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인 직장동료 Q가 최근에 연애를 시작했다. 한동안 뜸했다가 시작한 연애라지만 참 요란하게도 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문자를 주고받고 전화하는 것도 모자라 남자가 매일 저녁 Q의 집으로 온단다. 남자가 사는 곳은 발레호, 퇴근하기가 무섭게 한 시간 가까이를 운전해 오는 것이다.
Q가 말한다. 요즘 살 맛 난다고. 행복해 죽겠다고.
어느날 책상 위에 던져둔 내 전화기를 Q가 보게되었다. 마침 남편한테서 문자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헤이, 오늘 저녁 친구와 금 캐러(남편의 취미는 금캐기다) 두어시간 나갔다 온다. 강아지가 뭘 잘 못 먹었는지 두번 토했으나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Q가 그 문자를 읽더니 기함을 했다. 어떻게 와이프한테 보내는 문자가 이렇게 무미건조할 수 있냐는 거였다.
“세상에, 만상에! 헤이가 뭐냐, 헤이가? 어떻게 부인을 헤이라고 부르냐. 적어도 ‘하니’나 ‘스위티’ 정도는 불러줘야지! 그리고 문자 끝에 ‘아이 러브 유’나 ‘아이 미스 유’ 정도는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야? "
Q가 말했다. 이 문자는 사업하는 사람들간에나 주고받는 내용이지 절대로 부부 사이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Q가 또 덧부쳤다.
“만약 내 남자친구가 이런 식의 딱딱하고 형식적인 문자를 보냈다면 사랑이 식은 것으로 간주하고 단번에 관계를 끝낼 거야”
끝낼 관계가 있어 좋겠네....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야야, 너도 20년 결혼생활 해봐라. 하니고 스위티고 다 귀찮다. 생각만으로도 닭살오른다”
사실 남편과 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무덤덤했다. 나야 워낙 뻣뻣하기가 장작개비같으니 그렇다치고 애정표현이 생활화되어 있다는 미국사람인 남편도 그런 달콤한 말을 할 줄 몰랐다. 아니, 안 했다. 눈만 마추치면 ‘아이 러브 유’하는 게 호들갑스럽고 과장스러운 것 같아 거부감이 든단다.
또한 멀쩡한 이름두고 왜 쓸데없이 다른 호칭을 쓰냔다. 그의 전화기에 나는 ‘계숙 리’ 라는 성과 이름으로 저장돼 있다. 내 전화기에도 그의 성과 이름으로 돼 있고. Q의 말대로 사업동지처럼.
그렇다고 남편의 사랑을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 왜냐면 그는 말로 아닌 행동으로 몸소 보여주니까.
지난 주말을 끝으로 죽어있던 내 웹사이트가 완전히 복구되었다. 거의 한 달이나 걸린 긴 작업이었다. 놀라지 마시라. 그 일을 남편이 다 했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남편이.
어제까지도 멀쩡하던 내 웹사이트 '계숙 닷컴'에 갑자기 접속을 할 수가 없게되어 남편이 웹호스팅 회사와의 수십번 전화와 이메일을 하면서 고쳐보려 노력을 했다. 결론은 다시 살릴 방법이 없다는 것. 10년동안 올렸던 글들이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할 수 없이 다른 웹호스팅 회사를 정해 ‘계숙유에스에이 닷컴’이란 새 도메인 주소를 받았다. 계숙에서 유에스에이가 더 붙은 것이다.
컴퓨터의 문외한인 나는 거기서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예전 글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다시 올려야 (남편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쓴 글들을 자기 컴퓨터에 모두 저장해 두고 있었다)한다는 것.
내 사이트가 안 된다니까 살 맛이 안 난다는 수많은 독자들의 연락을 받고 기분좋아 둥둥떠 있었던 나는 기가 딱 질렸다. 산더미같은 글들을 언제 다 업로드하나! 생각해 보라. 일 주일에 한 번씩 쓴 중앙일보 칼럼만 해도 10년치가 넘었다. 거기다 책 수십권 분량의 소설과 넌픽션과!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못한다. 사이트를 그냥 없애버리는 게 낫겠다.
남편이 말했다.
"당신 사이트 복구되기를 기다리는 독자들은 어떡하고?"
남편은 묵묵히 혼자 그 일을 시작했다. 주말에도 꼬박 컴퓨터에만 붙어 앉아서. 한글을 전혀 쓰고 읽을 줄 모르면서 ‘감’만 가지고 복사, 붙여넣기를 수천번 한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도저히 못할 그런 작업을.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입만 가지고 하지 않는, 잘 표현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남들이 볼 때 부러워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요, 활활 타는 장작불이 아니다. 은은하게 있는 듯 없는 듯한 화롯불이다. 죽었나하고 뒤적거려보면 빨갛게 불씨가 살아 있는, 그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