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의 전화번호가 액정화면에 떴을 때 금아는 망설였다. 이 전화를 받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고.

분명 피트니스에 관한 것으로 전화를 한 것이리라, 하고 금아는 생각 했다. 한달이 가까이 되도록 모습을 비치지 않는 금아의 게으름에 대한 지청구를 하려고 전화를 한 것이라.

뭐라고 변명을 할 것인가. 뭐라고 합리화를 시킬 것인가.

만약 이번 전화를 안 받는다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냥 이번 한번으로 그의 전화는 끝이 될 것인가. 아니다. 빌려준 돈을 받아내는 빚쟁이처럼 2,3분 후, 5분 후, 아니면 1시간 후에 다시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올지도 모른다.

오늘은 전화를 안 받는다 치자. 그런데도 이 남자가 끝내 단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내일이라도, 모레라도, 일 주일 이후에라도 또 다시 전화가 온다면 그때도 안 받고 말 것인가.

내일이라도, 모레라도, 일 주일 이후에 걸려오는 전화를 안 받았다치자. 만약 받을 때까지 계속 단념하지 않고 전화를 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기훈이라는 남자의 전화를 앞으로도 끊임없이 무시해 치우면 될 것인가. 그렇게 하면 만사가 해결될 것인가.

1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온갖 복잡한 생각이 금아의 머리를 채웠다. 그 사이에도 전화벨은 계속 울리다가 끊어졌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오니 메세지를 남겨주세요, 하는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고 있는 중이리라.

그 남자 정기훈은 메세지를 남길까. 그러나 연이어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금아는 전화를 받기로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받아야만 앞으로의 인생이 편할 것 같았다. 무조건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금아가 헬로우, 하자마자 정기훈이 다짜고짜 물었다. 뭐해요?

금아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고 정기훈은 급하게 다시 물었다. 뭐해요?

“………”

“뭐하고 있어요?”

“………”

“뭐하고 있냐구요, 지금?”

“아…아무 것도 안.. 안 해요”

아침이다. 은아와 아버지는 출근했다. 엄마는 이웃집 아줌마와 동네길을 산책하러 나갔다. 아침이나 오후 나절에 동네길을 산책하는 일은 요즘 들어 생긴 엄마의 버릇이다. 이웃에 새로 이사온 한국 아줌마의 권유로 산책을 시작하더니 요즘은 매일 계속 나간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뜨거운 햇빛이 내려쬐거나 엄마는 그 일을 멈추지 않을 작정인 것 같다. 엄마는 말했다. 산책을 시작하고 나서 5파운드나 빠졌어. 평생 그 몸무게 그대로 날씬하던 엄마였다. 그런데 최근에 나잇살이 붙는지 그동안 입던 옷들이 죄다 맞지않다고 불평과 걱정을 해댔다. 그러더니 운동에 재미를 붙여 살까지 빼고 살판나고 있는 엄마였다.

금아는 이제 일어 났다. 커피 한잔을 마시려고 부엌에 나와 있는 중이다. 정기훈에게 대답했던 것처럼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다. 물론 오늘 하루종일 아무 것도 안 할 작정이다. 여지껏 그래왔던 것같이 그냥 뒹굴뒹굴 침대에서 구를 작정이다.

“나와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기훈이 말했다.

“아무 것도 안 하면 나와요. 얼굴 좀 봅시다”

“……….”

“이리로 와요. 여기 피트니스 센터입니다”

“………..”

“금아씨. 솔직하게 말해봐요. 그동안 여기 한 번도 안 왔었죠?”

“………….”

“여기 한 번도 안 온 것 맞죠?”

“미..미안 해요”

미안하다. 어쨌든 미안하다. 회원권을 끊어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얼굴은 한 번 비추었어야 하는데.

“나는 매일 들렀어요”

“……….”

“ 원래는 이틀에 한 번씩 들러 운동해요. 근데 지난 한달동안은 매일 들렀어요”

“예에……”

“왜 매일 들렀는지 금아씨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잘 알죠?”

“………..”

“아침에도 들르고 점심 때도 들르고 저녁 때도 들르고”

“………..”
“대중없이, 시도 때도 없이 들렀지요”

“예에”

예에 라는 말 외엔 할 말이 없는 사람처럼 금아는 다시 예에,하고 대답했다.

“한 번이라도 금아씨의 얼굴을 볼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단 한 번도 안 보이대?”

