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정기훈은 또르르, 또르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시계를 보니 두시였다. 잠결에서도 정기훈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새벽에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네다섯시 즈음.

남들 다 깊은 잠에 빠졌을 새벽에 가게문을 여는 사람들로부터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아침 식사를 파는 식당이나 도너츠 샵등에서 갑자기 기계가 말썽을 피우니 빨리 와서 고쳐달라는 전화. 그러나 새벽 두시에 그런 전화를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던지라 정기훈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오는 전화치고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는 법은 거의 없으니까. 새벽에 오는 전화는 거의 불길한 전화이다. 몇 년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도 새벽 두시쯤 받았던 것이다.

밤새도록 이상한 꿈에 시달려서 몽롱하고 지끈지끈 아픈 머리로 정기훈은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제발 한국의 가족들로부터 온 전화가 아니길 빌면서. 어머니 신상에 관한 전화가 아니길 빌면서.

“뭐해? 지금 자는 것 아니지?”

미연이었다. 정기훈은 휴우~ 하고 소리나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응, 그럼 안 자지….”

어쩌다가 한번씩, 잊어버릴 만 하면 미연이에게서 이런 시간에 전화가 온다. 그녀는 미국이랑 한국의 시차를 확인도 안 하는지 항상 이렇게 엉뚱한 시간에 전화를 한다.

“거기 몇시야, 지금?”

“초저녁이야”

새벽 두시라고 하면 미연이가 미안해 할까봐, 그리고 더 자라면서 얼른 전화를 끊어버릴까봐 정기훈은 짐짓 거짓말을 한다.

“저녁은 먹었어?”

“그럼 먹었지…..”

정기훈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부엌으로 나간다. 이왕 깬 잠,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심산이다.

“나 자기한테 일러줄 말이 있어서 전화 했어”

“뭔 말?”

정기훈은 수돗물을 틀었다.

“나 결혼해 ”

처음엔 스텐레스 주전자에 떨어지는 수돗물 소리에 잘못들은 줄 알았다. 어리벙벙해서 주전자에 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잠시 멍하니 서 있는 정기훈. 얼른 거기에 대해 대꾸를 하지 않자 미연이 재차 말했다.

“나 결혼한다고…”

“그..그…그러니….”

“축하 안 해줘?”

미연이가 어리광을 잔뜩 담은 목소리로 말한다.

“축하해 줘. 자기한테로부터 축하 인사 받고 싶어”

“그..그래…추..축..축하 해”

정기훈이 입술을 달싹거려 가까스로 한마디 했다.

“상대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

“자기 기억해? 학교다닐 때 나 무지하게 쫒아다녔던 영민이…. 다리가 유난히 길어서 별명이 ‘학다리’였던….”

“……….”

“영민이가 재작년에 이혼하고 혼자 되었대. 내가 자기랑 헤어지고 한국에 혼자 나와있단 소식을 우연히 들었나봐. 서너달 전에 연락이 왔더라…..”

“……….”

“그래서 그동안 몇번 만났었는데 어젯밤에 프로포즈를 했어”

“………..”

“결혼하자는 프로포즈…….”

“그..그래서…그래서 그 프..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니?”

“그럼. 당연히!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그 사람, 아버지가 하던 수산업을 물려받았는데 건실하고 탄탄하게 잘 운영하고 있나봐. 직원 수만 100명이래….”

종업원 한 명없이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당신과는 격이 다르지, 하는 말 같이 들려 정기훈은 입술을 깨문다.

그나저나 참 다행이다. 어둠속에 내내 묻혀 있을 줄만 알았던 미연이가 밝은 양지쪽으로 나와서. 그렇지만 정기훈은 마음이 싸하다. 그리고 욱신욱신 아프다. 어떻게든 다시 합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다시는 생각해 볼 수 없는 인연이 되어버렸구나……

“몸은 좀 괜찮니?”

몇달전 창우가 찍어 보내온 사진에서 비대하게 불어나 있던 미연이를 생각하며 정기훈이 물었다.

