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아는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긴 한숨이 저절로 내쉬어졌다.

어제나 그제나 별로 다르게 보일 게 없는 얼굴, 그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보기 끔찍하다. 꿈에 나올까 무섭게 형편없이 못생겨 보이는 것이다.

얼마전부터 자리잡기 시작하던 이마의 주름 두어개가 오늘따라 더욱 굵어 보인다. 마치 깊은 도랑이 패여 있는 것 같다. 유난히 숱이 많은 눈썹은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지 오래되어서인지 비뚤비뚤하게 함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제멋대로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로 뒤덮힌 밭두렁 꼴이다. 슬슬 처지기 시작하는 눈두덩이 살은 오늘따라 더욱 더 처져 눈을 덮는다. 그나마 작은 눈을 더욱 더 작게 만들고 있다. 입가에 새겨진 팔자주름과 놀부의 심술보같은 양볼은 그 무슨 짓을 해도 올라붙을 생각을 않겠다는 듯 완강하게 늘어져 있다. 게다가 양볼과 턱과 이마에는 노란 고름을 품은 뾰루지까지 대여섯개 솟아나 있다.

금아는 세면대 옆에 쭈욱 세워진 화장품통과 병을 하나하나 들어 올려서 성분과 용도를 살펴 본다. 어떤 것을 발라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아서이다. 얼굴에 맞는 것을 발라본지 하도 오래되어서. 그동안은 얼굴을 씻고 손에 집히는대로 대충 발라왔던 것이다.

아무려면 어때. 얼굴만 안 당기면 되지.

언젠가 한번은 헤어 영양제를 얼굴에 퍼바른 적도 있고 스타킹 신고 뿌려주는 정전기 방지제를 손등과 얼굴에 바른 적도 있다. 갑자기 얼굴이 정신없이 가렵기 시작해서 얼른 가서 얼굴에 발랐던 병의 라벨을 자세히 읽어 보니 헤어 영양제였고 정전기 방지제였다.

이것저것 살펴보던 금아는 그 중에 모이스춰 크림이라고 쓰여진 통의 두껑을 연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듬뿍 내용물을 덜어서 얼굴과 목에 처덕처덕 바른다.

그녀는 두 손바닥으로 원을 그리듯 얼굴을 꼼꼼하게 문지른다. 단 한방울의 크림도 겉돌게 하지 않고 전부 얼굴에 스며들게 하겠다는 작심을 한 사람처럼. 오랜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같이 푸석푸석하던 얼굴이 크림이 발라지는 것과 동시에 번들번들 윤기를 내기 시작한다.

한참을 얼굴을 맛사지하던 금아는 문득 손길을 멈춘다. 그리고 다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몇년을 가꾸지 않아 거칠대로 거칠어진 얼굴에 크림 발라 맛사지를 한다고 해서 금방 고와지고 촉촉해질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그나저나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지. 관두자 관둬…..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금아는 얼굴을 맛사지하던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크림이 대충 얼굴에 스며든 것을 확인한 금아는 서랍을 열어 브러쉬를 꺼냈다.

사실 얼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머리였다. 몇년간 미장원에 가지 않고 대충 집에서 가위로 자른 머리. 풀고 있으면 사자처럼 천지사방 제멋대로 뻗치는 머리. 숱이 많아 핀을 두세개 찌르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두껍고 억세고 거친 머리.

금아는 일단 물을 칠해 꼼꼼하고 찬찬하게 빗어 내린다. 그리고 무스를 발라 잔머리를 올려 부치고 고무줄을 이용해 뒤로 묶는다.

그런 다음 고개를 앞으로 빼 거울을 본다. 넙대대한 얼굴하나가 거울 가득 들어 있다. 잔머리 하나 없이 얼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 아무런 표정없이 무뚝뚝한 얼굴. 마치 무당 같다.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머리를 풀어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당같거나 말거나, 점쟁이 같거나 말거나 다른 선택이 없다.