“………..”

“이봐요. 금아씨!”

정기훈이 갑자기 큰소리로 금아를 불렀다. 금아는 놀라서 전화기를 고추잡았다.

“도로 내 놔요!”

“예에?”

“도로 내 놔요. 그 회원권! 안 쓰려면 도로 내 놓으라구”

“아, 예..예에……”

“누군 돈이 남아 돌아서 비싼 회원권을 끊어 준 줄 알아요? 사람이 어쩌면 그래요.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

“금아씨, 살 더 쪘지요? 아마 모르긴 해도 그럴 거야. 퉁퉁 더 쪘을 거야. 꿀꿀이가 친구하자고 덤벼들 만큼!”

“………..”

“길에 함부로 나다니지 말아요. 사람들이 공인 줄 알고 뻥, 차버릴지도 모르니까”

금아는 쿡, 하고 웃었다. 이상하게 별로 노엽지가 않다. 고깝지가 않다. 기분나쁘지가 않다.

“아줌마!”

금아씨에서 아줌마로 호칭이 바뀌면서 어조도 단호하게 바꾸는 정기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요, 도대체 언제까지?”

“………”

침묵하는 금아.침묵밖에 할 게 없는 금아.

“무슨 사연이 있는 지는 모르지만 젊디 젊은 여자가 그렇게 자신을 함부로 내팽개치고 있는 거, 부끄럽지도 않아요?”

남이사, 하고 말했을 것이다. 정기훈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남이사, 하고 되받아쳤을 것이다. 남이사 전봇대로 귀를 후비든 말든. 남이사 비 오는데 색동옷을 입고 나들이를 하든 말든. 너나 잘 하셔.

그러나 그렇게 말 할 수 없다. 그렇게 맞받아 칠수가 없다. 그래서 잠자코 정기훈의 말을 듣고 있는 금아다.

“그러지 말고요….”

단호하던 정기훈의 목소리가 다정해진다. 말 안듣고 고집 부리는 아이를 살살 타이르는 아버지같은 어조가 된다.

“그러지 말고 나와요. 쑥스러워서 그래요? 첨에는 다 그래요. 어색하고 쑥스럽고 그래. 그런데 몇 번 다니다 보면 여기 사람들과 친해져요. 오늘 내가 한가해요. 오후 2시까지 일이 없어요. 금아씨가 오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소개시켜 줄께요. 그럼 앞으로 혼자 와도 좀 덜 쑥스러울 테니까….”

“저…….”

금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 힘들여 운동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금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 남자 정기훈은 같은 이유를 가지고 앞으로 종종 전화할지도 모른다. 그런 그를 사전에 차단해야 할 것 같았다.

“또한…그….회원권… 사…사실은 지금 제 손에 없어요”

“뭐라고요?”

“없다고요. 잃어버렸어요”

허, 하고 정기훈이 탄식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길게 한숨 쉬는 소리.

“미안해요….”

“………”

이제는 정기훈이 침묵이다. 이 칠칠맞은 여자야. 어떻게 하다가 그걸 다 잃어 버리니?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금아가 다시 더듬거리며 말했다.

“차..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요. 사..사실.. 사실 그 회원권 저에겐 전혀 쓸모가 없는 거라서요. 고맙긴 했지만…진짜 제겐 무용지물인 거였거든요…”

그때, 한 달전 공원으로 걸어 갈 때.

금아는 약간 고무되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공원가는 길을 걷고 뛰면서 죽을 때 죽더라도 앞으로 조금은 움직여 볼까하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날 거짓말같이 정기훈으로부터 피트니스 센터 선물권과 백화점 상품권을 건네 받았다. 금아는 흥분으로 몸이 떨렸다. 그 회원권을 이용해서 앞으로 운동을 해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로부터 그런 걸 받으면서도 창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남자가 내가 얼마나 한심했으면, 얼마나 보기 딱했으면 이런 걸 다 끊어다 줄까 하는 자괴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정기훈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관심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컸기에.

그것은 세상에 태어나 남편 토니로 부터 받아보고 처음으로 받아본 타인의 관심이었다. 정기훈의 그 관심이란 것이 남자가 여자에게 보여주는 색깔의 것이 아닌, 인간대 인간으로라는 것은 금아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고마왔다.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늪에 빠져서 그 늪에서 나올 생각조차 않고 주저앉아 있는 자신을 추스려 주는 사람이 있구나. 그래도 이 하늘 아래서 나를 케어하는 사람이 있구나. 구박덩이, 못난이, 메주 덩어리, 살찐 고릴라같이 흉칙하고 쓸모없는 나를 안타까와 하는 사람이 있구나.

