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하지 말아요….”

스탑 싸인에서 잠깐 차를 멈추었던 남자가 왼쪽으로 핸들을 돌려 차를 출발시키면서 말했다. 은아와 눈을 맞추면서.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은아씨, 진짜 실망하면 안돼요”

남자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만나 집으로 가는 삽십여분 남짓한 시간에 다섯번째나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실망하지 말라고. 실망하지 말라고. 실망하지 말라고. 자신의 실체에 대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실망하지 말라고…..

만날 때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 남자. 처음 만난 여자의 무릎을 베고 낮잠에 빠져들던 그 호기로운 남자는 어디로 갔을까. 이 남자한테는 나를 잃게 되는 게 그렇게 두렵고 무서운 일일까. 그래서 자꾸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당부를 해대는 것일까.

은아는 남자가 가엾다. 앞으로 보여주게 될 집과 만나게 될 가족들이 혹시라도 마음에 안 차서, 그러니까 남자의 말대로 실망해서 떠나버릴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하고 있는 남자가 불쌍하고 가엾다.

그렇다. 좋지 않은 환경은(좋지 않은 환경과 좋은 환경이란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을 낮고 처지게 한다. 그리고 소심하게 만들고 자신감없이 만든다. 은아는 남자의 두려움과 초조감이 이해가 됐다. 은아 역시 만사에 자신감이 없었다. 내세울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기에. 별볼일 없는 집안과 직업과 학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은아는 남자를 곁눈질로 바라본다. 바깥이 어두웠으므로, 남자가 앞만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자세히 관찰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은아는 안다. 남자의 얼굴이 긴장으로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다는 것을.

은아는 핸들을 잡고 있는 남자의 두 손을 보았다. 그리고 망설였다. 저 손을 잡아 줄까. 저 손을 잡아주면 좀 안심이 되려나.

그러나 은아는, 모든 일에 소극적이고 자신감이 없는 은아는 생각만 할 뿐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그렇지만 은아는 입을 열어 말한다. 실망하지 않을께요, 라고.

은아의 대답에 남자는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미소 짓는다. 어둠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이, 그 하얀 이가 눈부시다.

차는 오래된 주택가로 들어섰다. 어른 몸 만한 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는 걸로 봐서 그리고 불빛에 드러나는 주택들의 형체들로 봐서 형성된지 아주 오래된 동네같다.

“이제 다 왔어요, 우리집. 저기 이층집 앞에 하얀색 밴이 보이죠?오, 까만색 승용차다 있네. 아마 셋째 누나 차일 거예요. 최근에 까만색 차를 샀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남자의 차는 양쪽으로 차가 즐비하게 주차돼 있는 한 이층집 앞에 멈추어 섰다.

“여기예요”

은아는 차창밖으로 고개를 빼 이층집을 올려다 보았다. 이층엔 불이 꺼져 있었고 아래층엔 창문마다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은아의 마음이 푸근해졌다. 노란 불빛. 은아가 좋아하는 행복한 가정의 상징이 노란 불빛이었다.

이 남자와 잘 되게 되면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면, 이 이층집에서 내가 살게 될 거란 말이지. 지금처럼 저녁이면 노란 불을 켜놓고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맛있는 저녁밥을 지어놓고 이 남자, 캐빈을 기다리게 될 거란 말이지…….

다왔어요, 해놓고, 그리고 차의 시동을 꺼놓고도 캐빈은 선뜻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냥 앞만 보고 앉아 있을 뿐. 그의 두 손은 여전히 운전대에 열시와 세시 방향으로 걸쳐져 있다.

“오늘은 세 누나들과 여동생,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게 될 거예요.매형들과 조카들은 다음에……”

“예….”

은아가 백미러를 통해 얼굴을 점검한 후 핸드백을 고추들고 내릴 채비를 마쳤는데도 캐빈은 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내려요……”

은아가 말했다. 은아의 말에도 캐빈은 미동을 하지 않았다.

“저는 준비가 다 됐어요. 내려요”

재차 은아가 재촉을 하는데도 꼼짝없이 앉아 있는 캐빈. 마침내 은아가 캐빈의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그리고 가만가만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집 역시 만만치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

“ 저희가 사는 집은 지은지 백년이나 되는 아주 낡고 더럽고 허름한 집이예요. 얼마전에 언니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많은 돈을 들여 마루를 깔았어요. 이제야 조금 집꼴을 갖추었지요. 전엔 몇십년은 된 것 같은 더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거든요. 바닥에 앉아 있으면 온갖 벌레들이 스물거리며 몸위로 기어 올라오곤 했었지요”

“……….”

