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나이의 한 남자가 있다. 젊었을 때 잠시 빗나가서 뒷골목을 주름잡던. 팔뚝에 새겨진 문신과 담뱃불 지진 자국이 어두운 과거를 말 해주는. '살인' 빼고는 다 해봤다는 남자다. 지금은 신앙안에서 가정과 사업에 충실한 사람으로 거듭났지만.
그 남자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특히 아버지와 관계된 얘기를 할 때는 후회와 자책감에 젖어 눈물을 흘린다. 눈물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람같은데 자주 눈물을 보인다. 강하고 세보이는 사람일수록 속은 섬세하고 여리다더니 맞는 것 같다. 그는 말한다. 아버지가 되어보니, 그리고 아들이 예전의 자기처럼 속 썩히니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작년 겨울, 그가 한국에 갔다왔다. 형제들과 오랜만에 한 잔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는데 여동생으로부터 그동안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늘 호통과 야단만 치던 아버지. 그래서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나 하는 사실을 여동생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내가 몇년동안 집을 나간 적이 있었지. 당시 우리집이 기차역 옆에 있었는데 여동생 말에 의하면 기차가 도착할 때마다 아버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역으로 쫒아 나가셨대. 그리고는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역전에 우두커니 서 계셨대….. ”
아버지는 가출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매일 기차역으로 나갔던 것이다. 기차에서 내린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찾았을 아버지. 끝내 돌아오지 않는 아들, 황망한 심정으로 돌아 서서 터덜터덜 집으로 왔을 아버지. 그때의 아버지의 심경을 헤아릴 때마다 가슴이 저린단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어 아무리 효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마다 폭포같이 눈물이 흐른단다.
걱정 근심이란 없이 사는 사람같이 항상 재미있고 유쾌한 D씨. 그러나 딸 얘기만 나오면 진지해지고 심각해진다. 최근 사춘기에 접어 든 틴에이저 딸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딸이 최근에 남자 친구를 사귀기 시작하며 걸핏하면 반항하고 자신의 말을 거역한다는 것이다. 이 풍진 세상에 딸이 바르게 성장해날까 늘 노심초사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딸 얘기를 할 때는 그도 천상 '아버지'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 세대의 아버지란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과묵했고 자식들에게 속내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았기에.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을 먹이고 공부를 시키는 게 자신들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다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소통이 없었던 아버지랑은 정이 없는 자식들이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아주 어릴 때 빼놓고는 아버지랑 마주 앉아 살가운 대화를 나눠 본 기억이 거의 없다. 20여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나 올 때도 나랑 아버지랑 나눈 대화는 딱 두 마디였다.
" 아부지, 내 간대이...."
" 오냐. 가그라...."
그 흔한 포옹 한 번 안 하고 헤어졌던 우리. 그렇게 맨숭맨숭하던 우리 사이였기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나는 별로 슬프지 않았다. 동네 거지란 거지는 다 불러다 밥을 먹이던 인심좋은 아버지였던지라 조문객들만 천명 가까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들으면서(아버지 상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한국에 나가서 얼굴을 보고 왔던지라 상(喪) 치르러 다시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갈 때도 시끌벅쩍하네,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10여년이 넘는 지금. 이제야 나는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서야 그리운 사람이다’는 말을 실감한다. 아부지 뭐하노,하고 전화하고 싶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언제든지 전화할 수 있고 찾아 갈 수 아버지가 있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사람이 나는 무척 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