“아픈 데는 없어?”

“응.. 안 아파. 지금 나 살도 많이 뺐다? “

“그으래에?”

“나 요즘 운동하러 다녀.아침 저녁으로 두번씩”

“두..두번씩이나?”

“ 영민씨가 나 처음 보고 얼마나 깜짝 놀라야지. 창피해 죽을 뻔 했네…..”

“……….”

“지금까지 7키로 정도 뺐는데 결혼식까지 15키로 정도 쯤 더 빼 보려고….”

“………..”

“결혼식은 이번 가을에 하기로 했어. 9월 초쯤….”

“…………”

“그때까진 충분이 뺄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예쁜 드레스 입으려면 죽어도 빼야 돼….”

“………….”

“나 살 빼는데 영민씨가 많은 자극이 되었더랬어. 많은 도움도 되었고……”

내가 미연이의 살 찌는 이유였었는데 영민이란 친구는 살 빼는 이유가 되었구나……

“사실 내 몸도 이렇고 정말 나가기 싫었는데 하도 간곡하게 애원을 하는 바람에 그냥 옛 친구 얼굴이나 한번 보자 싶어 나갔었거든. 그랬는데 살도 빼게 되고 이렇게 결혼까지 하게 되네. 인연이란 참 묘하지…”

그렇다. 인연이란 묘하다. 그렇게 엮어지게 될 줄이야.

“어쨌든 다른 사람이 아니고 영민이라니 조금 안심은 되네……”

정기훈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영민이란 친구,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자라서 그런지 바다처럼 탁 트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순박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었다. 영민이라면 미연이가 안심하고 남은 인생을 맡겨도 괜찮을 만한 친구였다.

그러나 그러나 왜이렇게 허망하고 허전하지…

가슴 한켠으로 휘이잉하고 찬바람 한줄기가 지나가는 느낌에 정기훈은 몸을 움츠린다. 그는 안 떼어지는 입을 힘들여 다시 뗀다.

“다..다시 한번 축..축하해……부디…부디…잘…잘 살았으면 좋겠다…”

“창우도 영민씨를 아주 좋아해. 영민씨에게 딸만 둘이거든. 세 아이들이 벌써 오누이들같이 사이가 아주 좋아”

“다행이네…..”

“결혼날짜 확정되면 다시 연락할께…..”

다시 연락을 할 필요까지야. 그러나 정기훈은 아무소리 하지 않는다.

정기훈은 현관벽에 걸어놓은 작업복에서 담배갑을 꺼낸다. 피우지는 않고 손님을 위해서 늘 가지고 다니는 담배. 그러다가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을 만큼 열이 뻗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한대씩 피우는 담배.

정기훈은 담배를 물고 베란다 문을 연다. 새벽 공기가 제법 차갑다. 여름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공기는 벌써 초가을이다.

미연이가 그렇게 금방 결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둘다 입밖으로 말은 안 했지만 언젠가는 서로 합쳐지는 것을 소원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자리를 잡아 미연이랑 창우를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이려고 했었다. 그래서 옆눈 한번 안 팔고 열심히, 그야말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랬는데 알고보니 그 생각은 순전히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상대방은 떡 줄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는데 혼자 지레짐작으로 김칫국을 마셔대고 있었던 거다.

이제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이제부터 죽기살기로 열심히 돈을 모을 필요가 없겠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좀 괘씸하기도 한 복잡 미묘한 감정이 정기훈을 에워 쌌다.

정기훈은 다시 거실로 와 식탁 위에 던져두었던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뽑아들었다. 담배란 이럴 때 피우려고 있는 거란 생각을 하면서.

정기훈은 담담하려 애썼다. 미연이랑은 더 이상 인연이 아닌 게지. 우리에게 주어졌던 인연이 다한 게지. 이제 내게도 맞는 인연이 어딘가에 있겠지…..

