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아는 들고 있던 차 열쇠를 떨어트릴 만큼 놀랐다.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을 때 눈에 먼저 들어 온 것, 그것은 사람형상을 한 시커먼 물체였다. 현관문과 직선으로 통해있는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시커먼 물체, 그러나 은아는 곧 그게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헉,하고 은아가 낮은 비명을 지르자 시커먼 물체가 빠른 몸짓으로 일어나서 전등불 스위치를 올렸던 까닭이다.

“어..엄..엄마….”

새벽 두시, 당연히 자고 있을 줄 알았던 엄마가 안 자고 깨어 있다.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서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다.

“엄..엄마!”

“은아니?”

엄마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 갈 때 자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웬만하면 자고 오지 졸려서 어떻게 운전했어?”

“그..그냥 왔어….”

“왜 중간에 마음이 변한 거야?”

그때까지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채 서 있던 은아는 바닥에 떨어트린 열쇠를 집어 들고 문을 닫는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소리를 죽여 묻는다.

“여지껏 뭐하고 있었던 거야, 엄마?”

“…………”

왜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아님 자다가 깬 거야?”

“……….”

엄마는 대답을 하지 않은다. 은아는 구두를 벗고 거실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엄마 앞 소파에 몸을 던지듯 앉는다.

“왜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냐니까?!”

“너 기다리느라 깨어 있었어…….”

“엄마…..”

“걱정이 돼서 잠이 와야 말이지”

“언제쯤 도착할 거라고 미리 전화했었잖아”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그나저나 왜 마음이 변했어? 자고 내일 저녁에나 온다고 하지 않았니?”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걱정이 돼서 심장이 오그라붙는 것 같다….”

은아는 가는 한숨을 내쉰다. 정말이지 엄마의 관심과 애정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정말이지 감당이 안 된다. 도저히 말릴 수가 없다. 어렸을 땐 그런 엄마가 고마왔다. 조금 버겁기는 했지만 무관심보다는 백번 낫다고 생각했다. 철이 들었을 무렵엔 성가시고 귀찮았다. 그러나 어떻게 피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꺼이 받아들이고 감수했다.

이제는 무섭고 지겹다. 언제 쯤이나 엄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헤어나고 싶다. 촘촘하게 짜여진 그물같은 엄마의 집착. 다 너를 사랑하고 아끼니까 그런 거야,라는 명목으로 사사건건 은아를 얽매고 옥죄고 있다. 그 그물을 끊어보려고 은아는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잘 안 된다.

“그래서 어땠니?괜찮았어?”

은아는 소파에 비스듬히 눕는다. 물 먹은 솜처럼 피곤하다. 한 순간을 쉬지 않고 떠들어 댄 입과 아교풀로 붙혀 놓은 것처럼 정형화된 미소를 지었던 얼굴 근육이 아프다. 그리고 맛도 모르고 억지로 꾸역꾸역 쑤셔넣어 소화되지 않고 꽉 차 있는 배 때문에 숨을 쉬기도 거북하다. 땡볕 아래에서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처럼 지치고 힘들다. 정말이지 어디든 쓰러져 누워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자고 싶다. 그러나 잠이 올 것 같지는 않다.

은아가 대답을 않자 엄마는 다시 다그쳐 묻는다.

“상견례를 겸한 저녁 초대가 어땠었냐니까?”

“그럭저럭….”

은아가 마지못해 대답한다. 그럭저럭 좋았어, 엄마.

“식구들 다 어떻디? 다들 널 좋아하는 것 같디?”

“응…..”

은아가 다시 마지못한 듯 대답한다.

“그럼. 그래야지. 너같이 착하고 예쁜 애를 안 좋아 할 사람이 어디 있니”

“엄마…….”

“사람들은 다 괜찮아 보이디?혼수가지고 치사하게 굴 사람들같이 보이지는 않고?”

“엄마!”