금아는 피트니스 센터에 가보았다. 정기훈으로부터 회원권을 선물받은 바로 그 다음날 새벽에. 잠이 안 와서 뒤뜰을 어슬렁거리며 걸어다니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피트니스 센터라는 곳이. 도대체 그곳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스물 네시간 운영하는 곳이라지만 이같이 이른 새벽에 과연 사람들이 있을까.

이용을 하든 안 하든 일단 구경은 한번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새벽 두시에 금아는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갔다. 당연히 아무도 없으려니 한 그곳에 예닐곱명의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두명은 러닝 머신 위에서 지구끝까지 달리겠다는 비장한 표정으로. 서너명은 아령을 들고 왔다갔다. 그리고 한명은 매트에서 스트레칭을.

그 예닐곱명 중 금아처럼 뚱뚱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 금아는 놀랐다. 잡지에서 금방 빠져나온 사람들이라 한다해도 믿을 만큼 적당한 근육으로 뒤덮힌 날씬한 사람들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 다 자는 새벽에.

금아는 차안에서 균형잡히고 아름다운 몸매의 그들의 모습을 넋놓고 바라 보았다. 가슴이 서늘했다. 그리고 복잡했다. 무어라 형연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감동과 슬픔과 자책이 뒤섞인 기분. 그 혼합된 감정이 금아를 짓눌렀기에 그녀는 금방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참동안 차 안에 앉아 있었었다. 그리고 패잔병처럼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나같은 사람은 끼일 자리가 아니구나……

그러나 금아는 그렇게 주저앉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렇게 주저앉아버린다면 정기훈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았기에.

얼마 후 저녁식탁에 식구들이 오랜만에 다 모였다. 그렇게 네 식구가 한 식탁에 모인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올 봄, 매운탕을 끓여 뒷뜰에서 저녁을 먹은 이후 처음이었다.밤에 건물 경비 일을 하는 아버지인지라 항상 저녁 식탁에는 빠졌다. 그러나 그날은 무슨 이유에선지 아버지도 출근하지 않고 식탁에 앉았다.

그때 금아는 참 잘 되었다 싶은 안도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식구들의 눈치를 계속 보면서 적당한 기회를 살폈다. 앞으로 피트니스에 운동하러 다녀 볼 생각이라고 말할 참이었다. 물론 정기훈으로부터 회원권을 선물받았다는 얘기는 빼고.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는 말 처럼 통보하고 식구들의 반응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집에만 계속 있으니까 온몸이 찌뿌트하고 안 좋네. 앞으로 운동이나 해 볼까 봐…. 요 앞 고속도로 옆에 스물 네 시간 운영하는 피트니스 센터가 있던데 거기에 회원으로 등록해 볼까…………..

만약 식구 중 누구 하나라도 금아의 말에 관심을 보이며, 그러니까 아버지 엄마 은아 중 누구 하나라도 그래, 잘 생각했다. 열심히 해 보렴,이라고 말해주었더라면,

그 말을 핑계삼아서라도, 정말 억지로라도 힘을 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식탁자리는 어수선했다. 그 누구도 금아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주 어렵고 힘들게 꺼냈던 금아의 그 말은 세찬 바람소리에 묻히는 파리의 날개짓처럼 그냥 묵살되고 말았다. 아주 가볍디 가볍게.

식구중 그나마 유일하게 금아에게 작은 관심을 보이는 편인 은아마저도 알아서 해 언니, 하고 짧고 간단하게 한 마디 했을 뿐.

그날 식탁에서의 중요 안건은 결혼상담소의 주선으로 만나서 은아랑 사귀고 있다는 그 남자, 큰 도시 대학병원의 의사라는 남자와 상견례 건이었다.

일단은 남자쪽에서 은아를 무척 마음에 들어한다니, 그래서 그쪽 식구들과 상견례를 무사히 마쳤다니 이제 우리 쪽에서 남자쪽 식구들을 불러야 할 차례다. 그러면 그 상견례라는 것을 집에서 할 것인가, 나가서 할 것인가. 집에서 한다면 그 음식을 누가 다 할 것이며 나가서 한다면 호텔로 할 것인가, 한식당에서 할 것인가로 엄마의 입이 바빴다.