이제는 옷을 갈아입을 차례다. 금아는 전화기의 액정화면에 뜬 시간을 확인한 다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전화기를 침대에 던지고 여섯개로 구성된 서랍장을 하나하나 열어 본다. 서랍장을 다 열어 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까. 선뜻 손에 잡히는 옷이 없는 것이다. 모두 사이즈가 안 맞는 옷들뿐인 것이다. 금아는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 본다. 고무줄로 허리가 마감된 무릎 나온 펑퍼짐한 바지와 목 분이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있는 자신의 차림새를.

그동안 시간도 많았는데 쓸만한 옷이라도 한 벌 사놓을 걸…

생전 외출 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생전 좋은 옷을 입을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미단이 외에는 사람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금아는 한숨을 쉬면서 서랍장 맨 아랫부분에서 청바지를 한벌 꺼낸다. 이혼 직후 바람이나 쐬자는 미단이에게 억지로 끌려나가 산 청바지. 한벌에 100불이 넘는, 프리머엄 청바지.

당연히 맞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 찐 살이 얼만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거울 앞으로 가서 입고 있던 고무줄 바지를 벗어 팽개치고 청바지를 입어 본다. 그러나. 허벅지에 딱 걸려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 청바지. 그럼 그렇지.

금아는 울고 싶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나. 살이 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줄은 몰랐다. 허리 사이즈 30인 청바지가 안 맞을 줄 몰랐다.

배에 힘을 주면서 청바지를 애써 위로 끌어 올려보던 금아는 체념한 듯 도로 벗어 젖힌다. 그리고 결심한 듯 침대에 던져두었던 전화기를 집어든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약속을 취소할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뭐라고 핑게를 대나.

아예 처음부터 나가지 않겠다고 할 걸. 아니, 어쩔수 없이 약속을 하긴 했지만 미리 전화해서 취소할 걸. 약속시간 1시간 전에 못간다는 전화를 하다니.

금아는 전화기를 들고 액정화면을 내려다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그 남자, 정기훈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세번 신호가 가고 정기훈이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예요. 좀 있으면 만날 건데 전화를 하고? 설마 나오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이 남자는 어떻게 남의 속을 이렇게도 잘 꿰뚫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서 금아는 다시 조금 망설인다. 아무리 막가는 인생이라지만 약속시간 1시간 전에 전화해서 취소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저……”

“진짜 웬일이요? ”

“……..”

“왜 전화했어요. 오늘 못 나와요?”

정기훈의 재촉에 금아는 입술을 깨문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 이 남자를 내가 다시 볼 거라고. 금아는 생각했다. 뻔뻔해지자. 그리고 대답했다.

“예……”

금아의 대답에 정기훈이 헐~하고 수화기 저쪽에서 풍선에 바람빠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 한숨같은, 탄식같은 소리. 어이가 없다는 표시이리라.

금아는 내친김인데 뭐, 하는 기분으로 얼른 다음 말을 잇는다.

“나갈 수가 없게 되었어요. 사정이 생겼어요. 그렇게 되었어요.”

“……….”

“미안하게 됐어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기훈이 묻는다. 이유가 뭐요?

“……….”

“이유가 뭐냐고?”

“이유?…이유 없어요. 그…그냥”

“그냥?”

“ 예, 그냥 나가기 싫어졌어요”

“뭐요?”

몸에 맞는 옷이 없어서 나갈 수가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금아. 창피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되는대로 살아온 금아다.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금아다. 그런데 살이 너무 쪄서 그동안 입던 옷들이 전혀 맞지가 않는다고 말하기가 망설여지는 금아.

“그러지 말고….”

정기훈의 목소리가 부드럽다. 유치원생을 타이르는 선생님처럼, 봄바람처럼 부드럽다.

“얘기를 해 봐요. 갑자기 나오지 못할 이유가 뭔지.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

“차편이 없어요?”

“………”

“원한다면….”