“시누이들이 좀 많아야지. 아이고, 그 혼수를 다 어떻게 감당 한담…”

“안 될 수도 있어”

엄마의 말을 은아가 차갑게 끊는다. 제발 오바 좀 하지 말아요, 엄마! 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 말은 꿀꺽 삼키는 은아.

“안 될 수도 있어”

은아가 다시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한다. 그게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냐는 듯 엄마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은아를 쳐다본다.

“그냥 만나고 있는 중이야, 우리. 정해진 건 아무 것도 없어”

“은아야”

“우리 아직 아무 것도 안 했잖아. 약혼조차도 안 했어”

“은아야….”

“지금이라도 관두고 싶으면 관두는 거야. 나 하기 싫음 관두는 거야….”

나하기 싫음 관두는 거야, 하고 말하는데 울컥 목이 메이는 은아.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챘는지 엄마의 목소리가 다소 부드러워진다.

"그건 그렇다만 그래도...."

은아는 고개를 숙이고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 낸다. 고개를 숙인 은아의 얼굴에서 뭐라도 읽어내야겠다는 듯 엄마는 무릎 걸음으로 은아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리고 조심스레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니?”

“………”

“누나들이 너를 탐탁찮게 생각해?그래서 그래? 맞구나? 사실은 처음부터 내가 좀 께름칙했었어. 시누이 많은 집이라 내가 좀 께름칙했었던 거야.”

소화제 있어? 하고 엄마의 말을 자르는 은아.

“소화제하고 콜라 한 잔만 가져다 줘”

엄마가 일어난 사이 은아는 다리를 쭉 뻗어 스타킹을 벗는다. 그리고 일어나서 지퍼를 내리고 원피스도 벗는다. 저녁 내내 몸을 옥죄고 있던 스타킹과 원피스. 그 두 가지만 벗어도 살 것 같다. 해방된 것 같다.

핸드백안에서 띵, 하는 신호음이 들린다. 캐빈에게서 메세지가 온 것이리라. 은아는 전화기를 꺼내 액정화면을 들여다본다. 짐작대로 캐빈이다.

-무사히 잘 들어갔는지 궁금하고 걱정되어서요. 이 메세지 받으면 연락 한 번 줘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아니 오늘 꼭 통화 해요. 은아씨 형편이 괜찮으면 퇴근하는대로 내가 그리로 올라갈 수도 있어요. 꼭 연락 해 줘요-

오늘 토요일, 캐빈이 비번이라고 했다. 그래서 바닷가에 놀러가기로 계획을 짠 것이다.

잘 도착했어요. 연락드릴께요, 하고 은아는 간단하게 두 문장을 찍어 보낸다.

“은아씨. 뭐가 잘못된 거예요? 우리 식구들, 추레하고 구질구질한 우리 식구들 보고 실망한 거예요? 내가 그랬잖아요. 실망하지 말라고 몇번이고 신신당부했잖아요?”

호텔에서 자고 바닷가에 간다는 계획은 취소하고 바로 집으로 가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캐빈은 터져나오는 분노를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너 역시 다른 여자들과, 내가 겪었던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여자로구나. 천사같은 얼굴을 하고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해놓고는 막상 내 식구들을 만나보니 감당 할 자신이 없다 이거지? 마음이 변했다 이거지? 캐빈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 했다. 꽉 깨문 입술과 이글거리고 타오르는 두 눈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요. 그런 거 아니예요. 다만 너무 피곤할 뿐이예요”

“피곤하니까 호텔로 바로 가서 푹 쉬란 말이예요. 지금 바로 호텔로 데려다 주겠다니까요.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염려 말아요. 내일 아침까지 푹 쉴 수 있게 해준다니까요”

은아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가겠어요. 집에 도착해서 전화할께요”

“은아씨! 지금 열한시가 넘었는데 어떻게 운전하고 올라간다고 그래요!”

