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오가 미진이라는 여자를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몇년 전쯤이었다.

봄이었다.

어느 공원에서였다.

박 교수의 아들 돌잔치에서였다.

결혼한지 몇년만에, 서너번의 유산끝에 어렵게 가진 아이니만큼 공원에서 열린 돌잔치는 크고 화려하고 성대했다. 7인조 음악밴드까지 불렀으니까. 풍선이니 테이프니 플래카드니 꽃을 장식하는 데만 거의 만불을 썼다고 했으니까.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흥청거리는 무리들 속에서, 화사한 의상을 차려입고 물고기처럼 유영하는 사람들 속에서 검은 색 스웨터와 역시 같은 색 바지를 입은 미진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청명한 날씨를 예상 못했던 것일까. 그녀 혼자 겨울 옷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미진의 차림새는 거기 모인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4월이었다. 봄이라고 하나 날씨는 여름에 가까왔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불고 비가 뿌려 꽤 쌀쌀했었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기온이 올라가 여름 날씨로 변했던 것이다.

돌잔치에 온 사람들은 다들 기회는 이때다 싶었던 사람들처럼 벌써 반팔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여자들은 하나같이 얇은 민소매 차림이었다. 그중에는 끈만 달린 원피스를 입고 온 여자들도 있었고 멋진 몸매를 자랑하려는 듯 탱크탑에 핫팬츠를 입은 여자들도 두엇 있었다.

미진은 색종이 가루를 뿌린 듯 알록달록한 차림의 여자들 틈에서 유현오의 눈에 담박 뜨였다. 차림새도 차림새였지만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속에서 유난히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까닭도 있었다. 또한 그녀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지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그녀는 마치 바구니에 모아놓아 흰 바둑알들속의 검은 바둑알같았다. 물위의 기름처럼 겉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 유현오는 그 여자가 미진이라는 것을 얼른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이렇게 화창하고 밝은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차림새를 하고 있는 저 여자,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저 여자, 어디서 많이 본 여자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하고 유현오는 잠시 골똘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아시아나의 기기들을 전담하고 있지 않을 때였다. 한 달에 한 번, 두세달에 한 번, 어쩌다가 아시아나에서 호출하는대로 가서 작업을 할 때였으므로 미진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한참 생각끝에 유현오는 알아냈다. 아시아나의 경리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여자라는 것을. 항상 뭔가 수심에 차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가을 날씨처럼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 그렇게 추운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여자는 유현오를 대할 때는 밝은 미소를 지었다. 가끔은 입꼬리를 올리고 웃기도 했다. 말투는 상냥했고 행동은 조신하고 얌전했다. 그리고 자세는 매우 공손했던 여자로 유현오는 미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무 밑에 혼자 서서 먼산을 바라보고 있는 미진을 보며 유현오는  생각했다.

저 여자가 여길 왜 왔을까. 박 교수를 아는 사람일까. 아니면 박 교수 와이프와 아는 사이일까. 그나저나 남의 잔치집에 와서 저 여자는 오늘도 저렇게 울 듯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구나….

박 교수는 아내의 먼 친척동생이었다. 아무도 없는 없는 미국 생활에서 그나마 하나 있는 일가 친척이라고 아내가 살아 생전 잘 챙기고 위하던 동생이었다. 아내가 죽었다고 쭉 이어오던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터이고 유현오 역시 박교수 부부를 많이 좋아했으므로 가끔씩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먹었다. 또한 돌잔치같은 경조사에는 기꺼이 참석하고 있었다.

유현오는 주위사람들과 건성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미진을 주시했다.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 미진에게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소녀가 뛰어갔다. 미진의 아이들이구나. 그런데 쌍둥이네…

한 소녀는 미진의 오른쪽 다리에 양손을 감았다. 다른 아이가 미진에게 연신 무어라 말을 시키는 것 같았고 미진은 허리를 약간 숙인 채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미진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 올랐다. 근처에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박교수의 아내가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유현오를 잡아끌었다. 유현오는 곧 미진이란 존재를 잊어버렸다. 유현오는 무리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고 박교수와 한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맥주 한잔으로 입가심을 하면서 유현오는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사람들 무리속에서 약간 떨어진 곳의 나무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다. 혼자 있기를 참 좋아하는 여자로군, 하고 유현오는 생각했다.

