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틴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무렵 미진은 달리는 차 안에 있었다. 유현오와 같이.
앞으로 미진이 탈 차를 마련해 가지고 오는 길이었다. 유현오의 단골손님이었던 어느 일본인 부부의 딸이 타고 다니던 차. 부부가 딸의 대학입학 기념으로 사준 차였다고 했다. 그런데 공부도 채 마치지 못하고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주인을 잃고 몇년동안 차고에 세워져 있었던 차. 하늘색 토요타 코롤라.
“혹시 몰라서 연락을 해보았지.차를 보면 딸 생각이 더욱 사무칠테니까 이제 그만 없애면 어떻겠냐고”
그냥 한번 운을 떼보았을 뿐인데 부부가 쉽게 승낙을 하더라고 했다. 그렇잖아도 큰 동생내외가 살고 있는 다른 주로 이사를 갈 예정이라 차를 팔 생각이었다고. 그러나 딜러나 모르는 아무에게는 팔고 싶지 않아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고. 값이 문제가 아니라 아끼고 애지중지하며 잘 타고 다닐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금요일 저녁, 퇴근시간에 맞추어 유현오가 미진을 픽업하러왔다. 유현오 와이프의 아들 폴도 함께였다.폴은 신바람이 나 있었다. 운전면허를 딴지 벌써 몇달 되었지만 혼자 스스로 차를 몰아보지 못했던 참인데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며 입이 함박만큼 벌어져 있었다. 새로 사게 될 차를 꼭 자기가 운전해 오겠다고 몇번이나 다짐을 했다. 유현오 역시 몇번이나 폴에게 주의를 주었다.
“첫번째도 조심, 두번째도 조심. 만약 오늘 저녁 차 몰고 오다 무슨일이라도 생기면 앞으로 운전대는 절대로 잡아 볼 생각을 하질 말아!”
퇴근시간이라 도로는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삼십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는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려 도착했다. 셋은 도착하자마자 집안으로 안내되었다. 유현오쪽에서 어떤 오퍼를 넣든 수용일 것이라는 부부는 이왕 내려왔으니 저녁이나 먹고 놀다가라고 셋을 식탁에 앉혔다.
셋은 그들이 이끄는대로 식탁에 앉았다.’샤부샤부’가 준비되어 있는 식탁.차부터 보여주지 않고 식탁에 앉게 된 폴은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고.
부부는 별로 나이가 들어보이지 않았는데 둘 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쇠어 있었다. 유현오가 미진의 귀에 대고 말했다. 하나뿐인 딸아이를 잃고나서 머리가 저렇게 눈 내린 듯 하얗게 되어버렸다고.
자식이란 무엇일까.
미진은 식탁 맞은 편에 놓인 장식장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자식을 둘이나 떼놓고 나온 내 머리카락은 왜 저 부부들처럼 하얗게 쇠지 않을까….
아이들과 헤어진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전화로 목소리를 매일 듣고 주말마다 만나고는 있지만 날이 갈수록 미안함에 가슴이 찢어진다. 창민과의 문제에 아이들을 끌어들여 희생시키고 있는 것 같아서. 아이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그날 저녁 화장품 매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냥 모르고 지나갔을 사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 또한 서지 않는다. 미진은 생각한다. 몰랐으면 지금도 창민과 같은 지붕아래에 살고 있을까. 그랬으면 표면상 별일 없는 한 울타리의 가정에서 아이들이 자랄수 있었을까.
미국에 와서는 공부하느라 바빠, 사느라고 바빠 한국연속극을 볼 기회가 통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엄마가 텔레비젼을 틀어놓으면 오며가며 귀동냥으로 보고 들었다. 그럴 때마다 미진은 툴툴거렸었다. 드라마 작가들이 보는 세상은 참 쉬워. ‘우연히’만 집어넣으면 만사가 끝이니까 말이야. 극의 흐름에 개연성, 당위성, 연관성이 있어야지. 어떻게 연속극에는 우연이란 게 그렇게 쉽게 일어 날까. 들통난 비밀들은 짜여진 각본처럼 모두 우연에 의해서 일어나니 말이야. ‘짜여진 각본’이란 말이 달리 나온 말이 아니네.