나중에 캐빈은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까지 했다.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여기 있다, 소화제와 콜라. 얼음 남은 게 없어서 많이 넣지 못했어. 그나저나 생전 안 먹던 소화제를 왜?”

“으응. 하도 먹어서 그런가 영 속이 개운치가 않네”

“뭘 그리 엄청나게 먹었길래? 많이 차렸나보지?”

“응. 진짜 많이 차렸더라. 상이 꽉 찼었어. 음식이 서른 가지가 넘었어”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쓸데없이 뭣하러 그렇게 차렸냐고 짜증을 부리던 캐빈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 많은 음식을 다 먹었어?”

“응. 한가지씩만 맛 봐도 서른가지였으니까”

엄마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핀다. 서른가지나 음식을 차릴 정도로 은아를 귀하게 대접했었구나, 하는 짐작이 얼굴에 나타난다.

“좀 적당히 먹지 그랬니.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뭘 그리 많이 먹었어?”

“그러게. 그런데 적당히 먹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속이 부대끼는구나”

“응, 소화제랑 콜라를 마셔야 편안해 질 것 같아서…..”

스타킹과 원피스를 벗어내서인지 한결 몸과 마음이 편해진 은아는 엄마의 말에 일일이 대꾸를 해준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새벽. 속옷차림으로 홀가분하게 엄마와 단 둘이 앉아 대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하고 은아는 생각한다.

“엄마”

은아는 앞에 앉아 있는 엄마를 가만히 불러 본다.

어릴 때 엄마는 은아의 자랑이었다. 길에서도 유치원에서도 시장에서도 엄마는 무리 속의 여왕이었다. 선생님이고 학부모고 상인들이고 항상 엄마주위로만 몰려들었다.

은아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엄마를 닮았구나. 엄마를 닮아서 이렇게 예쁘구나. 학처럼 긴 목이며 분가루가 묻어날 듯한 피부며 길고 가는 팔다리가 엄마를 빼다 박았구나….

사람들은 앞다투어 엄마와 은아의 미모를 칭찬했고 은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볼을 꼬집었다. 학교에서 웬만한 실수를 해도 은아라면 선생님들은 눈감아 주었고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은아라면 사탕 하나라도 더 쥐어주었고 상인들은 전혀 이문이 없다고 엄살을 하면서도 은아가 입을 거라면 옷이고 신발이고 많이 깎아주었다.

은아는, 은아는, 그때부터 은아는 어릴 때부터 여자의 미모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플러스가 되는 것인지 깨달았다.

철이 들면서 은아는 여자는 남편을 잘 만나야 일생이 편안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엄마가 좋은 모델이었다. 엄마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남편을 잘 못 만나 쇠락해져가고 있는 여자'였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다. 윤택한 생활이 계속 지속되었더라면 더 반짝반짝 빛났을 엄마의 미모. 그 미모가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함으로 점점 빛을 잃었으니까. 오랫동안 물을 못먹은 화초처럼 시들었으니까.

엄마는 왜 아버지랑 결혼했을까. 둘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집안에서 금기였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물어봐서도 안 되는.

그러나 엄마의 친구들과 대화속에서, 그리고 친척들이 한두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두 사람의 결혼에 얽힌 비화를 짐작해낼 수 있었다.

대학 시절, 엄마에게는 결혼까지 약속하며 깊이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 애인의 단짝친구였다고 했다. 어느날 엄마의 애인이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하늘을 잃은 듯한 비통과 슬픔에 엄마가 잠겨있을 때 끝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이 아버지였다고 했다. 그러나 지고지순한 헌신과 애정을 보여준 아버지에게 엄마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었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대학 졸업기념으로 떠난 여행에서 어떻게 하다 아버지와 엄마는 잠을 자게 되었다. 그리고 몇달 후에 엄마는 금아를 가진 걸 알게 되었다. 이후, 결혼은 정해진 순서였다.