“전 이층집에 살아보는 게 꿈이었어요. 어쩌면 제 꿈이…제 꿈이 이루질지도 모르겠네요”

은아의 말에 남자의 몸이 흠칫 움직였다. 그동안 예, 아니오 단답형으로 의사표시를 하던, 그 무슨 말을 해도 별다른 감정의 높낮이를 드러내지 않던 은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어렵다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심중을 표현해서 무척 당혹스럽다는 몸짓이다.

“정…정말이예요……어릴 때부터 이층집에서 살고 싶었는데…그랬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말해놓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말을 뱉은 데 대해 후회는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라도 그동안 감추고 있던 의사를 표시한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남자가 자신의 손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지고 있는 은아의 손을 잡았다.

“고마와요, 은아씨. 그렇게 말 해줘서 고마와요….”

남자의 목소리에 축축하게 물기마저 묻어 있다.

“지금부터 만나게 될 캐빈씨의 가족들, 그러니까 아버지와 여동생과 세 누나들. 제가 지금 캐빈씨를 생각하듯 귀하게, 그렇게 귀하게 생각할께요.”

“은아씨….”

“절대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말아요”

입을 열기가 어렵지 한번 입을 열고 나니까 누에꼬치 꽁무니에서 명주실이 나오듯 쉽게 술술술 말이 나온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말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머리로 가슴으로 생각하고 있던 말들이.

“이제 나가요”

은아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캐빈도 뒷자석에 던져 놓았던 쟈켓을 집어들고 차밖으로 나갔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열려진 문으로 회색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여자 하나가 바깥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는 곧 캐빈과 은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여자는 다시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도착을 알리려고 다시 들어 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회색 원피스와 함께 다른 두 명의 여자가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몰려나왔다.

누나들이구나, 하고 은아는 속으로 짐작했다. 캐빈이 늘 말하던 세명의 누나들. 하나같이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 매달 생활비를 보태주어야 한다던 그 누나들.

“아..안녕하세요…”

은아가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누나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은아를 에워쌌다.

“ 올 때가 되었는데 이상하다 싶어 바깥에 나와봤더니 웬 선남선녀가 나란히 걸어들어 오고 있지 않겠어?누군가 봤더니 우리 캐빈이야. 그리고 우리 올케가 될 은아라는 아가씨야!”

“아이고, 예뻐라. 미인 대회 출신답게 참 예쁘고 곱네”

“그러게. 이 하얀 살결 좀 봐”

“먼데서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그래, 배고프겠다. 얼른 들어 가자”

“하루종일 일 하고 퇴근하자마자 예까지 운전하고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른 밥 먹어야지”

“아니야. 아버지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그러네. 먹는 게 급하긴 하지만 아버지한테 인사하는 게 예의지”

여자들은 앞다투어 한 마디씩 했고 은아의 어깨를 감싸 안아보고 손목을 잡아보고 팔짱을 껴보았다.

은아는 누나들에게 양쪽으로 팔 하나씩을 잡혀 집안으로 들어섰다. 불고기와 닭도리탕과 고등어 조림과 꽁치 굽는 냄새등 여러가지 음식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냄새가 은아의 코끝을 자극했다.

“은아씨, 일단 이쪽으로 앉고”

“아니야. 그쪽엔 아버지가 앉을 자리니까 이쪽으로 앉게 해”

“그으래, 맞아. 그 쪽엔 아버지가 앉으셔야지 미국에서 상석이 어느쪽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그쪽이 이 거실의 중앙이니까”

“얘, 얼른 들어가서 아버지 나오시라고 해. 고대하시고 고대하시던 며느릿감이 드디어 도착했다고 빨리!”

“어, 조금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여기 계셨는데 금새 어딜 가셨지?’

“새 며느리릿감 도착한 걸 아시고 거울 보러 가셨어. 혹시라도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옷깃이라도 흐트러져 있을까봐”

“아버지도 참. 별 게 다 신경이 쓰이셨나보네”

세명의 누나들은 캐빈과 은아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쉬임없이 떠들고 웃었다. 원래 명랑하고 쾌활한 천성들인 것 같았다.