정기훈이 잠깐 뜸을 들이듯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원한다면 내가 지금 그리로 갈 수도 있어요”

“………..”

“내가 그리로 갈까요?”

“……….”

“커피 한 잔 줄래요?”

“……….”

“아줌마가 타주는 커피가 아주 맛있던데……..”

금아는 잠시 망설이면서 생각한다. 오라고 할까?

집안은 적막감만 감돌고 있다. 은아와 아버지는 출근했고 엄마는 친구와 미장원으로 머리를 하러 간다고 조금 전에 외출했다.

정기훈이 온다고해서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내가 깐 마루가 얼마나 근사한지 다시 확인도 해 보고 싶고…”

그래요. 그럼 저희 집으로 오세요, 하고 말 싶은 걸 억지로 참으면서 금아는 엄마를 떠올린다. 이유없이 정기훈을 집으로 불러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머리하러 간 엄마가 혹시라도 일찍 돌아온다면. 엄마의 의혹에 찬 눈초리를, 폭포같은 잔소리를 듣는 것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일이니까.

“실은……”

금아는 솔직하게 털어놓아야겠다고 생각 했다.

“실은 몸에 맞는 옷이 없어요. 옷이 없어서 나갈 수가 없어요”

아까처럼 헐~하고 정기훈이 수화기 속으로 탄식같은 소리를 냈다. 이번에 좀더 크고 길게.

“이봐요, 아줌마”

톤이 조금 올라간 목소리로 정기훈이 말했다.

“그럼 여지껏 뭐 입고 있었는데?"

“……….”

“나 아줌마랑 데이트 하자는 것 아니야”

금아의 얼굴이 귀밑까지 확, 붉어진다. 아, 얼마나 다행일까. 전화라는 물건은 상대방의 얼굴을 서로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무슨 옷을 입고 나오든 나랑은 상관없어요. 홀랑 벗고 나오지만 않으면 돼요. 아니 벗고 나와도 괜찮아….”

“………..”

“난 또 뭐라고. 나오지 못한다는 이유가 고작 그런 거였어?"

금아는 울고 싶다. 정말이지 울고 싶다. 고작이라니. 당장 죽고 싶을 만큼 참담한 심정인데 고작이라니.

“나와요, 지금. 일단은 나와요.”

“………”

“아줌마 사는 동네 입구 들어가는 길목에 작은 공원있지요? 그리로 와요. 나 지금 집에서 떠날 테니까 15분 정도면 도착 할 거야. 거기서 만나요.”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자기 할 말만하고 정기훈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금아는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

정기훈이 자기랑 데이트를 하려고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기훈은 다시 한번 그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었다. 그러면, 데이트가 아니라면, 그러면 뭐하려고 나를 만나자고 했을까. 뭐하려고 커피집에서 만나자고 했을까. 무슨 할 말이 있어서. 그나저나 데이트가 아니라고 했지.데이트가 아니라고.

모욕감으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이 딱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금아는 팔짱을 끼고 서 있다가 황급하게 몸을 돌려 닫았던 서랍장 중 한 곳을 다시 연다. 그 칸에는 츄리닝이 있다. 지난 겨울 내내 입었던 츄리닝. 지금 입고 있는 얼룩덜룩한 촌스런 무늬가 어우러진 고무줄 바지보다는 그래도 츄리닝이 나을 것 같다.

목이 늘어진 티셔츠를 벗고 츄리닝으로 갈아입으면서도 궁금증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럼 뭐지?데이트가 아니라면 왜 나를 만나자고 했지?

융으로 된 츄리닝은 두꺼운 겨울용이다. 입자마자 답답한 기분에 숨이 막힐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 외에는 입을 만한 것이 정말로 하나도 없다.

금아는 겨울 츄리닝을 입고 있는 자신을 화장대 거울로 비추어보면서 되내인다. 데이트도 아닌데 뭐. 데이트도 아닌데 뭘 입으면 어때.