“넌 아직도 엄마가 나 때문에, 나를 임신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결혼을 한 거라고 생각하니?”

아주 오래전, 엄마 아버지의 결혼 앨범을 들추면서 언니 금아가 은아게게 물어온 말이다. 어릴 때부터 은아랑 사사건건 비교당하면서 자라서인지 금아는 매사에 삐딱하고 시니컬했다. 그날도 금아는 엄마를 껌처렁 질겅질겅 씹지 않고는 못견디겠다는, 심술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물려받을 재산, 즉 어마어마한 배경을 보고 결혼한 거야. 쥐뿔도 없는, 가진 거라곤 반반한 얼굴밖에 없는 엄마가 신분상승을 할 수 있던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의 아버지는 지방에서 운수회사를 경영하던 갑부였다고 했다. 아버지에게는 여동생만 둘이라 사업체를 물려받아 경영해 나갈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단다.

“욕심많고 야심많은 엄마가 어딜봐서 시시한 가난뱅이랑 결혼하겠니? 아버지 집이 부자니까, 그래서 한 거지”

어쨌든 조금은 아버지를 사랑해서겠지,하고 은아가 대답하자 금아는 콧방귀를 흥, 하고 뀌었다.

“사랑이라고? 엄마의 사전에는 그런 것 없어. 죽은 애인도 돈 많은 남자였다며? 공부도 지지리도 못하는 남자였었는데 가진 것은 돈밖에 없었대. 엄마한테는 일단은 남자가 부자라야 해. 그래야 사랑이고 나발이고 있는 거야 ”

정말 그랬던 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하건데 아버지의 사업이 잘 나갔을 때, 그래서 모든 면에서 풍족했을 때. 청소하는 아줌마, 음식만 하는 아줌마를 둘이나 두고 운동하고 골프치고 쇼핑만 다니는 생활을 했을 때 엄마는 아버지에게 지극히 깍듯했다. 언감생심 아버지에게 말대꾸나 잔소리나 비난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입속의 혀처럼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가끔은 애교도 부리고 교태도 보였다.

돈이란 무엇일까. 그 돈이란 물건은 부부사이를 좋게 할 수도 있고 나쁘게 할 수도 있다. 왜냐면 집안이 가난해지면서, 엄마가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아버지와의 사이가 급속도로 냉각되기 시작했으므로.

본가의 재산까지 끌어다가 망한 사업을 회생시키려 아버지가 불철주야 노력을 할 때까지만해도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본가에서 운영하던 회사의 버스 한 대가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50십여명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는 사고가 났다. 그 사고 수습을 하느라 아버지로 향하는 돈줄이 막히고 되고 끝내는 다시 재기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자 엄마의 태도가 돌변해버린 것이다. 아버지를 무시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엄마는 아버지의 조건과 배경만 사랑한 것일까.

은아가 엄마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는 돈이란 물건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하고 죽이고 살릴 수도 있다는. 돈 위에 사람있고 돈 밑에 사람있다는 것을 종교처럼 믿고 있는 엄마.

두메산골 가난한 촌부의 딸로 태어나 가난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겪은 엄마. 엄마는 부자인 아버지를 통해 가난을 벗어보려 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은아를 통해 기를 쓰고 이루고자 한다는 것도 은아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엄마가 시키는대로 하는 게 재미 있었다. 남자들로부터 아름답다는 찬사를 듣는 일은 싫증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맞선이란 것은 그 아름답다는 찬사를 실컷듣게 해주는 일이었다.

인형처럼 예쁘십니다. 정말 꽃같이 예쁘세요. 영화배우처럼 아름답습니다. 맞선자리에 나온 남자들은 입에 침이 마르게 은아의 미모를 칭찬했다. 은아의 미모에 반해 처음 만남에서 명품백을 사다 안겨주는 남자도 있었다. 그들로부터 얻어가진 명품백이며 시계며 옷이 옷장에 한가득이다.