그런데 그 짜여진 각본같은 일을 미진도 당하게 되었다. 정말로 우연히.
아시아나 매장 입구에는 여섯개의 독립체제로 운영되는 가게가 있었다. 한국 화장품매장, 한국 옷과 신발 가게, 악세사리 매장 그리고 간단하게 요기를 떼울 수 있는 분식점들.
화장품 가게 주인 윤아는 미진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여자였다. 한국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다가 제법 사는 집인 미국으로 시집와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부터 화장품 가게주인이 한번 돼보는 것이 소원인 윤아를 위해 시부모가 차려준 가게였다. 연년생인 아이들까지 시부모가 맡아줌으로 맘 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윤아는 미진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 새로운 화장품 샘플이 들어올 때마다 한아름씩 안겨주었다. 윤아를 알게되고 나서 화장품을 사본 적이 없는 미진이었다.
그날, 짜여진 각본에 의해 모든 일이 일어났다고 미진이 생각하고 있는 그날 오후. 미진은 윤아의 연락을 받고 퇴근 후에 윤아의 화장품 가게로 내려갔다. 늘 그렇듯이 매장안은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윤아와 아르바이트 하는 아가씨가 감당을 못할 만큼. 한국연속극이나 영화가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인들의 인기를 끌면서 한국화장품까지 덩달아 인기가 치솟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었다.
미진은 윤아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하고 조금 한가해지길 기다리며 한켠에 서 있었다. 매장안에 진열된 화장품들과 손님들의 차림새를 구경하면서.
서너그룹의 손님들이 계산을 마친 후 빠져나가고 다섯그룹의 손님들이 남아 있었다. 미진의 나이 또래의 여자 둘과 스물살 중후반으로 보이는 아가씨들 네명,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여자아이와 그 엄마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중국인으로 짐작되는 아가씨들 두명이었고 화장품을 들고 계산대에 서 있는 사오십대 여자들이 세명이었다.
그녀들은 화장품 샘플 두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보고 립스틱을 손등에 칠해보고 향수를 공중에 칙칙 뿌려 이슬비처럼 바닥으로 내려오는 미세한 입자들에 코를 갖다대었다. 그녀들은 같이 온 사람들과 연신 웃고 떠들면서 행복한 작업들에 열중해 있었다. 그랬다. 화장품을 고르는 일은 여자에게 있어 행복한 작업이었다.
미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예쁘게 자신을 꾸미기 위해 화장품을 사는 여자들, 그녀들의 모습이 진열된 화장품들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특히 미진의 눈길은 네명의 아가씨들 그룹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옆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소리 높여 떠들고 깔깔대고 웃고 있는 그녀들. 근심걱정이란 글자는 아예 존재하지않을 것 같은 그녀들은 갓딴 오이처럼 싱싱하고 청량했다.
내게도 저런 빛나는 젊음이 있었는데…
그때 아가씨중 하나의 입에서 나온 ‘김창민’이란 이름이 미진의 귀에 날아와 앉았다. 김창민. 미진의 남편 김창민.
미진은 잘못들은 걸로 생각했다. 왜냐면 창민의 이름과 네명의 아가씨들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으므로. 그녀들의 입에서 창민의 이름이 나올 까닭이 없었으므로.
그러나 미진의 귀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들 쪽으로 쫑긋 세워져 있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목청 높혀 떠들고 웃고 있었지만 김창민 이란 단어외에는 무슨 말들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진은 급하지만 조용히 몸을 움직여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립스틱 진열대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들과 미진의 사이는 일미터 남짓했다. 그녀들의 떠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미진은 앞에 있는 립스틱 중 한개를 골라 잡아 손등에 칠해보는 척 하면서 그녀들의 대화 중 김창민과 연관 된 부분을 잡아내기 위해 신경을 집중했다.