미진이 앉은 나무벤치에서 조금 떨어진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수십명 뛰어놀고 있었다. 아까 봤던 미진의 아이들이 그 무리에 섞여 있는 듯 했다. 미진의 눈길은 아이들을 향해 있었다. 놀다가 다치지 않을까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시던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유현오는 미진에게 걸어갔다.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한두번 고객으로 만났던 사람이 더러 있긴 했지만 친한 사람도, 대화를 나눌 마땅한 상대도 없는 유현오였다. 그러나 있다해도 객적은 날씨 얘기나 역사상 가장 많은 당첨금이 붙은 로토에 대한 화제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공원 저 뒷쪽으로 강이 있다니 여기까지 온김에 강이나 보고 갈까 싶던 차였다. 누구든지 같이 강가를 산책하면 좋을 텐데. 미진이란 여자는 안 될 거고, 생각하면서.

“미진씨?”

미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유현오는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눈물을 보자 유현오의 가슴에 잠깐 후회가 일었다. 괜히 아는 척 했구나. 혼자 있게 그냥 내버려둘걸.

그러나 미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벌써 이름을 불러버린 후였다. 그리고 이쪽을 향해 그녀가 고개를 돌린 후였다. 눈물을 본 것을 모른 체해야 했다.

이 아름다운 봄날에 저 여자는, 저 여자는 왜 혼자 울고 있는 것일까. 뭐가 그리 가슴 시린 사연이 있길래. 이 아름다운 봄날에……

“여기서 뭐해요? ”

유현오가 미진을 보고도 한동안 알아보지 못한 데 비해 미진은 유현오를 금방 알아보았다. 얼른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는 것이다.

“예에, 안녕하세요, 유 선생님…..”

“미진씨 맞지요? 아시아나에서 일하는?”

“예에. 맞아요. 그 미진이. 아까 얼핏 뵈었어요. 인사를 드린다는 것이 기회를 놓쳤네요”

유현오는 다가가서 미진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밥은 먹었어요?”

이 지역에서 최고로 비싸다는 캐더링 회사에다 부탁했다는 음식이었다. 양식, 중식, 이탈리아식, 프랑스식까지. 미국 와서 그런 산해진미는 처음이라 유현오는 조금 과식을 했다. 소화되게 산책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누구랑 왔어요? 아이들하고 남편?”

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중에 미진의 아이들이 있는 것 같고 남편은 어디 있어요?”

미진이 고개를 돌려 눈으로 남편을 찾는 것 같더니 말했다.

“저기 저쪽 남자들 네 명 서서 웃고들 있는 것 보이세요? 회색 폴로셔츠 입은 사람이 제 남편이예요….”

회색 셔츠와 밤색 면바지를 입은 남자가 담배를 손가락에 끼운 채 같은 또래들로 보이는 남자들과 박장대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적당한 키에 단단한 몸매를 가진, 꽤 준수하게 생긴 남자였다. 아이를 둘이나 둔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대학생이래도 믿을 만큼 어려보였다.

유현오가 처음 미진을 봤을 때도 그랬다.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인 줄 알았었다. 아시아나 마켓에 몇 년을 드나들면서 미진을 꽤 자주 마주했으면서도.

청초하고 가냘픈, 가을 날 시골 신작로에 핀 코스모스 같은 느낌의 여자였기 때문에. 결혼한 여자 특유의 방심하지 않는 듯한, 풀어진 분위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인 정선우와 대화끝에 미진이 결혼한 여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정선우가 말했다.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 걸. 근데 딱 처녀같아 보이는지라 오해하기 알맞지. 놈팽이들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심심찮게 받는 모양이더라구. 보기보다 미진이가 정확하고 단호한 여자라 응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몇년을 일했다면서도 정선우는 미진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유학왔다가 어떤 사정으로 미국에 남게됐다는 것 뿐. 그리고 아시아나 마켓이 스폰서를 서줘서 영주권을 취득하게 됐다는 것 뿐.

“워낙 말수가 적은 여자라서. 물어보면 대답이야 하겠지만 별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 않고. 근데 사는 게 쉽지만은 않은 것 같아. 많이 곤궁한 것 같아. 아무리 결혼했다하나 서른 초반의 젊은 여자라 꽤 멋을 부리고 싶을 텐데도 늘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가끔 가불을 해 가는 걸 보면 말이야…”

정선우는 또 말했다.