이제부터 가까이 있는 여자들에게 눈을 돌리고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정기훈은 생각했다. 따지고보면 정기훈은 외롭고 쓸쓸한 신세였다. 아무도 없는 낯선 땅에서 혼자 산 지가 벌써 몇년인가 말이다. 그동안은 한국에 있는 미연이를 떠올리며 외롭고 쓸쓸하다는 생각을 지우려 노력했었다. 여자들의 심심찮은 유혹도 있었으나 애써 배제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어졌다.

담배 한대를 다 피우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우려던 찰나였다.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이 새벽에 또 누구지? 미연이가 다시 전화를 했나?

정기훈은 액정화면도 확인하지 않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아. 정 사장! 안 자고 있었군?!”

펄쩍 뛸 정도로 반가와 죽겠다는 톤의 남자 목소리였다.

“전화 받아줘서 정말 고마와! 안 받으면 어떻게 할까 무척 걱정했었는데!”

“누구요?”

“ 아, 나? 나 ‘킹스 도너츠’ 오사장이야”

킹스 도너츠라면 보름전에 새로 문을 연 가게다. 금아가 사는 집이랑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우리 지금 큰일 났어!”

남자의 목소리는 절박하고 급박하다.

“도너츠를 튀기려고 기름솥에 불을 당겼는데 이게 고장이 났나봐. 틱틱 불꽃만 요란하게 튀고 불이 안 붙혀져!”

“그래요?”

“ 빨리 좀 와 줘. 좀 있으면 손님들이 몰려들 텐데 얼른 이걸 고쳐야 도너츠를 튀기든 말든 할 것 아냐!?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래서 중고를 사는 게 아닌데.. 돈 몇푼 아끼려다 일만 크게 만든 것 같아. 어쨌든 빨리 좀 와야겠어. 10분 만에 올수 있지?”

정기훈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잠도 안 올 텐데 일이나 하자. 내 곧 가리다하고, 정기훈은 전화를 끊는다.

오사장네 도너츠 가게로 간 정기훈은 거의 두 시간에 걸쳐 기름솥을 손보아야 했다. 마침내 힘차게 다시 불이 일어났고 오사장은 환호성을 올렸다.

“당신은 마이다스의 손이야. 내가 고쳐보려고 갖은 용을 써도 안 되던 기계가 어찌 당신 손을 타니까 되지?”

정기훈은 감탄해 마지 않는 오사장과 커피 한잔을 마셨다.

오사장으로부터 작업 대금을 받으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보니 벌써 다섯시였다.

오전 여덟시에 한 가정집에 예약이 잡혀져 있다. 며칠전부터 에어컨디션이 말썽을 피운다며 와서 봐 달라는 집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예약이 오후 2시에 있고 그 외에 오늘 다른 일은 없다. 여름철에 들면서 일이 좀 한가한 편이다.

일단 집에 가서 샤워를 한 다음 아침을 먹고 여덟시에 잡힌 예약에 갔다가 운동을 하러가면 되겠구나 생각하면서 정기훈은 도너츠 가게의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정기훈은 보았다. 도너츠 가게 옆에 위치한 건물, 편의점으로 들어가고 있는 한 여자를. 그리고 그 여자가 금아라는 알아차리는 데는 일분도 걸리지 않았다. 금아가 입고 있는 옷, 옷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한, 어쨌든 그 옷을 보고 금방 알수 있었다. 금아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작업하면서 늘 보았던 옷이기에.

정기훈은 트럭에 얼른 올라 탔다. 트럭이 주차한 방향이 편의점 출입문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3,4분 후 금아가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편의점 앞에서 무언가를 뜯는 것 같았다. 그것이 담배갑이라는 것을 정기훈은 금방 알수 있었다. 날이 밝기 전이라 주위는 어두었지만 편의점에 켜진 불빛이 밖에까지 새어나와 정기훈은 금아의 행동을 낱낱히 볼 수 있었다.

