚을 십만불이나 넘게 캐빈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은아가 공부나 학위에 욕심이 있었더라면 은아도 캐빈처럼 빚을 잔뜩 짊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면 은아의 부모는 도저히 은아를 대학까지 공부를 시킬만한 재력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러나 은아는 공부에 별다른 관심이나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를 끝으로 공부를 중단했다. 백화점 점원, 모델 등을 전전하면서 간신히 낙제를 면한 학점으로. 그리고 졸업후 미국회사 리셉션니스트로 일하고 있다. 아무런 비젼도 없는, 월급도 적은. 그러나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왜냐면 은아는 좋은 아내, 좋은 엄마로 살림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으므로.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알뜰하게 살림만 하는 전업주부가 되는 게 꿈이었으므로.

“처음엔 뇌 전문의가 되려고 했었어요. 거미줄같이 복잡하고 섬세한 뇌의 기능과 구조를 연구하는 일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요. 그러나 뇌 전문의가 되는 길은 너무나 힘들었어요. 무엇보다 긴 시간과 돈을 필요로 했어요.

한 2년 공부하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진로를 바꾸었지요. 왜냐면 나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가족들이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언제까지나 내 꿈을 이루기 위해 욕심을 부릴 수 없었지요. 어쨌든 공부를 마쳤고 나는 의사가 되었어요. 통증전문 의사. 매일 낮과 밤을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보는. 그들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비명을 질러요, 아이고. 아파요!나 좀 살려줘요!나 좀 안 아프게 해 줘요! “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눈에 선하다는 표정으로.

“울고 소리지르고 화내고 신음하는 환자들을 봐주고 돈을 벌어요. 그렇게 벌어서 가져가는 돈이 한 달에 만불이 좀 넘어요”

만불이라. 은아는 속으로 계산을 해본다. 만불을 넘게 가져가려면 그로스(Gross)로 얼마를 벌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은아씨, 그 돈이 일주일이면 없어져요.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요”

남자는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쉬지 않고 속삭포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은아가 미처 감당할 틈도 없이.

“돈 들어오는 구멍은 한 군데밖에 없는데 나갈 구멍은 수 군데 , 아니 수십군데니까요..”

어쩌면, 하면서 남자는 은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두눈에서 어떤 뜨거운 기운이 뻗어져나오는 것 같아서 은아는 얼른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어쩌면 은아씨가 꿈구는 샤넬백은 아마 평생 구경을 못할지도 몰라요. 그래도 좋다면…”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결심한 듯이 말했다. 단어 하나하나를 힘주어 딱딱 끊으면서.

“그.래.도. 좋.다.면. 나.랑. 결.혼. 해.요.”

“캐빈씨…”

“내일은 토요일이예요. 출근 안 해도 되죠?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요. 나랑 같이 자요”

“캐빈씨…..”

“조금 취하신 것 같은데요”

“제발 도망가지 말아요, 은아씨”

캐빈이 탁자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은아쪽으로 내민다. 은아의 손을 달라는 뜻이다. 은아는 조금 망설이다가 캐빈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는다. 은아의 손이 놓이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왈칵 움켜잡는 남자. 남자의 손은 데일 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힘차고 우왁스러웠다.

“우리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첩첩산중이요.”

“………..”

“우리 누나들, 욕심이 아주 많아요.은아씨를 탐탁찮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요”

그 남자는 그렇게 은아에게 청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