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풀이방’에 남편한테 제일 짜증 날 때가 언제냐는 글이 올라왔다. 금방 댓글이 수십개 달렸다. 기껏 설거지 다 해놓았는데 라면 끓여달라고 할 때, 변기 물 내리지 않았을 때, 여기저기 옷 벗어 팽개쳐 놓았을 때,  반찬 투정할 때 등등. 그 중 하나가 나를 실소하게 했다. 내 눈에 띄일 때.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남편은 두 달에 한 번, 휴일에 '온 콜 (on call)'을 맡는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달려가봐야 하기 때문에. 금을 캐러다니는 취미가 있는 남편은 휴일이면 날 새기가 무섭게 산으로 내빼지만 '온 콜'에 걸릴 땐 할 수 없이 집에 있어야 한다.

그는 집에서 제왕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닥 안 한다. 언젠가 한번  K씨가 아침 나절에 우리집에 와서 저녁때까지 놀다 간 적 있는데 소파에 파묻혀 하루종일 꼼짝 안 하는 남편을 보더니 말했다.

“욕창 걸리겠다는 자기 말이 맞네. 어쩜 저렇게 하루종일 앉아 있을까?허리 아프지도 않나?”

일 주일동안 밀린 집안 청소하고 빨래하고 강아지 목욕시키고 침대보 갈고 나 혼자 동동 뛰어다니는데도 곁눈질도 안 하는 남편이다. 빈말로라도 뭐 도와 줄까 묻는 법도 없다. 옆에서 굿을 해도 개의치 않고 눈은 오로지 무릎에 올려놓은 랩탑과 텔레비전 화면에만 가 있다.

남의 잔소리로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게 인간의 습성이다, 하고 포기하고 체념하고 살지만 그 꼴을 보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차라리 눈에 안 띄었으면 좋겠다. 안 보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눈에 띄이니 짜증이 팍팍 나고 울화통이 치미는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며 한바탕 싸웠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다. 그렇다고 늘 싸워대면 어쩌나. 내가 참아야지. 그러면 화를 어떻게 다스리냐? 나만의 방법이 있다. 평소에 고마웠던 점을 떠올리는 것이다.

언젠가  한 지인이 들려준 얘기가 있다. 그녀가 한국에서 큰 형네와 잠시 같이 살은 적이 있는데 동서 시집살이를 아주 심하게 했단다. 그런데 그 혹독한 세월을 보냈으면서 지금도 그 동서를 미워하지 않고 고마워 하는 게 있단다. 그렇게 자기를 힘들게 했으면서도 연탄불에 신경을 써준 것이라고 했다. 여자는 따뜻한 방에서 자야한다면서 항상 연탄을 잘 갈아주었다는 것이다.

나도 남편에게 고마와 하는 게 두 가지 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그러니까 금방 뽑은 새 차를 우그러트리고 들어와도, 멀쩡한 차고 문을 들이받아 통째로 갈게 만들어도 화를 내거나 닦달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남편은 나를 위로한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지 하고.

또한 결혼 후 여지껏 내 손으로 차에 주유를 해본 적이 없다는 것도 있다. 폭풍이 심하게 몰아쳐도,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차에 기름없다 소리 들으면 나가서 채워 가지고 들어 온다. 그 고마운 일을 떠올리면 웬만한 것쯤은 그냥 넘어갈 수 있다.

내 주위에 다시는 상대를 안 했으면 하는 사람이 서넛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짜기가 왕소금이다. 지금까지 쓴커피 한 잔을 사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짠돌이가 예전에 한국의 내 동생들이 왔을 때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나를 대신해 샌프란시스코로, 리노로 데리고 다니면서 구경을 다 시켜주었다. 그게 고마워서 그 사람을 배척할 수가 없다.

미운 놈은 안 보면 그만이지 하고 싹둑 쳐낼 수도 있겠으나 이 먼 미국까지 와서 맺은 인연인데 그러기엔 너무 아쉽지 않은가. 아무리 한심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나랑 안 맞는 것 같은 사람이라도 찾아보면 한두 가지 좋은 점과 고마웠던 점은 있기 마련이다. 열 번 잘 한 것보다 한 번 섭섭한 것만 가슴에 두는 게 인간이라지만 나만은 열 번 섭섭한 것보다 한번 잘 한것을 고마와 할 줄 알자. 그게 풍요로운 인간관계를 위한 작은 지혜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