그러나 세번 이상 이어진 만남이 없다. 왜 그럴까. 온갖 단어로 은아의 미모를 찬양하던 남자들이다. 그러나 한두번 만나면 그걸로 끝. 엄마의 말대로 은아가 가진 초라한 배경때문에 남자들이 떠나가는 것일까. 아니면 유일하게 세번의 만남을 가졌었던 어떤 남자의 말대로 은아가 향기없는 꽃이라서 그럴까.

세상에 태어나 은아씨처럼 예쁜 여자를 만난 것은 처음입니다, 하고 감격해 마지 않았던 남자였다. 그 남자는 세번째 만남에서 이별을 고하면서 말했다. 은아씨가 예쁘긴 해요. 그런데 향기가 없어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꽃같아요.

플라스틱 꽃, 그 플라스틱 꽃이 햇빛에 바래 제 색깔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

플라스틱 꽃은 색깔이 바래고 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회의가 인다. 좌판에 누워있는 생선도 아니고 예쁘게 차리고 나가 자신을 간택해 주길 바라며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짓고 공허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

은아는 모든 일상에서 탈피하고 싶다. 맞선보는 일에서. 집에서. 가족에서.

언니 금아가 이혼해 집에 들어오고 부터는 집안 분위기는 더욱 숨이 막힐 것 처럼 답답하고 우울하다. 금아와 엄마는 눈만 마주치면 싸워대고 아버지는 담배만 뻑뻑 피워댄다. 별로 말수가 없는 아버지는 최근 들어 말수가 더욱 줄어들었고 엄마의 한숨소리는 더욱 깊고 높아졌다.

하루종일 닫혀있는 언니 금아의 방. 그 방 앞을 발소리 죽여 지나쳐 다니는 일도 괴롭다. 하루빨리 이집을 나가고 싶다. 그래서 은아는 별로 내키지 않지만 결혼상담소든 이웃이든 직장상사든 그 누가 주선해 주는 맞선자리, 소개팅 자리에도 부지런히 쫒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도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처음으로 은아와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내보인 남자, 캐빈을 만났다.

그런데 현실이 녹녹치 않다.

그동안은 은아가 대부분 남자로부터 거부당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반대의 입장에 놓일 수도 있겠다. 은아가 캐빈을 마다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떻디? 다 괜찮았어?”

은아가 콜라를 다 마시길 기다려 도저히 그냥은 물러서지 못하겠다는 듯 엄마가 다시 묻는다.

“결혼날짜 잡자는 얘기는 안 나왔어?”

엄마는 전혀 모른다. 그 남자의 집안 사정을. 생리대까지 갈아채워 주어야 하는 장애자 여동생과 약속이나 한 듯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가난한 누나들과 평생 하는 일이라곤 책만 들여다보는 일이 다였다는, 자기 손으로 쌀 한톨을 사오지 않았다는 아버지와 명색만 번듯한 의사지 생활고에 찌들은 암울하고 어두운 백그라운드가 캐빈 뒤에 버티고 있는 줄 엄마는 모른다.

“너무 서두르지 마. 뭘 그리 서둘러?”

은아가 살짝 짜증을 담아 엄마에게 말한다.

“아니. 서두르는 게 아니라 남자가 널 아주 맘에 들어한다면서?그러면 결혼 날짜 잡자는 얘기가 나올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래”

“……….”

“너희들 만나기 시작한 것도 벌써 꽤 오래되지 않았니?”

그렇다. 벌써 두달을 넘겨 석 달째로 접어들고 있다.

“사실은 엄마…..”

이쯤해서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은아는 생각했다. 사실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오늘 본 캐빈의 진면목에 대해.

은아는 가시처럼 뾰족하고 까칠한 사람은 알레르기 반응이 일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싫다. 여지껏 엄마라는 사람을 지켜보고 겪어본 것으로 족하다. 뾰족하고 까칠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긴장되게 하고 지치게 하는지 엄마를 통해 잘 알았다.