이럴 때는 엄마와 은아의 몸매를 닮지 않은 자신이 원망스럽다. 몸매가 같다면 엄마와 은아의 옷을 빌려입어도 되련만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평생을 같은 몸무게를 유지하고 있는 엄마, 그리고 허리 사이즈 22를 넘지 않은 은아가 이럴 때는 무척 부럽다.

현관 신발장에서 슬리퍼를 꺼내려던 금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운동화를 집어든다. 차를 타고가기보다 걸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집에서 공원까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30분 정도면 갈 수 있을 것이다. 날이 좀 덥긴하지만 30분 정도는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정기훈이15분안에 도착한다고 했었다.

조금 기다리라지 뭐. 기다리기 싫으면 가버릴 것이고.

금아는 신발장 안에 처박혀 있는 모자를 꺼내 먼지를 털면서 중얼거린다.

가버린다 해도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나 금아는 확신한다. 정기훈이 15분 정도는 기다려주리라는 것을. 가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냥 그런 확신이 든다.

운동화를 신으면서 금아는 집안을 쓰윽 훑어본다. 칙칙하고 어두운 색깔의 카페트가 걷혀지고 밝은 색 마루가 깔린 실내는 보기만으로도 쾌적하고 시원하고 환하다.

본인이 하는 일 외에 남이 하는 일 전부를 성에 차 하지 않은 엄마도 이번에는 아주 좋아했다. 집이 배로 넓어 보인다면서. 그동안은 남부끄러워서 집에 누구를 초대 못했는데 이제는 마음놓고 손님을 불러도 되겠다면서.

엄마가 만족해 하는 모습에 금아도 내심 흐뭇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제대로 못한 딸 노릇, 이제 좀 한 것 같아서.

어쨌든 그 남자, 정기훈은 일 하나는 깔끔하게 잘 마무리 해주었다. 같이 작업하기로 했던 멕시코인 인부가 개인적인 일로 합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정기훈 이 혼자 하느라 예정일보다 이틀 정도 더 기간이 소요되긴 했지만, 예상했던 액수보다 조금 가격이 비싸지긴 했지만.

그랬기에 사실 정기훈이 만나자는 말에 내키지 않기는 했지만 ‘예스’를 한 금아였다. 내심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열쇠로 현관문을 잠그고 금아는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이 아니라 출근하는 사람도, 등교하는 학생도 없는 주택가 길은 한적하기만 하다. 길 반대편으로 흑인 여자가 하얀 강아지를 앞 세우고 걷다가 금아를 보자 하이, 하고 인사를 한다. 금아도 손을 번쩍 들어 답례를 한다.

이렇게 대낮에 걸어본 게 언제였던가. 밤에 담배를 사러 편의점으로 걸어다닌 적은 있지만 낮에 해를 머리에 이고 걸은 적은 이혼하고 엄마집으로 들어와서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얘, 햇볕을 하도 오래 안 봐서 네 얼굴이 너무 하얗다. 아주 창백해 보여…..”

미단이는 하얗고 창백하다고 표현했지만 금아는 안다. 자신의 얼굴이 누렇게 떠 있다는 사실을. 매일 피워대는 담배와 죽어라고 마셔대는 술에 절어 죽을병 걸린 사람같이 초췌하고 괴기스러워 보인다는 사실을.

아무려면 어때. 곧 죽어버릴 건데.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무릎이 아파온다. 금아는 양쪽 다리에 무게를 번갈아가며 실으며 겅중겅중 뛰어 본다. 그러다가 제 자리에 서서 줄넘기를 하듯 서너차례 위 아래로 뜀뛰기를 해본다. 그래도 무릎은 아프다.

두어달전부터 가끔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담배나 술을 사러 편의점까지 걸어 갔다 오는 게 힘들 정도로.

인터넷에 들어가 서치해 보니 운동부족이라고 했다. 거의 매일을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게 일인 금아. 운동부족인 게 당연했다.