금아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편의점 입구 시멘트턱에 철퍼덕 앉았다. 그리고 허공에 시선을 두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반딧불처럼 빨간 담뱃불빛이 깜박거리며 금아의 손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작업복 차림을 한 두어명의 남자가 편의점으로 들어가려다 금아를 보고는 저희들끼리 뭐라뭐라하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금아의 몰골은 멀리서 보기에도 영락없는 거지꼴이었다. 넝마같이 추레하고 비루했다. 입은 옷도 그렇고 머리모양도 그렇고 얼굴 표정도 그렇고.

그 중에서 금아를 가장 많이 지쳐보이게 하고 초라해 보이게 하는 것은 머리였다.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서 잡초처럼 마구 뻗친 머리. 더구나 머리색깔은 드문드문 회색빛을 띄고 있었다.

히끗히끗 세기 시작한 금아의 머리카락이 편의점에서 새어나온 불빛에 빛나는 걸 보면서 정기훈은 생각했다.

저 여자는 몇살이나 되었을까. 짐작하기에 삼십대 중반 아니면 후반이다. 아직 머리가 쇨 나이는 아니다. 그런데 그 어떤 무겁고 힘든 짐이 저 여자의 머리를 저렇게 벌써 쇠게 했을까. 머리가 세어질 만큼 그녀를 큰 고통에 빠트린 짐은 무엇이었을까……

정기훈은 차문을 열고 나가고 싶었다. 금아에게 아는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 새벽에 잠 못 이루고 나와 길바닥에서 담배를 피우는 이유가 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또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왜냐면 지금 금아는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있는 사람이기에.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형편없는 몰골로 남들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길바닥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지 않을 것 같았기에. 아는 척을 하는 것은 크나큰 실례일 것 같았다.

금아는 담배를 다 피운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오른쪽 길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손에는 비닐 봉지가 하나 들려 있었다. 축 늘어진 형태로 봐서 술병인 것 같았다.

새벽 다섯시, 잠도 자지 않고 걸어서 편의점으로 담배를 사러 나온 여자. 그리고 술을 사가는 저 여자.

도대체 저 여자는 왜 저러고 살까. 무엇이 저 여자를 그렇게 황폐하게 만들었을까.

정기훈은 미연이를 생각 했다. 미연이는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종달새처럼 까르르 웃기도 잘 하고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기도 잘 했던 여자가 나 때문에 황폐해졌다. 그런데 저 여자, 금아는 누가 저렇게 만들었을까.

피트니스 선물권을 건네준 후 그곳에 가면 정기훈은 자신도 모르게 출입문 쪽을 기웃거리게 되었다.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줄 알면서도 시선이 출입문 쪽으로 가는 것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단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금아가 그곳에 나타날 것을 기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왜냐면 정기훈은 알았기에. 세상 다 산 듯 모든 것을 체념한 여자들은 웬만한 자극이나 동기유발이 되지 않으면 꿈쩍도 안 한다는 것을. 정기훈은 그런 사실을 미연이를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미연이가 영민이를 만나고부터는 운동을 하기 시작했단다. 살을 7키로나 뺐단다.

저 여자 금아도 그런 동기유발을 하게 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내가 저 여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정기훈은 운전대에 양손을 걸친 채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도 저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막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 정기훈의 머리를 안개처럼 슬금슬금 채웠다. 관심이라든가 애정이라든가 하는,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은 조금치도 없었지만, 그야말로 손톱 끝 만큼도 없었지만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정기훈은 어쨌든 시도는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은 없었다. 금아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자신. 움추려 든 금아의 날개를 다시 펴서 날게 할 자신.

그때 정기훈의 머리를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바로 ‘날개’ 라는 시였다.

미연이와 창우가 한국으로 떠나고 난 후. 그 누구에게도 아무 쓸모없는존재라는 자괴감에, 그리고 인생 낙오자라는 실패감에 마냥 가라앉아 있을 때, 한국의 여동생이 보내 준 시였다.