“아, 그러니까 이 화장품 세트 김창민이란 그 아저씨한테 사달라고 그러라니까”
“그 아저씨 돈 없어. 지난번 샤넬백도 간신히 얻어냈는데. 늘 돈 때문에 쩔쩔매는 것 같아. 신문사에서 나오는 월급, 뭐 월급이랄 걸도 없지만 두달 동안 받은 그 월급에다 한국에서 송금받은 걸 보태서 겨우 사주는 눈치더라. ”
“무슨 남자가 그리 돈이 없냐? 생긴 것은 멀쩡하더만. 하긴 지난번 나이트 클럽에서 호기롭게 술값을 계산하려다가 카드가 디클라인 될 때 알아봤어야지. 그때 얼굴이 벌개가지고 허둥대고 당황하는 꼴이 참 가관이더만.”
“그러게 말이야. 대학 졸업하고 여지껏 놀았다나봐. 지금까지 와이프가 벌어서 먹고 살았대지…”
“와이프가 벌어서 먹고 산대? 진짜 시시하다 얘. 근데 여름이 넌 그런 남자가 뭐가 좋아서 붙어 있니?”
“붙어 있긴. 같이 일을 해야하잖아. 신문사 편집부에서 묶어준 사람이라 어쩔 수없이 친한 척하고 있는데 이 병신이 지금 혓물켜고 있는 거지 뭐.떡 줄 사람은 생각치도 않는데 말이야. 그런데 지금 두달 남짓 일했는데 스마트하고 감각이 있긴 하더라. 전 미국내에서 응모한 수천편의 작품중에서 심사위원 눈에 가장 눈에 뜨인 독특하고 재밌는 글을 쓴 사람이라더니 역시 뭐가 달라도 달랐어. 너희들도 알다시피 현재 문예작품 심사를 맡고 있는데 작품 고르는 솜씨가 보통 예사롭지 않은 거야. 보는 눈이 아주 비범해. 나하고는 달라. 내 눈에는 무척 뛰어나 보이는 작품인데도 이 아저씨는 과감하게 제쳐 놓아버리는 거야. 나중에 그 이유를 들어보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지는 거야. 공대출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야. 처음부터 언론쪽이나 문학쪽으로 갔었어야지. 그동안 논설도 세편정도 썼는데 대단해. 독자들의 반응도 무척 높고. 오랜만에 논설다운 논설을 읽었다는 독자들의 전화가 엄청 왔었어. 아무튼 신문사 물을 몇년 먹은 내가 지금 그 아저씨한테 배우고 있는 중이라니까…”
“여름이 얘, 그 아저씨한테 폭 빠졌나보다”
깔깔깔 웃음소리….
“빠지긴. 그렇다는 거지 뭐…”
“너한테 자자고 그러지는 않대?샤넬백까지 사줬는데?”
“아직 직접적으로 시도는 안 했는데 곧 그러겠지 뭐. 남자란 동물은 다 똑같으니까”
“그럼 그 아저씨랑 잘 거야?”
“미쳤니? 같이 잘 사람이 없어 애가 둘이나 딸리고 와이프도 있는 남자랑 자? 키쓰까지는 맛보기로 해주었으니까 그걸로 끝. 애를 더 태우면서 뭣 좀 더 얻어가지고 뻥 차버려야지”
“근데 얘기들어보니 더 얻어가질 것도 없겠다, 얘. 지금 뻥 차버리지 그러니?”
“글쎄 그럴까. 아니야. 뭣 좀 더 얻어가지고 나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한 아가씨가 배고프니 대충 고르고 빨리 저녁 먹으러 가자고 재촉을 하는 바람에 모두 우르르 계산대쪽으로 몰려간 까닭이다.