길 건너편에서 동양인 할머니가 강아지를 데리고 걸어 온다. 이번엔 까만색 강아지다. 가만 보니 길을 걷는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강아지들을 데리고 있다.

나도 강아지가 한 마리 있었으면 좋으련만. 강아지가 있으면 강아지 산책을 핑게로 매일 동네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매일 좀 걸으면 무릎 아픈게 나으려나. 살이 좀 빠지려나.

무릎이 아픈 건 육중한 몸무게 때문인 것 같다. 몸무게를 지탱하기가 힘겨워서 무릎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금아는 고개를 돌리고 자신을 지나쳐 멀어져가는 할머니와 강아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 본다. 저렇게 나이든 사람도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는데 젊디젊은 내가 너무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밀려와서.

그러나 곧 운동하면 뭘 해, 곧 죽어버릴 건데, 하는 생각이 떠올라 금아는 고개를 흔든다. 그러다가 금아는 다시 앞뒤로 팔을 흔들며 걷기 시작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은 오늘은 운동하는 기분으로 걷자, 는 생각을 하면서.

밝은 햇볕 아래 산책하는 사람들을 보니 문득 생동감이 드는 것이다. 아직은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금아는 천천히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곧 숨이 차서 뛰기를 멈추는 금아. 제 자리에 서서 숨을 고른 다음 다시 뛰기 시작하는 금아.

그렇게 뛰고 걷고 제자리 걸음을 반복하면서 금아는 동네 공원에 도착했다. 그동안 차로 지나치기만 했을 뿐 한번도 와 보지 않았던 동네 공원. 사실은 공원이라고 이름붙이기도 민망한 곳이었다. 벤치 두개, 그리고 잔디밭과 나무와 꽃나무들만 조금 심어져 있을 뿐인 작고 협소한 공원.

미리 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정기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금아는 공원의 모습을 한바퀴 둘러본 후 벤치로 가서 앉았다. 등과 목은 땀으로 젖어 있었고 다리를 비롯한 온몸이 뻐근하고 아팠다.

두꺼운 겨울용 츄리닝이 갑옷처럼 에워싸고 있는 것 같이 답답해서 금아는 지퍼를 열고 활짝 앞섶을 열어 제친다.

그것 좀 움직였다고 이렇게 온몸이 아프다니. 확실한 운동부족이다, 라고 금아는 생각했다. 많이는 말고 일주일에 한두번은 이 공원으로 산책을 와야겠다. 가능하면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이 좋겠지…..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은 건강한 모습으로 죽는 것도 괜찮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 남자는 왜 아직 안오지?

금아는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11시 40분이었다. 집에서 정기훈과 통화할 때가 11시 쯤이었다. 벌써 40분이 지나있었다.

분명 이 공원이라고 했는데. 금아는 공원안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때 공원 파킹 랏으로 검은 색 트럭 하나가 천천히 들어왔다. 트럭 문이 열리고 내리는 남자는 정기훈이었다. 정기훈의 손에는 종이컵 두개가 들려 있었다.

“커피 사 왔어요”

정기훈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컵 하나를 금아에게 내밀었다.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몰라서 블랙으로 달라고 했는데 괜찮죠?”

“예에…….”

아무려면 어떤가. 금아는 정기훈으로부터 컵을 받았다.

“크림과 설탕도 가져왔으니 필요하면 말해요”

정기훈이 청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팩 을 수북히 꺼내 벤치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크림 줄까요?아니면 설탕을?말만 해요. 다 대령할 테니까”

“괜찮아요”

“아! 그리고 커피,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 해요”

종이컵 두껑을 벗기는 금아를 보면서 정기훈이 말한다. 친절하기도 해라, 이 남자는.

아닌게 아니라 커피는 입술을 델 듯 뜨겁다. 금아는 하릴없이 커피를 입으로 후후 불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이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왜 아줌마를 만나자고 했는지?”

후후 분 커피를 두어모금 마시고 났을 때 정기훈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궁금하지요?”

“……..”

