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가면서 입맛도 변하는지 좋아하지도 않았던 음식들이 가끔 먹고 싶다. 잡채도 그 중 하나다.  한국 마켓에 갔더니 마침 당면 세일을 하길래 두 봉지 집어 왔다. 그런데 그 복잡한 걸 시작할 엄두가 도저히 안 났다.  그냥 묵히고 있는데 마침 음식 잘하기로 소문난  K씨가 놀러 왔기에 줘버렸다.

며칠 후  K씨가  그 당면으로 어묵 잡채를 만들어왔다. 잡채를 접시에 덜면서  K씨가 말했다.

"가만 보니  당면이  무색 무취예요. 그래서  어떤 음식과도 튀지 않고 다 잘 어울려. 국에도 찌개에도 탕에도.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 유난스럽고 별난 사람은 아무래도 기피하게  되지. 주위에 인기 많은 사람을 살펴보면 무엇보다 상대방을 편하게 하는 공통점이 있어"   

당면 하나에도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K씨다.  K씨가 덧붙힌다.

"이계숙씨야말로 당면같은 사람이야. 나이 여부를 떠나서, 남자 여자를 떠나서 항상 사람을 편하게 해주잖아"

아닌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랑 인연을 맺을 때 하나같이 다 그랬다.  처음 만나는 사이임에도 십년지기같이 편하다고. 

K또 다른 씨(남자)는 누가 날 칭찬하는 꼴을 못보는 사람이다.  오늘 이계숙씨 멋있네?하고 누가  내 차림새에 대해 언급이라도 하면 늘 읊어대는 레파토리가 있다.

"말을 말아. 미꾸라지 용 됐지. 20년 전의 이계숙씨는 진짜로 형편 없었어. 웃음기라고는 없는 무표정인 얼굴, 게다가 못 생기긴 왜 그렇게 못생겼을까. 옷이라고 입었는데 이건 상거지가 따로 없었지.  길 가다 만나더라도 쳐다도 안 보겠더라니까"

머리 나쁘다면서 기억력도 좋지.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이민 초기, 내가  청소일을 할 때,  K씨가 나를 두어번 봤었단다. 그 당시의 내 모습를 묘사하면서  걸핏하면 놀려대는 것이다. 나는 항변한다.

"이런 젠장. 낯설고 물설은 남의 나라 와서 ‘청소’라는 험한 일을  할 때였으니 몸과 마음이 당연히 찌들고 피폐해 있었겠지. 그리고 또 청소하러 가면서 멋부리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집에서 입던대로 대충 걸치고 갔으니 그렇게 보였겠지..."  

그러면서 K씨는 칭찬인지 흉인지 모를 말을 한다.

"내가 이래 봬도 말이야. 워낙 위대하신 몸이라 절대로 아무하고나 안 어울리는 사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계숙씨하고 어울려주는 이유는 요즘은 이계숙씨가 멋지게 변해 있어서야. 어딜 같이 가도 창피하지는 않으니까. 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어떤 심한 말로 놀려대도 화 안 내고 항상 하하하 웃어주니까"

그의 말인즉슨 내가 참 편한 사람이라서란다. 나이가 드니까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을 떠나서 무조건 ‘편한 사람’이  좋다는 것이다.

얼마전 지인들과 대화하던 중 만약 지금의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면  재혼을 할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 한 적 있다. 모두 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짓도 하고 복장터지는 일을 저질러서 패죽이고 싶을 만큼 미울 때도 있지만 지금의 배우자가 좋은 것은 팬티만 입고 집안을 활보해도 아무 거리낌 없는 사이라서, 편한 사이여서란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긴장하고 가슴 졸이는 일을 또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새 사람이 산뜻하고 신비로운 맛은 있겠지만  편한 사이로 발전될 때까지의 시간을 다시 체험하고 견뎌내기가  힘들 것 같단다.   

나도 그렇다. 편한 것이 좋다. 사람도 그렇고 옷도 그렇고 신발도 그렇고. 예전에는 꽉 졸려서 숨을 못쉬는 한이 있더라도, 발이 아파 절뚝거리더라도 예쁜 것, 멋있는 것만 선호했었는데  요즘은 신발장에 구두가  100켤레 있어도, 옷장 가득  옷이 넘쳐나도 늘 입고 신던 편한 것에만 손이 가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주위 사람들한테 얼마나 편한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