“그렇게 참하고 예쁜 여자를 데려다가 고생을 시키는 놈은 어떻게 생긴 놈일까, 참 궁금해. 그러고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 같아. 남편 잘 만난 우리집 마누라는 일도 안 하고 집에 펑펑 놀잖아.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그런데도 불평불만이 하늘을 찔러요, 찔러. 나같은 남편이 어디 있다고..

어쨌든 미진이란 여자, 남의 잔디밭이 더 푸르더란 말이 아니더라도 참 아까운 여자야. 내가 싱글이라면, 아니지.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자만 아니라면 어떻게 한번 수작을 걸어볼 텐데…..”

정선우의 말을 들으며 유현오는 그냥 웃기만 했었다. 당시만해도 미진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미진이 참하고 예쁘고 착해다 해도 어디까지나 남의 여자였으니까. 남의 여자는 절대로 절대로 유현오의 소관이 아니었으니까.

그랬는데.

그날 공원에서 미진의 눈물을 본 이후 유현오는 궁금해졌다. 그녀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한달 후 쯤. 박 교수와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유현오는 그 식사자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혹시 박 교수는 미진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게 있을까.

“지난 번 돌잔치에서 말이야. 아시아나 마켓 경리부에 근무하는 여자가 왔던데. 그 여자와 내가 안면이 있어. 아시아나에 일을 할 때마다 그 여자가 작업 대금을 끊어 주거든”

박 교수가 순순하게 말했다.

“아, 미진이? 내 친구 와이프예요. 제가 언제 한번 말씀드렸나? 꽤 괜찮은 친구인데 공부에 취미가 없어 학위도 못 받고 겨우 졸업만 했다던? 졸업한 후에도 취직할 생각을 안하고 마누라한테 얹혀 산다고 제가 욕했던 친구 말이예요. 그 친구 와이프예요”

“그래? 참 착해보이던데. 아이 둘을 데리고 왔던 것 같던데?”

“맞아요. 무척 착한 여자지요. 남편이란 놈이 내 친구이긴 하지만 어찌보면 미진이는 남편을 잘못 만난 케이스지요. 굉장히 똑똑하고 명석하고 야무진데. 그래서 공부를 더 마쳐야 하는데. 아이를 둘이나 낳은 바람에 날개가 꺾여버렸어요. ‘나뭇군과 선녀’라는 전래동화에 나오는 선녀처럼 발목을 잡혀버린 거예요. 양육해야 할 아이가 둘이나 되는 데다 생계까지 혼자 책임져야 하니까 이제는 비상(飛上]을 할래야 할 수도 없게 된 거지요……”

“그렇게 됐군…..”

“친구놈이 지금이라도 정신차려 직장잡아 돈을 벌게 되면 미진이는 공부를 더 할 수 있을 텐데. 미진이는 공부를 더 해야 해요. 그 아까운 머리를 썩히면 안 되는데…”

“친구한테 그렇게 조언을 해보지 그랬나”

“몇번이나 얘기해 봤죠. 근데 그 놈이 태어나길 원래 게으르게 태어난 놈 같아요. 일 하는 걸 싫어 해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 의무감같은 것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고…... 그런 놈이 결혼은 왜 했나 몰라요”

그 뒤부터 유현오는 자신도 모르게 미진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박 교수의 말대로 미진은 착하고 예쁘고 참한 여자였다. 정선우의 말대로 결혼하지 않은 여자라면, 남의 여자만 아니라면 욕심을 내볼 만한 여자.

어쨌든 유현오는 미진과 친해지고 싶었다. 어떻게 친해질 수 있을까. 일단은 대화를 많이 해야한다고 유현오는 생각했다.

실없는 소리나 마음에 없는 소리를 절대하지 않는 성격의 유현오였다. 남자한테는 물론이었고 여자에게는 더욱.

유현오는 아시아나 사무실에 들릴 때마다 정선우와 어울려 얘기를 하는 척하면서 미진을 끌어들이거나 슬쩍슬쩍 농담을 걸었다.