엄마는 음식하는 일이라면 우선 겁부터 내는 사람이었다. 결혼 후 자신의 손으로 밥 한번을 해보지 않았기에 음식 솜씨가 늘 사이가 없어서라고 했다. 지금도 겨우 흉내나 내는 정도이다. 그러나 금아가 보기엔 그건 핑계였다. 귀찮아서인 것 같고 성의가 없어서인 것 같다. 맘 먹고 하면 크게 나쁘지 않았기에. 지난 번 아버지가 잡아온 생선으로 매운탕 양념을 얼마나 기차게 해내지 않았나 말이다.

어쨌든 엄마는 돈이 좀 들더라도 근사한 호텔에서 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중이었고 아버지는 단 한마디의 의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사를 표시한대도 관철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리라.

엄마가 아버지에게 “망부석처럼 그렇게 입 다물고 있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라고 재촉했지만 아버지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겨우 한마디 했는데 그게 엄마의 부아를 돋구어 놓았다. 당사자끼리 좋다면 굳이 상견례를 할 필요가 있냐고. 엄마는 펄펄 뛰면서 화를 냈다. 양쪽 가족들의 상견례도 없이 바로 결혼식을 하는 쌍놈의 집안이 어디 있어요!

금아는 은아가 그 의사라는 남자와 진행하고 있는 결혼에 별로 들떠있지 않다는 걸 감지했다. 은아는 오히려 불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결혼을 앞둔 새신부라면 가지는 불안감이 아닌 것 같았다. 긴장, 흥분, 기대가 적당히 섞인 뭐 그런 것과는 응당 다른,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좀 더 두고 보자고. 엄마….”

아니나 다를까. 은아가 엄마를 만류했다. 아직 남자를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그쪽 가족들을 소개할 단계가 아니라면서.

그러나 은아의 말은 엄마의 의해 가볍게 묵살되었다.

“벌써 몇달이나 만났잖아. 모르긴 뭘 모르니. 인물이고 품성이고 성격이고 그만 하면 되었다. 직업이야 두말 할 것도 없고”

은아가 울상을 지었다.

“그 사람이 너무 바빠. 여기까지 가족들을 다 데리고 올라오기엔 시간이 너무 없는 사람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먼저 나서서 서두른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 시간봐서 자기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 보자니까”

“아무리 바빠도 장가갈 시간은 있어. 그리고 그 남자는 휴일도 없대니?휴일로 날을 잡으면 우리가 그 시간으로 맞춘다니까”

“엄마!”

“남자 맘 변하기 전에, 그러니까 남자가 너한테 바짝 달아있을 때 얼른 빨리 빨리 진행을 해야 해. 시간 끌수록 손해보는 건 여자쪽이야. 혼수도 그렇고. 나중에 핑계를 댈 수 있잖니. 많이 장만 할 수도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못했다고….”

마침내 은아가 폭발했다.은아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지른 것이다.

“내가 귀찮은 짐짝이야? 치워버려야 할 똥이야? 나 이제 서른도 채 안됐어! 앞으로도 앞날이 창창하다구! 왜 그렇게 서둘러! 조금만 더 두고 보자니까!”

그늘에서 자란 화초같이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기만 하던 아이였다, 은아는. 그런 은아가 불현듯 그렇게 소리를 지르니 다 놀랄밖에. 엄마도 아버지도 금아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벌린채 은아를 바라보았었다.

“미안해요. 어젯밤 한잠도 못잤어. 낮에 점심 시간을 이용해 낮잠을 자보려고 애썼는데도 도저히 잘 수가 없었어….”

은아는그렇게 짧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뒷뜰로 나갔고 엄마는 그냥 식탁에 앉아 있었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면서.

금아는 알 수 있었다. 은아가 결혼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은아가 그렇게 앙칼지게 엄마에게 대드는 걸 처음 본 것이다.

결혼을 잘 하는 것만이, 그래서 남편 사랑받고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 것이 여자의 최대행복이라 여기는 은아였다. 서른을 넘기지 않고 결혼하는 것이 지상최대의 과제로 여기고 있는 은아였다.