미진은 흐트러진 화장품을 정리하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다음에 들르겠다고 윤아에게 전해주라고 말하고 화장품 매장을 빠져 나왔다. 미진은 아는 사람들의 얼굴에 눈인사를 하면서 사람의 물결을 거슬러 건물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아직 환했다. 저녁 일곱시가 가까와 오는데 해는 지지 않고 있었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코리아나 건물을 돌아서자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미진은 눈물을 닦으면서 차가 있는 파킹랏까지 터벅터벅 걸었다. 참담하고 참담했다.
창민과의 사이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신뢰’라고 미진은 생각했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듯한 관계를 겨우 지탱하고 있었던 것은 믿음이었다. 허튼 짓을 하지 않을 거란 믿음. 그런데 그마저도 허물어져버렸다. 모래성같이 쉽게.
신문사에서 나오는 월급이라는 게 겨우 수고비 정도로 몇 백불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몇백불 안된다는 액수마저도 미진은 지금까지 단 한푼도 구경 못했다. 차 사고를 내고도 당당하고 뻔뻔한 태도에 질려버린 미진이 그 수습에 대해 일절 모른 척하자 창민은 혼자서 보험회사니 박 교수한테니 뛰어다니다가 한국에다가 송금을 부탁했던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형편이 힘든지 겨우 몇천불이 온 것 같았다. 그 돈 역시 미진은 한푼도 구경못했다. 그랬는데 그 돈마저도 여름이란 아이의 샤넬백 구입해주는 데 들어간 것이다.
미진은 걸으면서 그라지 세일에서 산 2불짜리 가방을 내려다 보았다. 귀퉁이가 헤어진채로 몇년 째 들고 다니고 있는 싸구려 비닐백.
미진은 차문을 열었다. 차 조수석에 핸드백을 던져넣고 미진은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그리고 미진은 결심했다. 이제 더 이상은 울지 않겠다. 김창민이라는 남자와 헤어지겠다. 신뢰를 잃은 이상 한 울타리안에서 같이 살 이유가 없다….
지난 번, 옆에서 도와 줄테니 결단을 내리라는 유현오의 조언을 따르지 못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였다.
언젠가는 정신을 차리겠지. 나의 헌신을 봐서라도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정신차릴 거야. 저도 보는 눈이 있는데, 같이 대학을 졸업한 동기생들은, 박 교수를 비롯해 모두 승승장구하고 있는 판에 언제까지 저러고 있겠어. 내가 희생한 김에 조금만 더 희생하지 뭐. 그리고 어쨌든 아이들 아버지잖아. 아이들에게 깨진 가정을 보여줄 순 없지. 좀 게으르고 무능하긴 해도 어쨌거나 아이들 아버진데.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는 이유가, 그리고 차사고를 낸 주제에 뻔뻔하고 당당하다는 이유가 헤어질만한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미진은 차문을 닫고 유현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번 벨이 울리자 예, 미진씨 하는 현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현오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져내리려 했으나 미진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머물 곳이 필요한데요…”
유현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단 한마디만 했다.
“알았어요. 일단 우리집으로 오도록 해요”
미진은 그날 저녁 집에 들어가 창민을 식탁에 불러 앉혔다. 그리고 미진은 창민에게 선언했다.
“당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어졌어. 헤어졌으면 해”
창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만 묵묵히 내려다 보고 있을 뿐.
미진은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벌써 집안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면서 쭈볏거리며 조심스레 미진에게 다가왔다. 그런 아이들을 보자 미진의 결심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미진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이렇게 하는 게 아이들에게도 더 나을 지 모르니까….
“앞으로 엄마 아빠가 따로 살게 되었어. 당분간 아빠랑 쟈시와 할머니가 돌봐 줄테지만 곧 따로 방을 얻어 엄마랑 같이 살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울지 말고 아빠와 쟈시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착하게 있어야 해….
아이들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여느때와 똑같이 출근하면서 미진은 옷가지를 담은 가방과 보따리를 차에 실었다. 그리고 근무를 마치고 유현오가 일러준 약도를 따라 운전해갔다. 집이 아닌 다른 길로. 집이 아닌 다른 길로 찾아 간 곳, 유현오의 집.