정선우와 어떤 사안을 놓고 논쟁을 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다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렇지 않아요, 미진씨? 우리 미진씨는 똑똑하니까 여기에 결론을 내 줄 수 있을 텐데 라든지 나는 선우 자네보다 미진씨의 의견을 더 존중하겠네. 그래서 미진씨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한다던지.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은 미진의 의견을 듣고저 했던 의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별 상관이 없었다. 미진을 끌어들였던 것은 ‘아이스 브레이킹(Ice breaking)'을 하고 싶었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진은 조근조근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피력하는 것이다. 미진은 자기 중심과 주장이 확고했다. 인터넷상에서 과반수 이상이 한쪽으로 쏠려있는 사안이 있다하더라도 같이 동조하지 않고 반론을 펼 줄 알았다. 무작정의 반박이 아니라 설득력 있고 타당성있게 .

있는듯 없는 듯 그림자 같지만, 조용하고 얌전하지만 확실한 의견을 펼칠 줄 아는 여자인 미진에게 점차 매력을 느끼는 유현오였다. 미진이 제일 마음에 들 때는 자신의 농담 한 마디에 굳어 있던 얼굴이 풀어지며 발그레 홍조를 띨 때였다. 그리고 가끔 소녀처럼 하하 입을 벌리고 무방비 상태로 웃는 것도.

정선우의 주선으로, 그리고 누구보다 성실하고 정확한 일 솜씨로 아시아나 마켓의 기계를 전담하고 있는 유현오는 정해진 날짜가 따로 없었다. 박 매니저로부터 기계에 이상이 있다는 호출을 받으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안 가고. 그게 한달에 한두 번일 때도 있었고 석달에 한 번일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한 육개월은 감감 무소식일 때도 있었고.

미진과 친해지고 난 뒤, 그리고 미진이 가슴의 한 군데를 차지하고 난 뒤 유현오는 박 매니저의 호출을 기다리게 되었다. 박 매니저의 호출이 있어야만 미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므로. 박 매니저의 호출 없이는 아시아나에 갈 일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리고 지난 번 비오는 날 저녁.

그날 유현오는 무슨 용기였을까. 무슨 용기로 아무 용무도 없으면서 아시아나에 들릴 생각을 했을까.

유현오는 그날 일을 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일을 하지 않고 미루어 두었던 볼일을 보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볼일을 마치고 오후 늦게 마지막으로 한 보험사무실에 들렀었다. 올 봄, 타주의 대학에 재학 중인 아내의 딸이 일으킨 차 사고때문이었다. 전화로 해결해도 될 일이었으나 정확하게 마무리지어야 할 일은 직접 얼굴을 보면서 해야 한다 싶어 보험회사 사무실에 갔었다.

보험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중 저 멀리 아시아나의 건물이 보였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진이 끓여주는 따뜻하고 향 좋은 커피가. 춥고 을씨년스러운 봄날 저녁. 더구나 비까지 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았다. 6시 30분이 가까와오고 있는데. 유현오가 알기로 미진의 퇴근 시간은 6시였다. 어쩌면 미진은 벌써 퇴근했을 텐데…..

미진이 퇴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유현오는 그냥 아시아나 건물을 지나쳤다. 아쉽고 아쉽지만 다음에, 하고.

몇 블럭쯤 운전을 하고 가다가 유현오는 불현듯 아니다,미진이 있든 없든 일단 사무실에 한 번 들르기나 해보자, 라고 마음을 바꾸었다. 왜냐면, 왜냐면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렬하게 들었으니까.

솔직해지자, 하고 유현오는 아시아나 건물로 방향을 틀면서 자신에게 말했다. 네가 지금 원하는 게 커피냐, 미진이냐. 그랬다. 그날 유현오는 미진이가 보고 싶었다.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아시아나로 향하면서 유현오는 얼마전 미진이 했던 말을 생각했었다.

-언젠가는 공부를 마칠 거예요.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요. 계획했던 일이니까 반드시 할 겁니다. 나중에라도, 머리 하얀 파파 할머니가 되어서더라도요-

미진의 결연한 표정을 보면서 유현오는안터까운 생각에 가슴이 저렸다.

공부라는 것도 때가 있는 법인데…나중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데….

허락된다면 미진의 공부를 마저 마치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유현오였다. 그는 미진의 학비와 생활비를 책임져 주고 싶었다.

여동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개의치 않고 미진을 도와 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유현오는 얼굴을 붉혔다. 여동생이라니…. 좀 솔직해지자.. 아시아나로 향하는 것이 커피가 목적이 아니듯 미진을 대하는 마음은 여동생이 아니다.