은아는 정신이 없었다. 캐빈이 이쪽이 큰누나와 둘째 누나, 그리고 셋째 누나라고 은아에게 소개를 시켜주긴 했지만, 혹시라도 얼굴을 헷갈리면 안되니까 안 보는 척하며 얼굴을 주시하며 인사를 하긴 했지만 도대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별로 나이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 엇비슷한 얼굴들에 비슷한 모양의 옷과 똑같은 색깔의 앞치마를 앞에 두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은아는 엉거주춤 앉은 채로 곁눈질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노오란 알전구가 불을 밝히고 있는 스탠드 두개. 텔레비젼이 놓인 장식장과 회색 가죽소파, 그리고 네모난 나무 티 테이블이 놓여 있는 실내였다. 별다른 특징없이 평범하고 소박한 실내.

그때 반백의 신사가 휠체어를 밀면서 천천히 나타났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어 지금까지 제 힘으로 밥 한 숟가락을 떠먹지 못했다는 캐빈의 여동생이었다. 떠들썩하던 실내가 그들이 나타나면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캐빈과 은아를 에워싸고 있던 세 누나들이 홍해바다 갈라지듯 양옆으로 갈라졌다. 회색 원피스의 누나가 얼른 나서서 아버지로부터 휠체어를 넘겨 받았다.

캐빈의 아버지는 아까 누나들이 상석이라고 가르켰던 자리로 천천히 가서 앉았다.

아버지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 캐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렸던 아가씨입니다.은아라고”

“안..안녕하세요….”

“오느라 수고했어요”

“예에…”

“얼른 앉아요. 그렇게 서 있을 필요 없어”

“예에….”

“금요일인데 차가 막히지는 않았어요?”

“예. 생각보다 별로요”

은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는 고요한 눈빛이었다. 고여있는 물처럼 잔잔하고 담담한. 나이 든 사람들의 눈빛은 약속이나 한듯 다 똑같다. 은아는 아버지의 눈빛을 잠깐 생각했다. 밤샘 경비 근무를 마치고도 또 아침에 덴탈랩 배달 근무를 하러 집을 나서던 아버지.

오늘 퇴근 후 바로 캐빈의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는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운전 조심하거라, 라고 한마디 했을 뿐.

캐빈과 아버지와 은아가 서너마디 얘기를 주고 받는 사이 누나들은 약속이나 한듯 몸을 돌리더니 부엌쪽으로 다 빠져나갔다.

거실에는 아버지와 캐빈과 은아와 그리고 정물처럼 미동없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여동생이 남았다.

은아는 휠체어 쪽으로 다가 갔다. 그리고 몸을 굽혀 여동생과 눈높이를 같이 했다. 그리고 최대한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은아예요”

여동생은 알아듣는지 마는지 촛점없는 눈을 허공에다 응시한 채 별 움직임이 없었다. 은아는 캐빈의 표현대로 오래된 나뭇가지처럼 비비 뒤틀린 여동생의 팔을 쓰다듬었다.  양옆의 어깨를 덮으며 내려와 있는 여동생의 유난히 까만 머리카락이 종이처럼 창백한 얼굴에 묘한 이질감을 주고 있었다.

“동생 이름은요?”

“엔지예요”

캐빈이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나서 반가와요, 엔지씨”

그때 은아는 엔지의 입술 양 끝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침을 보았다. 그 침의 양은 상당히 많아서 삽시간에 엔지의 턱으로 흘러내려 목을 적시고 있었다. 은지는 엔지의 무릎을 덮고 있는 타올을 들어서 얼굴과 턱과 앞섶을 적시는 침을 닦았다. 엔지는 감정을 상실한 인형처럼 가만히 은아가 하는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고 캐빈과 아버지는 은아의 동작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엔지씨는 여기에 사나요?”

물어놓고 은지는 아차 했다. 별다른 뜻 전혀 없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말이었다. 그러나 그 물음에 캐빈이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히며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괜한 질문을 했구나 후회했다, 은지는.

