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매주 한두번은 지인들과 저녁을 먹으러 간다는 칼럼을 읽은 몇몇 사람들이 빈정거렸다.
"인기 많아 좋겠네.요즘 같은 지독한 불경기에 매주 밥 먹을 일이 있다니 말이야. 나한테는 일년 열두달 가도 밥 한끼 사겠다는 사람이 없던데."
내가 낼름 대답했다.
"일단 내가 먼저 사면 사 주겠다는 사람도 자연히 생기지"
주위에서 그러는데 내게 딱 두 가지 장점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밥을 잘 사는 것. 돈에 쪼들려서 집에서는 김치하고 밥만 먹고 앉아 있을 망정 밖에서는 일단 내가 밥값을 내야 맘이 편하다. 내 글을 좋아해서 꼭 밥을 한번 사주고 싶다는 독자를 만나러 나가서도 그렇다. 얼른 상대방 모르게 밥값을 내고 온다. 몇몇 친한 사람 빼놓고는 내가 얻어먹게 되면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개운치가 않으니까.
그래서 늘 손해보는 인생을 사냐고? 그건 아니지. 일년에 두 차례에 걸쳐 본전을 뽑는다. 내 생일, 그리고 크리스마스. 평소에 내가 부지런히 밥 샀던 이들한테 선물사라고 종용한다. 선물이라야 내가 단골로 가는 '로스' '마샬' 50불짜리 선물권이 고작이지만.
또 하나의 장점은 나랑은 대화가 잘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속상하고 화난 일이 있어도 나랑 한동안 대화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고 기분이 안정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전문적으로 카운셀러 공부를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리고 쉽게 말한다. 대화하라고. 대화없는 부부가 이혼하고 대화없는 부모자식은 관계가 단절된다. 하루에 5분이라도 시간 내 대화 해라....
돈독한 부부관계를 조언하는 책에도 보면 첫 번째를 대화로 꼽는다. 그런데 그 대화라는 게 쉬운 것 같지만 어렵다. 관계개선이나 회복을 위해 대화를 시도했다가 오히려 더 악화되고마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내 경험에 의하면 대화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그 기술이라는 다른 게 아니다. 무조건 잘 들어주는 것이다. 화나서 씩씩거리는 상대에게 어줍쟎은 충고와 조언을 하지말고 그저 끝까지 들어 주는 것.
'앉아 있는 여자'란 내 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주인공 선희는 무능하고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무척 힘들다.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하소연 할 작정으로 전화를 한다. 그러나 선희가 입도 떼기 전 남자친구가 오히려 먼저 속썩이는 부모와 형제 얘기를 좔좔좔 쏟아놓는다. 이제야저제야 입 뗄 기회를 보던 선희는 그냥 전화를 끊고 만다.
우리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하소연이라도 할 요량으로 아는 사람을 찾았다가 그냥 단념하고 마는 경우를. 아니, 오히려 더 열이 뻗치고마는 경우를.
분하고 울화가 날 때 필요한 것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다. 당장 시시비비를 가려줄 사람이 아니라, 내 편이 되어 목청을 높혀 줄 사람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얘기를 들어줄 사람. 쌓이고 쌓인 분이 풀릴 때까지, 응어러진 것이 묽어질 때까지 중간에 촐싹거리며 끼어들지 말고 가만히 들어 줄 사람.
나는 그 일을 참 잘 한다. 인간아. 네가 훨씬 더 잘못했네, 소리가 하고 싶어 입이 달싹달싹 하지만 꾹 참고 일단은 상대방 속이 후련해 질 때까지 다 듣는다. 다 듣고나서 말한다.
"아이고, 그랬었구나. 참 속 많이 상했겠다"
그쯤 되면 한결 마음이 풀어진 상대방이 말한다.
"그런데 이계숙씨 생각에도 내가 정말 잘못한 것 같애?"
상대방이 내 생각을 물을 때, 그때 내 의견을 말하면 된다.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다 털어놓은 것만으로 어느정도 누그러진 상대는 내가 좀 심한 말을 해도, 이를테면 "가만 들어보니 당신이 좀 더 잘 못한 것 같다"고까지 해도 웬만하면 다 수용한다.
최근에 한 중국인 직장동료가 이혼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카운셀러를 찾았다고 한다. 그녀가 말했다.
"진짜로 돈 아깝더라.그럴 줄 알았으면 안 갈 걸. 카운셀러가 한 일이라곤 두 시간동안 응,응.그래서?하며 내 얘기를 무조건 듣고만 있는 거였어...."
들어 주는 것, 그게 바로 카운셀러의 역할이니까. 들어준다는 것. 어찌보면 참 하챦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못해서 인간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 하챦은 것을 잘 하는 ‘대단한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