참 이상도 하지.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처음엔 그냥 덤덤하던 마음이,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과 호감이 날이 가면서 애정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미진과 자주 얼굴을 대하면서 저 여자가 내 연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연인이라.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언감생심인 일이었다. 어림도 없고 꿈에서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진의 선택에 따라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미진이 이혼을 해버린다면……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저버리고 미진이 혼자가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유현오는 그렇게 됐을 경우를 생각해본다.

그러나 미진과 결혼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겠다고 유현오는 생각한다.

왜냐면 삼십대 초반과 사십대 초반, 거의 열살이나 차이나는 나이는 그렇다치고라도 부모님께 너무 죄스러운 일이니까. 아직까지 아이 둘 딸린 이혼녀와의 결혼에 대한 충격과 경악이 채 가시지도 않았을 부모님. 그렇게 부모님 가슴을 갈갈이 찢듯 아프게 하고 강행한 결혼이었는데 혼자가 되고 말았다. 모르긴 해도 부모님은 혼자가 된 아들한테 혹시,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 부모님인데 다시 아이 둘 딸린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 그렇게 되면 연로한 부모님은 아마 쓰러져 돌아가셔버릴지도 모른다.

부모님은 둘째라치고.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진이 본인이다.

미진이 현재의 생활을 탈피할 의욕이 있는가 가.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감당하고 감수할 자신이 있는 가가 가장 큰 관건인 것이다.

“나뭇군의 선녀처럼 발목을 잡혀버린 거예요. 비상할래도 할 수가 없게요…..”

유현오는 미진을 만나고 돌아올 때마다 박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지상을 박차고 올라가서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여자. 그러나 날개가 꺾인 여자….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아니 미진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찾아 갔던 그날 저녁, 벌써 퇴근하고 없을 줄 알았던 미진을 만났다. 그녀는 늘 그랬듯 불안하고 추운 얼굴로 혼자 계단 아래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현오는 그날, 그녀를 집에까지 태워다 주었다.

비가 많이 왔었다, 그날.

와이퍼로 닦아도 닦아도 빗물은 계속 유리창을 세차게 적셨고 유현오가 좋아하는 음악은 강물처럼 흘렀으며, 유현오의 가슴에 조금씩 들어와 있던 여자, 미진이가 옆에 있었다, 놀랍게도. 꿈처럼 그렇게.

그리고 오늘.

지난번처럼 비가 오고 있었고 저녁무렵이었다.

유현오는 아시아나 매장에 있었다. 밑반찬을 진열해놓는 온장고가 말썽을 피운다는 전화를 받고 만사를 제치고 뛰어 온 터였다.

구입한지 10년 가까이 되었다는 온장고를 고치는 일은 예상외로 난항이었다. 맞는 부속이 없어 두번이나 부속점으로 뛰어가야 했다.

5시가 넘어가자 유현오는 초조해졌다. 얼른 작업이 끝나야 할 텐데. 그래야 미진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인데.

유현오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초조해서 성실하고 착하긴 하지만 둔하고 느려터진 조수, 김군을 자꾸 채근하게 됐다.

두어시간의 씨름끝에 겨우 온장고를 정상대로 작동을 하게 만든 후 유현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일이었다. 5시 51분이었다. 유현오는 얼굴의 땀을 닦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얌마. 오늘은 내가 바쁘니까 그냥 가거라”

유현오는 김군에게 말했다. 다른 때 같으면 저녁을 사먹여서 보냈을 터였다. 그러나 미진이 퇴근하기 전에 얼른 사무실로 올라가봐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 유현오였다. 손에 집히는대로 지폐 몇장을 김군에게 주었다.

그리고 유현오는 박 매니저를 찾았다. 박 매니저에게 작업 내역을 보여주고 사인을 받아야 했다. 그 다음 미진에게 가서 청구서를 주면 되는 것이었다. 넓디넓은 매장을 두어바퀴 돌고서야 박매니저를 찾아냈다. 그는 주방에서 아주머니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있었다. 커다란 양푼에다 이것저것 함께 넣고 비빈 밥을. 흘깃 전화로 다시 시계를 보니 6시 3분.

“아, 유 사장님. 다 됐습니까? 이번엔 시간이 오래걸렸네요? 일단 숟가락 들고 이리 오세요. 같이 먹읍시다. 이거 맛이 기막힌데요?”