“태어나서부터 계속 엄마가 돌봤더랬어요. 엔지 나이 스물로 엄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엄마가 돌아가시고 지금까지는 누나가, 그동안은 막내누나가 돌봐주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최근에 누나가 취직을 하게 되면서 다시 집으로 데려왔어요. 그러나 금방 나갈 거예요. 지금 엔지가 들어갈 만한 시설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까 조만간 시설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조만간에요”

장황하게 설명해놓고 캐빈이 조급해 하는 목소리로 다시 덧부쳤다.

“은아씨가 엔지를 돌볼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

“은아의씨 눈에 안 뜨이게 할 거니까… 그러니까….”

“제가…..”

은지가 아까 앉던 자리로 돌아가면서 말했다.

“제가 좀 돌보면 어때요?”

은아의 말에 캐빈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캐빈씨 동생이예요. 시설에 맡기는 보다 누구든지 식구가 돌보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나…그러나 은아씨….”

“동생을 귀찮은 짐짝 취급하지 말아요”

“은아씨…..”

“엔지씨, 굉장히 얌전하네요. 착해요”

“나라에서 보조금이 나오긴 해요. 웬만한 월급쟁이 봉급정도로. 그래서 셋째누나도 맡았던 거고. 그렇지 않음 어림도 없지요. 공짜로 누가 쟤를 맡아요?다 돈보고 하는 거지요”

캐빈이 킬킬대고 웃었다.

“최근에 정부의 예산이 없는 관계로 보조금이 많이 삭감됐어요. 그래서 누나가 손을 떼는 거예요. 그렇쟎았으면 아마 죽을 때까지 붙어 있었을 걸? 둘 중에 누가 먼저 하나 죽어 나갈 때까지. 아마 엔지가 먼저 죽는 게 집안을 편하게 하는 지름길이겠지만.”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꼬여 있을까. 은아는 속으로 고개를 젓는다. 풍족하지 않은 환경은 사람을 저렇게 꼬이게 하는 것일까…..

아버지는 캐빈과 은아가 하는 행동과 말을 잠자코 다 듣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다.

“저녁 식사 다 됐어요. 모두들 저쪽으로 가세요”

누나 하나가 그때 오지 않았더라면 은아는 캐빈을 향해 한 마디 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하고.

은아는 식탁으로 안내되었다. 식탁이 눈에 들어왔을 때 일단 느낀 것은 참 많다,였다. 꽤 넓은 타원형 식탁 위가 빈자리 하나 없이 음식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은아는 대충 눈으로 음식을 세어 보았다. 서른가지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아까 들어올 때 냄새맡았던 것처럼 갈비, 잡채 , 닭도리탕, 고등어 구이, 고등어 조림,꽁치 구이, 물김치, 배추김치, 오이 소박이, 총각 김치. 나물만도 네 가지나 되었다.무우나물, 시금치 나물, 숙주나물, 그리고 고사리 나물.

놓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겹쳐서 올려놓은 접시도 눈에 뜨였다.은아는 한 상에 이렇게 많은 음식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걸 여지껏 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음식이 나를 위해 장만해진 것이리라, 하고 생각하자 은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그 감성적인 마음은 캐빈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캐빈이 버럭 소리를 크게 질렀기 때문이다.

“뭘하러 쓸데없이 이렇게 음식을 많이 했어요!”

캐빈은 아버지나 은아에게 앉으란 말도 없이 먼저 한 자리에 가서 털썩, 거칠게 앉으면서 볼멘 소리를 냈다.

“먹을 것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게 뭣하러 구질구질하게 이렇게 많이 해! 요즘 세상에 이런 무우 나물, 고등어 조림을 누가 먹는다고!”

바쁘게 움직이던 누나들은 얼어붙은 듯 동작을 정지하고 동시에 캐빈을 바라보았다.

“딱 서너가지만, 맛깔지고 풍성하게 서너가지만 장만하라고 그렇게 누누히 일렀건만!”

캐빈이 계속해서 불만을 터트리자 세 누나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다가 그중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누나가 나섰다.

“얘, 그래도 우린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먹지도 않을 음식은 아예 장만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렇지만, 우..우린… 대접하는 입장에서 우린…그게 아니잖니…잘 대접하고 싶어서.. 그래서…은아라는 아가씨 식성도 모르고 그래서….”

두 누나 중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그러게 내가 조금만 하자고 했잖아. 내가 보기에도 쓸데없이 가짓수만 많더라”

“흥, 고등어 조림을 하잔 사람이 누군데?”