‘지금 오빠가 처한 상황이 벼랑 끝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오빠에게는 힘찬 날개가 있어요. 푸른 창공을 비상(飛上)할 수 있는 날개’ 라는 짤막한 편지와 함께 보내져 온 시.

그 시는 당시의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정기훈에게 많은 위로와 힘이 되었다. 정기훈은 생각 했다. 그래, 금아의 움추려 든 날개를 펴게 해 보자.

그날 정기훈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 금아에게 접근을 해야할 지를 내내 궁리했다. 무작정 차 한잔 하자고 나오라면 열에 아홉은 거절당할 가능성이 있을 터, 가장 쉽고 자연스런 방법은 지난 번 건네준 피트니스 회원권에 대한 거로 말문을 여는 거였다.

첫번째 손님이 의뢰한 작업을 마쳤을 때는 9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정기훈은 바로 피트니스 센타로 갔다. 이른 새벽이나 퇴근 무렵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북적되던 피트니스 센타는 한산했다. 하루중 가장 사람이 적을 때 였다.

정기훈은 운동복으로 갈아 입고 매점에서 물 한병을 사들고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금아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전화벨이 여섯번이 울릴 때까지 금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새벽 다섯시에 깨어서 밖에 나와 있던 여자가 다시 깊은 잠에 빠진 것일까. 혹시 이 전화가 그녀의 잠을 깨우는 것은 아닐까. 나중에 다시 걸어 볼까, 하고 망설이던 정기훈. 도대체 지금이 몇신데 하는 오기가 갑자기 생겨났다. 그래서 다시 리다이알을 했더니 거짓말처럼 금아가 전화를 받았다. 밤새 목놓아 통곡한 여자처럼 금아의 목소리는 탁하고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대답이 없을 줄 알았던 전화기에서 금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정기훈은 조금 당황스러웠으나 뭐해요, 하고 얼른 물었다. 금아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재차 물었을 때 아무 것도 안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아무 것도 안 하고 있겠지. 뭘 하고 있을 여자가 아니다.

피트니스 센타로 나오라는 말을 하면서도 정기훈은 금아가 쉽게 예스하지 않으리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금방 예스, 한다면 금아라는 여자가 아니지…

예상대로 금아는 ‘노’라고 대답 했다.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고 마침내 나오겠다는 대답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러나. 정기훈은 기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얼굴을 나타 낼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정기훈은 또한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 하는 마음은 없잖아 있었다. 세상에는 ‘뜻밖’이라는 일도 가끔은 존재하므로. 그래서 정기훈은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돌려서 금아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미안하게도 그 뜻밖의 일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열한시를 넘기고 열한시 5분을 넘기고 10분을 넘겼을 때 정기훈은 금아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바람을 맞았으나 괘씸하다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면 처음부터 기대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저 조금 안타까왔다.

왜 사람을 바람맞히냐고 또 전화를 할까, 하는 생각에 정기훈은 전화기를 들여다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친 정기훈은 금아에게 전화하는 것을 단념했다. 대신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던 날개를 금아에게 날려 보냈다. 예전에 자기가 그랬듯이 금아 역시도 날개를 펴고 훨훨 날게 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정기훈은 출입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 예약 시간인 두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기는 했지만, 금아와 통화하고 금아를 기다리느라 제대로 된 운동은 못한 상태다. 그러나 그 곳에 별로 머물고 싶지 않은 정기훈이었다. 딱히 할 일도 없고 집에 가서 새벽에 설친 잠이나 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정기훈씨 아니세요?”

정기훈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트머리를 한 여자가, 짧은 머리때문에 목덜미가 눈부시게 희어보이는 여자 하나가 서 있다. 핑크색과 하얀색이 어루러진 타이트한 운동복을 입은 여자 하나가.

“정기훈씨 맞지요?”

정기훈은 고개를 끄덕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자이지만 일단은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여자니까. 사진이 포함된 광고가 한국신문에 실리면서 이렇게 아는 체를 해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정기훈은 생각했다. 이 여자도 그중 하나이겠지….