유현오가 고개를 흔들며 작업 내역서를 내밀었다. 차마 입밖으로 내어 말은 못하지만 ‘급하니까 빨리!’ 하는 뜻을 온 몸짓에 담아서. 유현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매니저는 다시 한번 비빔밥을 권했다. 숟가락까지 유현오의 손에 쥐어 주며. 진짜 이 비빔밥 끝내준다니까요! 한 번 맛이나 보시라니까?

늑장을 부리는 박 매니저의 행동이 분통이 터질 것 같지만 유현오는 억지로 내색않고 짐짓 무심한 척 말해 본다. 벌써 여섯시가 넘었는데 경리 사무실 미진씨가 퇴근을 안 했으려나….

그제서야 박 매니저는 아차, 하고 눈치를 채는 듯 했다.

박 매니저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았다. 그리고 작업 내역서를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싸인을 한다. 읽어 보나 안 보나 당신을 믿는다는 듯. 박 매니저는 내역서를 유현오에게 돌려주면서 선심쓰듯 말했다.

“얼른 올라가 보세요. 미진씨, 아마 아직 있을 겁니다.”

박 매니저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면서 몸을 돌린 유현오는 아시아나 매장을 뛰듯이 걸어 나왔다. 퇴근시간과 맞물려 밀물 들이닥치듯이 매장안을 채우는 손님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가면서. 그리고 유현오는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건물의 반대쪽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뛰었다. 출입문에 도착해서 그는 사무실을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불이 커져있었다.

오, 미진이, 그녀가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 이제 미진이 끓여주는 커피를 한 잔 마실 수 있겠다!

유현오는 계단을 두개씩 뛰어 올랐다. 얼른 미진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일념으로. 그녀와 같이 커피를 마기겠다는 일념으로..

출입문은 닫혀있었다. 늘 사람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열려져 있던 문이었다. 차갑고 눅눅한 공기가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닫았는가, 하고 유현오는 잠깐 생각했다. 유현오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리고 출입문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를 비틀려던 유현오는 그만 멈칫, 하고 뒤로 물러났다.

출입문에는 책받침 두개를 가로로 세운 크기만한 유리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보이는 모습, 한 남자의 뒷 모습. 그는 아시아나의 새 사장, 저스틴이었다. 아, 그렇다. 새 사장이 있었다!

미진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새 사장이 사무실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못했던 유현오였다. 그러고보니 두어시간 동안 매장에 있었지만 매장에서는 새 사장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저스틴는 유현오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또 누가 있었다. 미진이, 미진이었다. 그녀 역시 유현오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자세였다. 둘은 비오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커피잔을 하나씩 들고 있는 듯 그들의 몸 위로옅은 김이 올라가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훨씬 지난 사무실에서 둘은, 커피잔을 들고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풍경은 조금전까지만 해도 유현오가 그렸던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풍경이 저스틴과 미진으로 바뀌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유현오가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없이 견고해보였다.

 

손을 잡거나 어깨를 기대고 있지는 않았지만 둘의 사이는 상급자와 부하직원 이상인 것 같은 느낌이 유현오의 머리를 강타했다.

 

둘의 사이는, 둘의 사이는 오래된 연인 같았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같았다!

유현오는 몸을 돌렸다. 그는 손에 들려있던 청구서를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왔다. 유현오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유현오는 아까처럼 전 속력으로가 아닌, 겅중겅중 뛰는 걸음으로 아시아나 건물을 돌아 파킹랏으로 갔다. 유현오의 검은 색 트럭이 비를 맞고 서 있었다. 그는 트럭에 올라탔다.

미진아….

유현오의 입에서 신음같은 미진의 이름이 새어나왔다.

새 사장과 미진은 어떤 사이일까. 어느 만큼 진행되었을까.

어쨌거나 지금쯤 멈추어야 한다고, 가시밭길은 아예 처음부터 가지 말아야 한다고 유현오는 생각한다. 왜냐면 상처받는 것은 미진이 뿐일 테니까….

유현오는 몇년전 공원에서 본 미진의 눈물을 생각했다. 화사한 봄, 혼자 숨죽여 울던 미진, 그녀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위험한 짓을 즉각 중단하라고 미진에게 타일러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