집안, 학력,직업 다 변변찮으니 미모가 최고로 빛을 발할 때, 그 미모를 밑천으로 쓸만한 신랑감을 사로잡자는 엄마의 뜻에 적극 동조한 은아였다. 그래서 결혼상담소에 자신을 상품으로 내놓은 것 아닌가. 그래서 소원대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대물을 잡은 것 같다.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남자쪽에 생활이 곤궁한 누나들이 드글드글 하다더니 그게 문제일까.

금아는 생각했다. 은아에게 언제 얘기해 주기로. 다른 것은 몰라도 주위의 성화에 떠밀려서 결혼하면 안 된다는 것을 얘기해 주기로.

왜냐면 금아 자신이 그 좋은 본보기였으므로. 금아 역시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남편될 사람의 가족들 심성이나 분위기를 보지 않았었다. 남자가 대충 괜찮다 싶어 덜컥 결혼부터 했었다. 결혼은 당사자도 중요하지만 가족들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결혼은 두 가족, 집안끼리의 결합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은아가 간곡하게 요청하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자신의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그 남자쪽 집안과의 상견례를 날짜를 다음 달 초로 잡아놓은 것이다. 장소는 다운타운에 새로 생겼다는 중국집 ‘향원’.

엄마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은아가 어쩔 수 없이 선정한 장소였다. 저녁식사를 하는 걸로 하면 남자 식구들이 집으로 돌아갈 일이 난감하다고 해서 그 중국집에서 일요일 열 두시에 점심을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 자리가 어려운 자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너? 그런 자리에 그러고 나갈 거니?"

날짜와 장소가 정해지고 나자 엄마는 금아에게 매일 비수를 날렸다.

“신부 언니때문에 혼사깨졌다는 말 듣고 싶지 않으면 지금부터라도 살을 좀 빼던 가 해! 아니면 당일 심한 몸살을 앓던지. 아파서 못나왔다는 핑계라도 대게.”

금아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자신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을. 못생기고 뚱뚱하고 변변한 직업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자신을 창피해 한다는 것을. 사돈이 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견례까지는 2주 정도가 남아 있었다. 지금부터라도 뛰고 굴리고 굶어대면 10파운드정도는 뺄 수 있겠지만, 그래서 최소한 미련한 돼지같은 모습에서는 탈피할 수도 있겠지만 엄마를 위해서라도 금아는 그러기 싫었다.

당일 심한 몸살을 앓아서라도 나오지 말라는 엄마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날 금아가 안 나와 주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금아는 기를 쓰고라도,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당일 아프기라도 하면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상견례에 반드시 참석할 작정이었다. 사실 은아의 미래 남편이 될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를 골탕먹이기 위해서라도, 속을 상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갈 작정인 것이다. 엄마가 오만상을 찌푸리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기에. 은아한테는 좀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나와요, 지금”

생각에 잠겨 있던 금아는 정기훈의 목소리에 화들짝 깨어났다.

“나 운동하는 거라도 구경 해요. 당장 이리로 와요”

“…………”

“나올래요 안 나올래요?”

“………..”

“내 말 안들려요?!”

금아가 계속 대답을 하지 않자 정기훈이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온다고 할 때까지 전화 안 끊을 테니 그런 줄 알아요!”

끝까지 대답을 하지 못하는 금아.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하지 못하는 금아.

“운전할 줄 알지요?그나저나 차는 있어요?”

“……….”

“차가 없나 보네. 그럼 내가 지금 데리러 갈까요?”

이 남자는 참 쉽게도 속단한다. 차가 발인 미국에서 차도 없이 사는 찌질한 여자라고.

“거기에 꼼짝 말고 있어요. 내가 지금 갈 테니까”

“아…아녜요…..”

남자가 금방 전화를 끊고 금방 달려 올 기세라 금아는 황급히 말했다.

“차… 차.. 있…있어요……”

큰일이다. 진짜 집으로 쳐들어 오기라도 한다면.

“가…갈…갈께요.. 제가 갈께요. 갈 테니 오지 말아요…”

그나저나 이 남자는 부모형제도, 그리고 나 자신도 포기한 사람에게 왜 이리 집요한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지금 일어 났어요. 일단은 뭘 좀 먹어야 해요”

“지금이 몇신데?”

정기훈이 하~ 하고 한숨을 뿜어내면서 말했다.

“지금이 몇신데 이제 일어나요, 이제 일어나길….”