유현오의 집은 예전에 공군비행장이었다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정부의 예산부족에 따라 비행장이 문을 닫은 곳. 건축회사가 매입해 대규모 주택단지로 탈바꿈시킨 곳이었다. 최근의 건축 트렌드를 따라 높은 천정과 넓은 부엌과 개개인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존중해서 건축된 방 세개를 갖춘.
유현오는 드라이브 웨이에서 미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진이 차에서 내리자 묵묵히 미진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짐을 들어다 미진이 머물 방으로 들여다 놓아주었다. 미진의 방은 다른 주로 유학가 있다는 와이프 딸 제니의 방이었다. 목욕탕이 딸려 문만 닫으면 혼자만의 공간이 완벽하게 보장되는 작은 방. 와이프의 딸 제니는 보라색을 좋아했던 듯 침대커버며 커튼이 모두 보라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유현오가 말했다.
“미진씨가 알고 있겠지만 와이프의 아들이 있어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오늘 친구 생일잔치에 가서 좀 늦게 들어올 건데. 미진씨 얘기를 하니 무척 좋아했어요. 남자뿐인 집안에 드디어 여자의 향기가 나게 됐다나요. 유쾌하고 명랑함이 가득한 친구라 미진씨랑 같이 지내는데 별 어려움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짖궃게 굴거나 힘들게 하면 내게 말해요. 혼구멍을 내 놓을 테니까"
예, 하고 미진이 대답했다.
“미진씨”
유현오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미진의 어깨를 다시 가볍게 두어번 두드렸다.
“잘 했어요. 힘내요. 모든 게 잘 될 겁니다…”
유현오의 집으로 들어간 지 사흘 째 되던 날 미진은 창민의 전화를 받았다.
“차를 가져와”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창민이 말했다.
“차가 있어야 다닐 거 아냐. 차를 가져와”
나는 어떡하라구. 어떻게 일을 다니라구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으나 미진은 두말 않고 창민에게 차를 가져다 주었다.
유현오의 집에 살게 된 미진.
불확실한 내일 및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걱정, 잦아들지 않는 창민에 대한 분노 그동안의 고생이 물거품이 돼버린 데 대한 허탈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유현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 평안해 보이려고 애쓰면서 청소및 요리를 맡아 했다.
어쨌든 미진과 유현오와 폴이 같이 있는 그림은 잘 어울렸다. 미진이 저녁마다 요리를 하고 유현오와 아들 폴은 맛있게 먹어주고. 미진이를 거들어 서로 설거지를 하려고 싸우고. 셋이 피자를 먹으러 가고, 공원으로 산책을 가기도 하고.
미진은 매일 쟈시와 할머니를 통해 아이들에게 전화했다. 주말엔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쟈시와 할머니 집으로 아이들을 만나러갔다. 전화할 때마다, 아이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나 미진은 숨죽여 울었다. 안타까움에. 어서 빨리 아이들과 같이 살아야 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그동안은 차를 구입할 생각을 못했었다. 돈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지만 유현오가 출퇴근을 맡아주었으므로. 그러나 유현오가 최근에 새로 오픈 하는 한 스시집의 냉동고와 냉장고 설치 일체를 맡게 되면서 바빠졌다. 미진의 출퇴근을 도와줄 수 없게 됐다. 예전 집에서는 전철만으로 가능했으나 유현오의 집에서는 불가능했기에 당장 차가 필요했다.
쓸만한 중고차를 찾아 몇날 며칠 인터넷을 뒤져보던 유현오가 어느날 갑자 일본인 부부를 생각해냈다. 주인을 잃음으로 그냥 그라지에 모셔져만 있던 차는 그렇게해서 미진이 타게 됐다.
일본인 부부로부터 저녁대접을 잘 받고 차를 구입해 돌아오는 날 차안에서 띵, 하고 문자가 도착했다는 소리를 미진은 들었다. 전화기는 핸드백 안에 있었다.