“바짝 마른 구이보다야 고등어는 푹 익힌 무우를 넣고 조려야 훨씬 더 맛있지”

에이, 하고 남자가 일어나더니 망연자실하고 서 있는 은아의 손을 잡아 끌었다. 은아는 꿈을 꾸고 있던 사람처럼 화들짝 깨어나 캐빈에 의해 옆자리에 앉혀졌다.

“매사가 이런 식이라니까요.60년도에 이민 온 사람은 60년도에, 70년도에 이민 온 사람은 딱 그 70년도에 사고가 머문다더니 우리 누나들을 두고 하는 말이예요.

이민 올 때쯤 우리가 한국에서 굉장히 못 먹고 못살았거든요. 그 때에 딱 갇혀서는 이렇듯 쓸데없이 음식들을 많이 해요. 가짓수만 많으면 최곤줄 알아요. 정작 먹을 건 아무 것도 없고….”

은아를 향해 그렇게 변명하다가 캐빈은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치민다는 듯 다시 누나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은아가 이걸 다 먹기는 한대요?”

참으로 희한한 광경이었다. 산해진미가 차려진 식탁에 제왕처럼 버티고 앉은 남자가 늙은 아버지와 휠체어에 앉은 여동생과 그리고 누나들을 주루룩 세워놓고 힐책하고 있는 모습은.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나서서 캐빈을 제지하지 못했다. 미안하고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캐빈의 잔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머리만 조아리지 않았다 뿐이지 영낙없는 신하와 군주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은아의 가슴이 싸하게 아파왔다. 저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싸가지 없고 버릇없는 동생의 행패를 당해왔던 것일까. 이 남자는, 이 캐빈이란 남자는 언제부터 이렇게 안하무인이 된 것일까. 가족 중 제일 잘 나가는 위치, 그러니까 의사랍시고 돈 잘 버는 동생이랍시고 이렇게 마구 행동해도 된다고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두번째 만났을 때 캐빈이 말했었다. ‘우리 누나들 대단하거든요. 나는 누나들의 명령을 절대 거역할 수가 없어요. 무서워요. 누나들과 싸우는 게’하고. 그러나 대단한 사람은 누나들이 아니라 캐빈이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단번에 싸하게 얼음장처럼 얼어붙게 하는. 싸운다고? 지금 보니 싸우는 게 아니라 누나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은아는 아무래도 그쯤에서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손님의 입장이지만 캐빈의 행위를 그냥 묵인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침묵하고 있는 것은 캐빈에게 동조하는 것밖에 안 되니까.

“괜찮아요. 캐빈씨! 제가 다 먹어 치울 거니까 괜찮아요! 음식 많이 한 것, 절대 누님들 잘못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말아요!”

은아는 일어서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리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아버지의 팔을 이끌어다 캐빈의 옆자리에 앉혔다.

“여기 앉으세요, 아버님”

은아는 이번에는 누나들을 보며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많은 음식들 장만하시느라 정말로 수고 많으셨어요. 제가요, 보기엔 이렇게 비쩍말라도 엄청 먹거든요. 여기 있는 음식 들 다 맛보고 먹고 갈 테니까 많이 먹는다고 흉보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남으면 좀 싸주기도 하셔야 해요?”

은아는 손에 잡히는대로 접시 하나를 들어 올렸다. 오이 소배기가 담긴 접시였다. 은아는 손으로 오이 소배기 한개를 덥썩 집었다. 그리고 와싹, 소리도 요란하게 한입 베어 물었다.

“이건 손으로 이렇게 먹어야 해요, 그쵸? 와아! 진짜 이것 맛있네요!정말 맛있다아!”

캐빈으로 잠시 바짝 얼어 붙었던 분위기가 은아로 인해 조금 풀어졌다. 누나들은 최면에서 풀려난 사람처럼 다시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을 데우고, 밥을 푸고, 접시들을 비집고 잔뜩 식탁위에 놓여 있는데도 냅킨을 하릴 없이 또 가져다 놓고, 식사를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후식으로 먹을 과일들을 깎아다 놓고.

그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누나들 중 누구 하나 선뜻 와서 앉지 않았다.

