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오가 아침을 먹고 거라지 청소를 시작한 시각은 아홉시 쯤이었고 청소를 다 마치고 허리를 폈을 때는 오전이 훌쩍 다 지나간 열두시 무렵이었다.일에 관련된 온갖 장비들과 부속품과 그리고 세상 떠난 아내의 살림살이들이 발디딜 틈 없이 채워져있던 거라지. 버리고 치우고 정리하느라 정신없이 분주했다.
몇시간을 투자한 끝에 마침내 거라지 한쪽이 깔끔하게 비워졌다. 유현오는 거라지에 놓인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며 흐뭇한 마음으로 비워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는 여기에 미진이 차를 주차할 수 있겠구나.
어제 저녁 폴이 몰고 온 미진의 차는 드라이브 웨이에 세워져 있었다. 이제 세차를 말끔하게 한 후 안에 모셔다 놓을 생각이었다.중고차라 하지만 흠집 한 곳 없는 깨끗한 외향을 갖춘 차이니 바깥에다 세우기는 망설여지는 차였다. 더구나 미진이가 타는 차 아닌가. 미진이가 타는 차이니 더욱 더 거라지 안에다 세워야 했다. 미진이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특별하게 대접해 주고 싶은 게 유현오의 마음이었다.
유현오는 물병을 입에 가져가면서 빙그레 미소지었다. 미진이만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는 유현오였다.말수도 별로 없고 표정은 어둡고 우울하며 기분 또한 늘 가라앉아 있는 미진이다. 한겨울의 저녁노을같이 쓸쓸한 분위기의 사람이다. 그러나 유현오는 미진이만 생각하면 행복하다. 미진이만 옆에 있으면 행복하다.
미진이가 있어 행복한 사람은 폴도 마찬가지였다.여자를 데려 와 잠시 머물게 한다니까 뜨악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폴이란 놈도 벌써 미진이에게 폭 빠진 모양이었다. 미진이 아줌마, 미진이 아줌마가 입에 붙어 있다. 집에 같이 있을 때는 연신 미진이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다닌다. 마치 오랜 시간 미진이를 알았던 놈처럼 군다. 그러면서 이 맹랑한 놈이 유현오에게 슬쩍슬쩍 떠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미진이 아줌마 좋아해요? 결혼할 거예요, 미진이 아줌마랑? 언제 할 거예요?
결혼이라. 미진이와 결혼을 하기에는 앞에 놓인 장막이 너무 두텁다. 아내와 결혼하면서 넘은 가파르고 험준한 산을 또 넘어야 한다. 그러나 미진이를 많이 원한다. 그리고….
미진이를 원하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선뜻 나서지않는 유현오. 지금 상태에서 미진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옳지않다고 생각하는 유현오였다.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유현오였다. 왜냐면 현재 미진이가 유현오의 도움을 받고 있는 상태이므로. 도와주는 것을 빌미로 미진이를 옭아매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나중에, 미진이가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그러니까 자립하고나서 경제적인 면이나 모든 면에서 유현오와 동등한 입장에 섰을 때, 그때. 그때를 기다려야지.
그리고 지금 미진이에게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어떻게해서든지 아이들과 같이 살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외에는. 그런 미진에게 다른 부담을 가중시키고 싶지않은 유현오였다. 미진은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잔뜩 위축돼 있는 상태였다. 자신감도 자존감도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유현오와 폴과 함께 있을 때 웃고 싶지않으면서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 것을 몇번 보았다. 눈은 슬픔에 가득 차있으면서 입만 웃는 모습.
유현오는 미진이 그런 미소를 지을 때마다 말했다.웃고 싶지 않으면 안 웃어도 돼요. 우리랑 얘기하고 싶지 않으면 얘기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랑 어울리고 싶지 않으면 방문닫아 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돼요. 미진씨, 너무 애쓰지 말아요….
또한 유현오는 미진에게 틈만 나면 누누히 되뇌었다.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것, 절대 부담갖지 말아요. 그냥 남는 방 하나를 빌려주고 있는 것 뿐이니까. 기간을 두지 말고 미진씨가 우리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때까지, 계속 있어도 돼요. 사실 도움을 받는 쪽은 미진씨가 아니라 오히려 우립니다. 사내놈 둘이서만 있는 어두컴컴한 집에 미진씨가 출현하므로 환해졌잖아요…
어떻게해서라도 미진이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고 싶은 유현오였다. 그래서 이번에 일본인 부부로 부터 구입해 온 차의 가격도 미진에게 일체 알려주지 않고 있는 유현오였다. 역시 일본인이었다. 다른 주로 이사를 간다면서, 그래서 어떻게해서든지 빨리 처분을 하고 가야할 상태임에도 받을 가격을 다 받아챙기는 것이다. 그 자리서 흥정을 하게되면 미진이가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가격을 두말 않고 다 쳐주었다. 미진이가 차 가격을 알면 얼마나 더 미안해 할 것인가. 크고 무거운 돌덩이에 눌려 압사할 지경에 있는 여자한테 돌덩이 하나를 더 얹어주는 격이 될 테니까.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는 유현오.
유현오는 다 마신 물병을 리사이클함에 던져넣고 나서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폴과 함께 차를 닦고나서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으러 나갈까. 셋이 함께 외식을 종종 했었지만 햄버거는 아직 한번도 먹지 않았다. 미진이와 폴의 생각은 어떨지 일단 물어봐야겠군.
“폴! 어디 있냐? ”
유현오는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소리쳐 폴을 불렀다.
“요녀석. 아저씨가 힘들게 혼자 거라지 청소를 하는데 도와 주지도 않고. 얼른 이리 나와 봐라. 미진이 아줌마 차 좀 같이 닦자!”