자랑스럽게 내놓지 못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좋았고 못생겨도 좋았다. 키가 작아도 좋았고 시부모를 모시고 산다해도 좋았다. 은아가 원하는 사람은 솜처럼 푸근하고 넉넉하고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오늘 밤 본 캐빈은 꼬일대로 꼬인 사람이다. 식구들이 무능하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자기가 베풀고 수혜한다는 우월감을 발판삼아 마음놓고 소리지르고 핀잔주고 질책했다. 배려심이나 이해심은 손톱끝 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처음에 은아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엄마가 캐빈의 집안을 이유들어 결혼을 반대한다해도 설득하고 투쟁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제는 자신이 없다.

“엄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길 잘 들어봐…..”

캐빈의 집안 형편을 털어놓으면 엄마는 백이면 백, 반대할 것임에 분명하다.

엄마가 반대하면, 그걸 핑계로 캐빈과의 만남을 접어버릴까…..

은아는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은아의 얘기가 진행될수록 엄마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굳어진다. 그러다가 여동생에 관한 대목에서는 경악으로 휩싸인다.

“그..그래서..그래서……”

엄마가 은아의 말을 끊었다.

“그 장애자 여동생을..그 여자를 네가 평생 돌보아야 하는 거야?그런 거야?”

“아아니….. 그건 아니고. 어쩌면 당분간만. 지금 그 아가씨를 수용시킬 시설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래”

은아는 캐빈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전한다. 엄마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다.

“가엾은 것….”

엄마가 팔을 뻗어 은아의 손을 잡는다.

“어째 네가 만나는 것들은 하나같이 다 그러냐…..”

“………..”

“그런데 네 생각은, 그래서 은아 네 생각은 어떠니?”

“내 생각?”

놀랍게도 엄마는 차분하다. 천장높이까지 펄쩍뛰며 난리를 칠 줄 알았던 엄마였다. 그런데 그저 차분하고 담담하다. 난리치지 않는다.

“난….난 잘 모르겠어…. 엄마….”

의혹에 찬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캐빈을 떨쳐내고 세 시간 가까이 운전해 오면서 은아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내린 결론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동안은 캐빈이란 남자를 괜찮다고 생각했다는 것. 캐빈에게 점수를 준다면 80점 정도? 한가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다면 언니 금아처럼 약간 시니컬한 점이 있다는 정도. 그러나 그 정도는 얼마든지 고치고 개선해 나갈 수 있으리라 은아는 자신있어 했었다.

왜냐면 시니컬한 면도 있었지만 자상하고 따뜻한 면이 더 많이 있는 남자였기에. 캐빈은 화장실 갈 사이도 없이 바쁘다면서 서너시간에 한번씩 꼬박꼬박 문자를 보내주고 출근하면 출근한다고, 퇴근하면 퇴근한다는 보고를 했다. 은아 직장으로 꽃바구니를 세번이나 보내주기도 했다.

그래서 이만하면, 하고 은아는 마음을 서서히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젯밤 캐빈의 감추어진 진면목을 보고 말았다. 가족들을 지겨워하고 버거워하고 있다는 짐작은 했었지만 그 정도로 함부로 막 대할 줄은 몰랐다. 캐빈은 한마디로 가족들에게 무례했다. 가족들에게 무례한 사람은 아내에게도, 그리고 자식들에게 무례할 가능성이 많았다. 적어도 은아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활동적이지 못한 은아는 친구가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를 통해서, 엄마를 통해서 그리고 언니, 금아를 통해서 사람이 가진 나쁜 단점이 평생토록 그 사람을 지배하고 주위에도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까 어젯밤 목격한 캐빈은 아버지, 엄마 금아, 그 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을 무시하는 엄마의, 매사에 시니컬하고 나쁜점만 집어내는 언니의, 아내보다 뛰어나지 못하다는 열등감에 항상 자신감없이 어둡고 우울한 아버지의.

