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준비를 하던 남편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신을 양말이 없네?"

얼른 달려가 보니까 정말 그렇다. 서랍에 가득하던 양말이 한 켤레도 없다. 잠시 암담한 표정을 짓던 남편은 세탁바구니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그 중 깨끗해 보이는 양말을 찾아 신고 나갔다. 착하기도 하지.

남편이 출근한 후 작정하고 빨래를 시작했다. 세탁실 바닥에 그냥 부려놓기만 했던 산더미 같은 빨랫감. 내가 생각해도 너무 하긴 했다.

딴 건 몰라도 빨래는 해가면서 게으름을 부려야겠구나.....

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은 늘 감탄한다.

"생긴건 무척 허술해 보이는데 살림은 어찌 그리 자로 잰 듯 빈틈없이 잘 할까"

그랬다. 나는 액자 한 끗 비뚤어져 있는 꼴을, 한 톨 먼지를 견디지 못했었다. 초년병사의 사물함처럼 딱딱 각 맞춰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휴일에는 청소가 나의 가장 큰 일이었다. 그리고 그동안은 청소하는 일이 제일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옛날 말이다. 지금은 집안에 돼지랑 같이 살아도 되게 생겼으니까.

설거지는 냄새가 진동하니 어쩔 수 없이 제때 하지만 빨래고 청소고 식료품 쇼핑이고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다. 하더라도 대충대충 한다.

그러다가 신고 나갈 양말이 없는 상태까지 발생한 것이다.

예전엔 그런 칠칠맞은 여자들을 정말로 이해 못했었다. 그렇게 해놓고 정신 사나워서 어찌 사는지. 그런 집안 꼴을 해놓고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는지. 

그러나 맘 놓고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요즘은 남의 집안 꼴 엉망인 게 이해가 간다. 할 일을 보고도 눈을 질끈 감으니 집안 쑥대밭 되는 것은 삽시간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지금까지 어떤 틀에 나를 몰아넣고 억지로 맞추면서 살았다. 한번 결심하고 계획한 규율은 곧 죽어도 실천하고 지키면서. 오죽하면 내 별명이 '칸트 박사'이겠나. 산책 나가는 걸 보고 동네사람들이 시간을 가늠했다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

11년간 기자 일을 할 때는 물론, 지난 12년 동안 중앙일보에 칼럼 쓰는 일도 단 한 번도 마감을 놓쳐본 적이 없다. 그만큼 내 자신을 들들 볶으며 살았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러니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왔겠나.

얼마 전부터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살아보려고 아둥바둥하던 한 여자가 아이 셋을 두고 세상을 떠나자 남편이란 작자가 기다렸다는 듯 부인이 남긴 보험금을 가지고 새장가를 드는 꼴을 보고 든 생각이었다.

나 역시 죽을 날이 가까워 오는데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계속 이러고 살까 하는. 그러거나 말거나로 대충대충 한번 살아보자 하는.

사실 그 전에도 모든 것 내려놓고 느슨하게 살아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타고난 성격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는 게 아니어서 도로 포기하곤 했었다. 그렇게 애써도 안 되던 것이 나이가 드니까 지금에야 되었다.

그렇게 살기로 작정하니 집안 꼴은 갈수록 말이 아니지만 참 좋은 게 하나 있다. 잠을 잘 잔다는 것이다. 나이 들면 잠이 없어진다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가 됐다. 평생 나를 괴롭히던 불면증에서 해방된 것이다.

일어설 때와 앉을 때 아이고, 허리야 다리야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아무리 비싼 크림 처덕처덕 발라도 주름살은 갈수록 늘고 흰머리도 슬슬 생기고 나쁜 눈은 더 나빠져 몇 미터 앞의 물체도 가늠할 수 없고 온통 나이 듦의 징조뿐이라 우울했는데 나이 드니까 좋은 점도 있다. 이렇게 느슨해지고 풀어지고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지는 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