어서들 와서 앉으라고 서너번이나 권유를 해서도 누나들은 서로 쭈볏거리며 눈치를 보는 것이다. 나중엔 은아가 강제로 세누나들의 팔을 잡아다 끌어 앉혀야 했다. 은아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한 듯 식탁에 앉은 누나들은 말 없이 밥만 먹었다. 아버지 역시 그랬고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전까지만해도 명랑하게 떠들어대던 누나들이었다. 그 누나들이 침묵을 지키고 밥만 먹고있는 것이다.

캐빈은 가끔 은아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맞에 맞지 않더라도 많이 먹어요, 은아씨. 이 총각 김치가 알맞게 익어서 맛있는데 먹어 봐요, 은아씨, 하고 두어마디 했다.

집안의 그릇이란 그릇은 총출동해서 차려진 식탁. 장미가 꽂힌 화병이 중앙에 놓인 식탁. 울긋불긋 꽃밭처럼 화려한 식탁이었지만 분위기는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자리처럼 우울하고 무거웠다.

은아는 자신이 별로 수다스럽거나 언변이 뛰어나거나 화제거리가 풍부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은아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 자리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그 어둡고 차가운 침묵을 깰 역활을 할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인지한 후부터 은아의 입은 바빠졌다. 서른가지가 넘는 음식들을 일일이 맛보고 그에 알맞는 감탄사를 하느라. 그리고 처음 대하는 누나들이지만 자녀들은 잘 있는지 다니는 직장은 괜찮은지 일일이 안부를 묻느라. 누나들이 걸치고 있는 옷들과 하다못해 플라스틱 귀걸이까지 일일이 칭찬을 하느라.

식사시간 내내 은아는 혼자 떠들었다. 나중에는 하도 입을 많이 움직여서 그런지 입꼬리쪽 근육이 아팠고 억지로 미소를 짓느라 그런지 관자놀이까지 욱신거렸다.

한시간 가까이에 걸쳐 식사를 마쳤고 후식으로 과일을 먹었으며 은아는 그렇게 캐빈 가족들과의 첫 만남을 무사히 마쳤다.

아버지와 휠체어에 앉는 동생과 누나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하고 포옹까지 마치고 다시 캐빈의 트럭 안.

은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춘향 노릇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온몸의 에너지란 에너지는 다 빠져나간 듯 맥이 없었다.

캐빈이 은아를 보며 말했다. 아주 기분 좋은 목소리로.

“아버지는 물론이고 누나들이 은아씨를 아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데?”

“………”

“대단해요. 난 은아씨가 그렇게 말이 많은 여자인줄 몰랐는데. 그리고 오이 김치를 맨 손으로 베어 먹는 용기는 어디서 났을까?은아씨, 정말 훌륭해…”

은아가 캐빈의 말을 잘랐다.

“저 오늘 밤 그냥 집으로 가겠어요”

“왜요? 약속이 다르잖아요?”

은아의 차는 캐빈의 병원 주차장에 있다. 거기서 만나 캐빈의 차를 타고 집에 같이 간 것이다.

상견례를 마치고 은아는 캐빈의 병원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자기로 했다. 캐빈은 밤 11시부터 당직근무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퇴근하는대로 호텔로 와서 아침을 먹고 바닷가에 가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냥…그냥 오늘밤에 올라 갈래요”

첫선을 본 이후 그동안 여섯번 정도 캐빈을 더 만났다. 워낙 거리가 먼 관계로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도 했고 오늘처럼 은아가 금요일 퇴근 후 내려오기도 했고 주중, 캐빈이 비번인 틈을 타 은아의 퇴근시간에 맞춰 올라오기도 했다.

그렇게 만남을 가지면서 은아는 결심을 했다. 그냥 이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캐빈이 짐으로 생각해 마지 않는 가족들과의 관계는 잘 풀어 감수해 나갈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엄마의 반대였다. 그래서 아직까지 캐빈의 ‘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씩조금씩 설득할 계획이었다. 정 안되면 별로 큰 도움은 안될 터이지만 언니 금아와 아버지의 힘을 빌어서라도 이 문제를 풀어 나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오늘 보니 문제는 딴 데 있었다. 지지리도 못살아 매달 생활비를 보태주어야 한다는 누나들이 아니라 생리대까지 갈아주어야 한다는 여동생이 아니라 이날 이때까지 변변한 직업 하나 가져보지 않았다는 무능한 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캐빈이었다.

은아는 머리를 짚었다. 혼돈스러워서, 머릿속이 안개가 잔뜩 낀 것처럼 혼돈스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