“말 해 봐요, 궁금한지 안 궁금한지”

궁금하긴 궁금하다. 일주일에 걸친 마루공사를 마치고 체크로 공사대금을 지불했다. 그걸로 깨끗히 거래가 끝난 줄 알았는데 사흘 후 정기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겠냐면서.

“잠깐이면 돼요. 30분? 아니, 한 시간 정도?”

정기훈의 제의에 금아는 한참을 망설였다. 이 남자랑 다시 얼굴을 봐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일주일동안 마루공사를 하는 정기훈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별로 말이 없는 남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에게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일하는 도중 잠깐씩 휴식을 취하는 정기훈에게 두어번 커피를 갖다주면서 다시 미단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러나 정기훈은 그 어떤 관심이나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사귀는 사람이 있어서 그러냐고 물어봐도 정기훈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금아는 미단이를 정기훈에게 소개시켜주겠다는 생각을 단념했다.

그게 다였다. 정기훈과 대화를 나눈 것은. 그런 그가 만나자는 전화를 해왔으니 금아가 망설인 것은 당연했다.

약속 시간과 장소까지 정해주면서 재촉을 해도 금아가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마침내 정기훈이 말했다.

“비싸게 굴지 말고 빨리 대답해요.나올 건지 말 건지”

비싸게 굴지 말란 말에 금아의 웃음보가 터졌다. 하하하, 하고. 하하하 웃으면서 금아가 말했다.

알았어요. 나갈께요…..

금아는 정기훈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나를 다시 볼 이유가 없는데요…...

“커피 콩 가는 소리 요란하고 사람들 대화소리로 시끌벅쩍한 커피집보다 여기가 조용하고 더 좋네”

정기훈이 다 마신 종이컵을 우그러뜨리면서 혼잣말처럼 말했다.

“햇빛이 좀 뜨겁긴 해도 말이지…..”

커피를 다 마실 동안 금아를 바로 쳐다보지 않던 정기훈. 정기훈이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면서 금아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아줌마”

“……….”

“아줌마라고 불러서 기분 나빠요?”

“………”

뭐라고 부르거나 말거나.

금아는 얼굴을 찡그린다. 왜 만나자고 했는지 빨리 용건을 꺼내지 않고 미적거리기만 하는 정기훈이 불편한 것이다.

“기분 나쁘면 나쁘다고 말해요.이름을 불러줄께요”

“………”

“나 아줌마 이름 아직 기억해요. 금아라고 했지요. 이름은 참 예쁘네”

말해놓고 정기훈은 혼자 킬킬대고 웃었다.

웃거나 말거나. 금아는 컵에 코를 박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참 맛있다…..

금아는 커피를 마시고 정기훈은 담배를 피운다. 정기훈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코끝으로 다가 온다. 향기로운 담배 냄새. 금아는 담배를 피우고 싶다. 그러나 정기훈에게 담배달라는 요청을 했다간 다시 어쩌고 저쩌고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고 만다.

묵묵히 담배 한개피를 다 피운 정기훈. 금아도 커피를 다 마셨다. 이제 할 일이 없다.금아는 고개를 들어 먼산을 쳐다 본다.

“금아씨!”

정기훈이 금아를 불렀다. 금아가 고개를 돌리자 정기훈은 금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지금부터….. ”

여지껏 장난기가 가득하던 정기훈의 표정과 말투가 바뀌었다. 진지하게.

“지금부터 내가 그 어떤 기분나쁜 말을 하더라도 화내지 말아요”

“……….”

“화 안 낸다고 약속 할 수 있어요?”

금아는 고개를 끄덕했다. 내가 이 남자에게 화 낼 일이 뭐가 있겠나. 그 어떤 모욕적인 언사를 한다 해도 화내지 않을 것이다. 화내고 자시고 할 기운도 열의도 성의도 없다.

금아가 고개를 끄덕하자 정기훈은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청바지 주머니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정기훈은 그 봉투를 금아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