여자가 손에 들고 있던 아령을 땅에 놓고 정기훈이 있는 쪽으로 걸어 오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혹시나 했더니 맞군요. 신문에서 보았어요, 정기훈씨 얼굴…”

이번에도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군, 하며 정기훈도 가볍게 목례를 했다.

“운동 끝나셨나요?”

“예에….”

“그러면 요 앞 커피샵에서 잠깐 봬면 어떨까요?”

“무슨 일로…..”

견적이라면 커피샵에서 잠깐 봴 일이 아니라 현장을 직접 살펴봐야 한다.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여자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말한다. 정기훈은 여자를 살펴보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알맞은 키에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알맞은 몸집에 흰 피부를 가진 여자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자다. 나이는 한 서른 서넛쯤 되었을까?

“저 여기서 운동 시작한 지 일주일 쯤 되었는데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예에….”

“전 퇴근하고 오후에 오니까 어쩌면 못봴 수도 있었겠네요”

“예에. 그나저나 무슨 일로?”

“오늘은 제가 회사를 안 갔어요. 일년에 한 번씩 하는 정기 첵업이 있어서 의사를 만나느라…”

“예에…그래서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십니까?”

의사를 만나든 장의사를 만나든 내 알 바 아니고 어서 이유를 대란 말이다, 이 여자야. 무슨 일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지, 하는 말을 얼굴 표정으로 나타내면서 정기훈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자는 빙글빙글 웃기만 할 뿐 입을 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요 앞에 커피 샵 있죠? 저 샤워하고 금방 나갈 테니 거기서 좀 기다려 주실래요?”

참 이상한 여자도 다 있다. 용건이 있으면 용건부터 말 할 일이지. 정기훈은 인상을 쓴다.

“이봐요”

정기훈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 말부터 해요”

정기훈이 큰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했으나 여자는 조금도 그 기세에 눌리는 낌새가 아니다. 그저 빙글빙글 웃기만 한다.

“비싸게 굴지 마시구요. 한 삼십분이면 되니까”

삼십분이나! 아연한 듯 입을 벌리고 있던 정기훈은 할 수 없다는 듯 여자에게 일갈했다.

“오분 내로 나와요, 그럼. 그렇지 않으면 바람처럼 가버릴테니까”

“오분은 너무했고 십오분이요.십오분 괜찮죠?”

괜찮지 않지만 여자랑 더 이상 실갱이를 하기 싫은 정기훈은 고개를 끄덕, 한다. 사실 급한 일도 없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지 않았나 말이다.

피트니스 센타 바로 앞에 위치한 커피샵은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운동복 차림의 손님들로 가득 했다. 음악소리, 대화 소리, 전화벨 소리에 옆 사람 목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복잡하고 어수선했다. 작고 깨끗한 공원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커피를 사기 위해 줄을 서면서 정기훈은 금아랑 처음 만났던 작은 공원을 생각해 냈다. 이 여자를 얼른 만나치운 후 금아에게 다시 전화해서 그 공원으로 나오라고 해 볼까……

커피 두 잔을 사서 들고 정기훈은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 덥기는 했지만 바깥이 나을 것 같아서. 정기훈은 파라솔이 처진 그늘 밑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잠을 설쳐서인지 눈이 따갑고 쓰라리다. 정기훈은 의자 뒤로 고개를 젖혔다.

“많이 안 기다렸죠?”

맑고 싱싱한 목소리이다. 정기훈은 눈을 떴다. 아까 그 여자다. 그 여자가 빨갛게 홍조를 띈 얼굴로 젖은 머리를 한 채 정기훈의 앞에 앉아 있다.

“급하게 오느라 머리도 말리지 못했어요”

정기훈은 말 없이 커피컵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고마와요”

여자는 목례를 하면서 컵을 받았다. 그리고 말했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할께요. 저는 미단이예요. 금아 친구 미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