“그렇다면……”

고개를 외로 꼬우고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엄마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별 문제가 없다고 보는데?”

“……….”

“네가 평생 돌봐야만 한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시설에 보낼 거면 네가 귀찮고 성가실 이유가 없잖니?”

“………..”

무엇이 엄마를 저렇게 변하게 했을까? 예전의 엄마가 아니다. 이 고요한 새벽공기가 엄마를 변하게 했을까?

“그리고 지금 누나 셋이 아주 극빈자라고 했니? 그래서 그 남자가 매달 생활비를 보태주고 있다고?”

“으응….그런가봐….”

“그거야 네가 액수를 잘 조정하면 될 거고…”

“엄…엄마…..”

“누나들이 변하겠지. 그렇게 장가보내려고 결혼상담소에까지 의뢰를 했던 남동생이 결혼해 살림을 차리는데 전에 받던 액수대로 똑같이 생활비를 받으려 하겠니? 네가 말하면 되잖아. 한꺼번에 딱 자를 수는 없으니까 액수를 줄이면 어떻겠냐고. 네가 말하기가 거북하면 남편을 시켜라. 누나들도 양심이 있다면 거부할 수는 없겠지….”

“………”

“그리고 시아버지 자리가 문제이긴한데”

“……….”

“오히려 그런 사람이 모시기는 편할 거야. 그렇게 평생 책만 판 사람들, 혼자만의 세계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아마 모르긴해도 집에 있어도 있는 듯 없는 듯 할 걸? 하루세끼 밥만 차려주면 자기 방에 들어박혀 하루종일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울 거야”

결론은 났다. 이 결혼은 해야 한다. 엄마 말대로라면 걸리적 거리는 것이 없다. 모든 게 수월하기만 하다. 물 흐르듯 술술술 부드럽게 흘러간다.

“그런데 엄마….”

은아는 말하고 싶다. 사실은 지금 엄마에게 털어놓은 집안 사정이 문제가 아니라 남자 본인이 문제라고. 날카롭기가 칼 같아서 베일까봐, 그래서 피를 흘리게 될까봐 무섭다고 말하고 싶다.그러나 은아는 말을 꺼내지 못한다.

왜냐면 은아는 퍼뜩 느꼈던 것이다. 엄마가 지쳐있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좀더 귀티나 보일까, 품위있어보일까 있는대로 꾸미고 인형같은 은아를 맞선자리에 대동하는 일에 이제 진력이 났다는 것을. 웬만만 하면 아쉬운대로 얼른 시집보내고 싶어한다는 것을 은아는 감지했다.

“남자만 좋다면, 아니 그쪽 집안에서만 널 마음에 들어한다면 말야”

“엄마…..”

“얼른 날을 잡아. 이번 가을에는 어떡하든지 식을 올리는 걸로 하자…”

“……….”

“그 남자 언제 다시 만날 거니?”

“………”

“재촉을 해. 이번 가을에 하려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두어달밖에 더 있니?”

은아는 더 말을 꺼내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그만 입을 다문다. 그리고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천장 한가운데 달린 동그란 형광등 불빛에 엄마의 얼굴이 파리하고 창백하다.

소매없는 낡은 잠옷을 입고 있는 엄마. 추욱 늘어져 있는 목살이 눈에 뜨인다. 매일 저녁 목욕탕 거울 앞에서 목 맛사지를 하고 있던 엄마. 그런데도 엄마의 목은 마치 닭벼슬처럼 힘 없이, 탄력없이 늘어져 있다.

은아는 목이 메인다.

한때는 만인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빛나는 미모를 가진 엄마의 늙음을 목격한 게 슬퍼서. 자신도 그렇게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 슬퍼서. 더 늙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결혼이란 걸 해야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실이 슬퍼서 은아는 목이 메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