유현오의 차를 운전해 뒤에 따라오는 폴의 동황에 신경쓰느라 유현오는 미진의 전화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미진은 급한 문자가 올 만한 데가 없었기에 전화기를 확인하지 않았다. 한국의 동창들이 쓸데없이 보내주는 좋은 동영상, 좋은 그림이 분명할 테니까.
그렇게 통보하듯 집을 나온 뒤, 창민에게서는 전화 한 통, 문자 한 통 없었다. 차를 건네주러 갔을 때도 창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돈이 없을 텐데 아파트 세는 밀리지 않고 잘 내고 있을까. 공과금은 제때 잘 내고 있을까. 걱정이 됐지만 미진 역시 일절 창민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아파트 세가 밀려 거리에 나 앉는다해도 모른척 할 셈이었다. 다만 걸리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부모 잘못 만나 고생하고 있는 아이들.
내일 토요일, 늘 그랬듯이 쟈시와 할머니네로 아이들을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오늘 산 차를 운전하고 갔으면 좋겠지만 보험과 타이틀 옮기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건드릴 수 없으니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전철과 버스를 세번 갈아타고서.
아무래도 직장을 옮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미진이었다. 돈이 필요했다. 차값을 갚아야 했다. 유현오가 말을 하지 않아 얼마짜리 차인지는 모르나 그냥 덥썩 공짜로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갚아 줘야 할 것이었다. 애인도 아니고 친척동생도 아닌 관계, 아무 조건없이 머물 방을 내준 것만 해도 미안한데.
또한 언제까지나 유현오의 신세를 질 수 없었다. 정말로 극빈자가 사는 , 마약딜러들이나 사는 험한 아파트라도 얻어나가야 했다. 그래야만 아이들을 데려다 같이 살 수 있지. 그런데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식당 웨이츄레스라도 할까. 윤아 친구가 일식당에서 일하는데 팁이 그렇게 짭잘하다고 했다.
직장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저스틴의 눈빛을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미진을 바라볼 때마다 흔들리고 있는. 그리고 갈수록 깊어지는 저스틴의 눈빛.
그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미진은 알았다. 미진 역시 같은 마음이었므으로. 내 것이 아닌 것을 원하는 마음,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내는 마음.
그것은 소리없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황홀한 고통이기도 했다. 창민으로 인해 불같은 분노가 일다가도 저스틴의 눈길을 받으면 행복했으니까. 시궁창같은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저스틴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거기까지가 마침표였다.
일단 차를 구입했으니까 직장을 알아보는 일이 좀 더 쉬워졌다. 이제부터는 마음대로 운전해 다닐수 있다 생각하니 용기가 나는 미진이었다.
“고맙습니다”
미진은 유현오에게 말했다. 유현오가 미진을 보면서 미소지었다.
다음 날 아침, 미진은 저스틴의 문자를 확인했다. 전화 하라는 문자 메세지.
생전 없던 일이었다. 무슨 일일까. 마켓에 무슨 일이 생겼나….
미진은 방문이 꼭 닫혔나 확인한 다음 저스틴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한번 채 울리기 전에 저스틴은 전화를 받았다.
“메세지를 이제야 확인했어요….”
“나와요. 지금 좀 만나요”
아침 여덟시.외출하기엔, 누구를 만나러 나가기엔 너무 이른 아침. 미진은 자기도 모르게 흘낏 방문을 쳐다보았다. 유현오에겐 무어라고 말을 하고 나가나.
“두시간 쯤 후에, 열시쯤 안 될까요?”
“그래요, 그럼, 두시간 있다가 봐요”
저스틴과 만날 장소를 정하고 미진은 자신에게 다짐했다. 저스틴에게 털어놓으리라.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고. 집을 나와 다른 사람집에 머물고 있다고. 대단히 죄송하지만 다른 직장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그러나 미진의 그 다짐은 몇분 후 전화 한통을 받으므로 다 뒤집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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