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엄청 더웠다. 한동안은 온도계가 최고 110도를 가리킬 정도로.

아무리 더워도 의지의 한국인인 내가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 시간 걷는 것을 빠트릴 수 있나. 열사병 걸린다고 주위에서 말리는 것도 듣지않고 매일 걸으러 나갔다.

어느 날, 출근하니 옆자리 멕시코인 동료가 휴대용 물병 하나를 내밀었다.  보니 어느 회사로부터 사은품으로 받은 거다. 웬 건가 어리둥절해하니 그가 말했다.

“앞으로는 걸을 때 물을 담아가지고 나가라고. 땡빛에 물도 없이 걷다가 탈진할까 진짜 걱정 되어서....”

나는 많이 놀랐다. 그리고 감격했다. 왜냐면 그는 내가 여지껏 본 사람 중 가장 지독한 짠돌이였기에.

1년전, 내 옆자리로 이동해 왔을 때부터 나는 그를 많이 챙겨주었다. 저녁도 몇 번 사주고 집에서 바베큐나 특별한 음식을 하면 반드시 갖다 주었다. 남편이 안 입는 옷 중 괜찮은 것을 골라다가 몇 보따리 갖다주기도 했다.

서른도 안 된 젊은 남자가 월급의 반을 멕시코의 가족에게 보내고 차도 없이 버스타고 다니며 늘 쪼들리고 사는 게 안 됐다는(내가 이렇게 오지랖이 넓다)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렇게 계속 주기만 했는데 그는 껌 한 쪽을 나누는 법이 없었다. ‘돌아올 것’ 을  바라고 한 것은 전혀 아니지만 가끔 서운한 생각이 들긴 했다. 그가 사는 아파트 옆에서 매 토요일마다 파머스 마켓이 열린단다.  싸고 싱싱한 과일이며 채소를 지천으로 살 수 있다고 늘 자랑했다. 어떤 땐 거기서 산 과일들을 가져와서 혼자만 우걱우걱 먹었다. 사과 하나, 옥수수 한개를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랬는데 그가 물병 하나를 준 것이다. 1년을 계속 주기만 하다가 받으니 얼마나 기쁘던지. 비록 어디서 공짜로 받은 사은품이지만 말이다. 

모든 인간관계는 작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하고 끝이 나기도 한다. 작은 것에서 마음 상하고 작은 것에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런데 그 작은 것을 제대로 할 줄 몰라 큰 것을 놓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너그럽고 베풀 줄 알고 대화도 잘 되어서 내가 참 좋아하는 할배가 있다. 최근에 그 할배가 말했다. 아무래도 Q씨랑은 인연을 끊어야겠다고.

이 동네 이사와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 Q씨라서 오랫동안 아주 친하게 지냈단다. 그런데 밥값 계산할 시간이 되면 급하게 전화할 데가 있다면서 바깥으로 나가거나 때맞춰 화장실을 가는, 자기가 먼저 커피 마시자고 해놓고는 커피를 다 시켜놓고 난 후에라야 나타나는 Q씨의  행동이 계속 되더란다. 처음엔 그러려니 했는데 한두번도 아니고 만날 때 마다 그런 치사한 행동이 되풀이 되니까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몇푼 되지 않은 밥값, 커피값 아끼려다 좋은 사람 잃게 생긴 Q씨다. 사실은 나도 Q씨의 그런 점들이 자꾸 눈에 거슬려서 멀리하기 시작했었다. 재밌는 것은 Q씨라는 사람은 존경받는'교회장로' 라는 사실이다. 십일조를 비롯해 교회에 내는 돈이 엄청 많단다. 교회에 바치는 돈은 전혀 아까와하지 않으면서 주위사람들한텐 왜 그리 인색하게 구는지. 재산도 많고 매달 나오는 연금도 꽤 많으면서.

그러고보니 이 동네에서 몇십년을 살았다는 Q씨 옆에 친한 사람 하나가 없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사귀다가 나중에는  다 떨어져 나가버리는 것이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내 것만 자꾸 주다보면 본전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내가 ‘봉’ 인가, 주기만 하는 이런 인간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가 드는 게 인지상정인 것이다.

내 돈 안 아까운 사람이 어디 있나. 아까운데도 불구하고 어디서나 먼저 나서서 밥값, 커피값 잘 내는 사람들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다.  그저 ‘인간의 정’ 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보다 내 돈 몇푼이 아까운 사람들은  나오지말고 그냥  집에 있는 게 낫다. 혼자 빈대떡이나 부쳐먹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