한심하다, 이 여자야! 하는 빈정거림이 들리는 것 같아서 금아는 얼른

대답했다. 잠을 전혀 못잤어요.못자다가 새벽에야 겨우 눈을 붙혔어요…..

사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네시까지 뒤척거리다가 다섯시쯤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갔다. 그리고 뒷뜰에서 담 배 한대를 피우고 여섯시 가까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가 소변이 마려워 깼다.

커피 한 잔을 아침 대신에 마시고 다시 침대로 기어들어가 잠을 더 청하려하는 판에 정기훈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뭣 좀 먹고 그리고, 그리고 갈께요”

시간을 조금 벌 작정이다. 거울은 안 봐도 뻔하다. 미친년 같겠지. 일단 라면이라도 끓여먹고 샤워하고 -며칠째 샤워를 안하고 있다- 땀 냄새를 풍기면서, 담배쩐 내를 풍기면서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머리도 묶어야 한다. 정말이지 사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펄럭거리며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니까.

“몇시까지 올 수 있어요, 그럼?”

금아는 거실로 나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아홉시 사십분이 좀 넘었다.

“열…열한시….”

“그래요. 그럼 열한시”

정기훈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 꼭 지켜요. 바람맞히기 없기! 알았죠?”

알았어요, 하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금아는 전화를 끊는다. 금아는 팔짱을 끼고 집안을 서성거린다.

정기훈의 우격다짐에 의해 나가겠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금아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라면을 먹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묶고 그리고 대문 밖을 나설 확신.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조금씩 가면서 나가지 않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굳히는 금아다.

그래. 여지껏 나 하고 싶은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왔다. 내키지 않은 데를 강요에 의해서 굳이 나갈 필요가 없다. 내가 거길 뭐하러 가는데…..

금아는 전화기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사람을 무작정 기다리게 할 수는 없으니까 전화를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금아. 그러나 선뜻 정기훈의 전화번호를 누르지 못한다.

전화하면 이러고 저러고 말이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그냥 문자 메세지를 때릴까.

생각해봤는데요. 도저히 안 되겠어요. 나가지 않을 테니까 기다리지 마요.

그러나 생각만 하는 금아다. 금아는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

금아는 침대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10시가 되기를. 10시 30분이 되기를. 그리고 10시 45분이 되기를.

시간이 무척 더디 간다. 시간 보내는 데는 영화가 최고지, 하고 금아는 텔레비젼을 튼다. 마침 ‘귀여운 여인’이 재방영되고 있었다. 20여년 전에 처음 상영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서른 번은 더 본 영화. 제목처럼 줄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모습과 리처드 기어의 섹시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금아는 영화에 몰두하려고 애를 쓰면서 텔레비젼의 화면으로 눈을 고정한다. 그러나 1분에 한번씩 전화기의 액정화면을 확인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남자는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빼고 내 모습을 찾고 있을까….

리처드 기어가 준 크레딧 카드로 쇼핑을 나가는 줄리아를 보여주는 장면에서 마침내 전화기의 액정화면이 11:00를 가르켰다. 드디어 11시가 되었다!

금아는 손으로 가슴팍을 지그시 누른다. 불안하고 초조하고 복잡하던 마음이 11시가 되자 차라리 홀가분해지는 걸 느꼈다.

몇분 더 기다리다 그는 알았으리라. 내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단념했으리라. 지금쯤 집으로 돌아가고 있겠지. 실망으로 발걸음이 처졌을까. 아니면 괘씸해서 속을 부글부글 끓였을까.

일단 커피를 한잔  마셔야지 하고 금아는 부엌으로 나갔다. 주전자에 물을 받고 있는데 띵똥, 하고 문자메세지가 도착했다는 신호가 왔다.

금아는 주전자를 스토브에 올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정기훈의 이름이 떴다. 정기훈이 전화를 하지 않고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금아는 전화기를 들고 뒷뜰로 나갔다. 그리고 나무 의자에 가 앉았다.

정기훈이 보낸 것은 시 한편이었다.

 

-날개-

천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시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데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을 거야.

벼랑 끝, 아니야. 하나님이 날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 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자리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 내셨다.

그리고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마지막 한 줄. 날개를 펴세요. 금아씨!

금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손에서 전화기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볼을 타고 눈물이 겉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팔에다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으흐흐흐, 하고 소리 높여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