폴의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폴이 고개를 푹 숙이고 비척거리며 걸어나왔다.
“왜 그리 힘이 없어?우리 얼른 차 같이 닦고 미진이 아줌마랑 햄버거 먹으러 가자”
유현오는 부엌 카운터 위에 있는 차 열쇠를 찾아들었다.
“네가 또 운전을 해도 좋아”
이상한 일이었다. 천정까지 펄쩍 뛰어오르며 좋아해야 당연할 폴이 풀죽은 모습으로 입을 다물고 가만 있는 것이다. 생전 그런 일이 없던 아이였다. 그러고보니 눈에 눈물까지 글썽하다. 유현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현오는 폴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이 있냐?”
“………”
“폴!?”
폴의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급기야는 땅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유현오는 일단 폴을 식탁의자로 데려가서 앉게 했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폴, 아저씨가 지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고 있잖아”
“잘못했어요. 아저씨….저는 그냥 자랑하고 싶어서…. 생전 처음으로 운전했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자랑을 하다니, 누구한테?그리고 자랑하는 게 어때서?”
“.....”
“폴?”
“누….누…누나한테….”
“누나?”
“예…그랬는데… 그랬는데 누나가…누나가 미진이 아줌마랑 얘기하고 싶다고…전화를 바꾸라고해서…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미진이 아줌마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었는데…그랬는데… 미진이 아줌마가 누나랑 한참 얘기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 울었어요.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는 것 같은데 아직 안 들어 왔어요”
“……….”
그러고보니 미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토요일 아침이면 창문을 활짝활짝 열어놓고 빨래를 하고 온 집안을 청소하던 미진이. 그녀의 모습이 집안에 보이지 않는다. 신기루처럼 없어져버렸다. 유현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아내의 딸 제니. 유리그릇같이 투명하고 맑은 아이였지만 또한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유현오도 아내와 결혼하고나서 제니때문에 많이 힘들었었다. 첫 딸에다 폴과 나이차이도 많이나는 만큼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제니였다. 엄마아빠의 이혼으로 인한 갑작스런 아빠의 부재를 제니는 감당할 수 없어했었고 비어있던 아빠의 자리를 차지한 유현오에게 절대적인 반감과 적대감을 표시하던 아이였다. 제니의 그 심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유현오는 갖은 노력과 헌신적인 정성을 기울이면서 제니에게 다가갔다. 몇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겨울의 얼음동굴같이 차갑던 제니의 마음이 점점 풀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둘도 없는 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대학을 다른 주로 감에 따라 작년부터 집을 떠나 있던 제니. 지난번 아버지 날에는 처음으로 유현오에게 카드를 보내왔다.
“아빠라고 부르고 싶지만 아직은 조금 어색해서 부를 수 없는 혀노 아저씨. 사랑해요. 언젠가는 꼭 아빠라고 부를 날이 오기를’ 라고 쓴 카드를.
그런 제니에게 낯선 여자의 출현은 큰 충격과 실망과 배신일 터. 제니는 미진에게 독하고 뾰족한 말로 상처를 주었을 것이었다. 사실 유현오는 제니에게 미진의 존재를 알릴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미진이가 여기에 머무는 게 당분간, 그냥 당분간이라도 생각했으니까. 독립할 여건이 갖추어지면 미진이는 나갈 것이다. 미진이의 성격으로봐서 세달 이상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유현오는 폴에게도 강력하게 입단속을 시키지 않았다. 미진이가 짐을 가지고 들어오던 날 ‘자기 방을 다른 사람이 쓰는 줄 알면 네 누나가 엄청 싫어할 건데’하는 말로 슬쩍 암묵적인 뜻을 전했을 뿐이다. 폴도 유현오의 뜻을 알아챘다. 그동안 몇번 제니와 통화를 하면서도 일절 미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눈치였었다. 그랬는데 처음 운전을 해 본 사실에 흥분하는 바람에 미진이의 존재를 제니에게 알리고 만 것이었다.
“잘..잘못했어요…. 아저씨…”
유현오는 폴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네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차라도 가지고 나가지…. 걸어서 어디로 간 것일까…
“미진이 아줌마, 전화 안 받아요. 제가 몇번 전화했는데도요…."
내가 한번 해볼께, 하고 유현오는 자신의 침실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진 전화기를 가져다가 미진의 번호를 눌렀다. 벨이 한번 울리자마자 바로 보이스 메일로 넘어가는 미진의 전화.
“미진이 아줌마가 전화를 꺼놨나봐요….”
“그런 것 같네….”
“어떡하죠. 미진이 아줌마 안 들어오면?”
“……..”
“미진 아줌마가 화 많이 났을 거예요. 누나 성격이 워낙 못되어서…”
“그러니까 말이다….”
보나마나 뻔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퍼부었을 것이다. 당신 누구예요? 누군데 내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가 내 침대를 쓰고 있어요?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 안 해요? 라고 말 했을 것이다. 유현오 아저씨가 당신을 좋아해서 그런 선의를 베푼 것 같은데 당장 그 집에서 나가요!라고 소리쳤을 수도 있다. 제니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아이였다. 자기보다 열몇살이나 어린 아이한테 그런 봉변을 당한 미진이. 모욕감에 얼굴이 화끈거렸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자괴감에 쩔어 어깨를 펴지못하고 있던 미진이, 얼마나 참담했을까….
유현오는 한번 더 미진의 번호를 눌렀다. 역시 보이스메일로 바로 넘어가고 있었다. 차도 없이, 돈도 없이 이 가엾은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나가서 미진이를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유현오는 마음을 바꾸었다. 이번 일을 그냥 모른 척 하기로. 제니의 성격을 탓해가며 위로와 변명이랍시고 하는 게 미진의 모멸감을 더욱 가중킬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전화기를 내려놓던 유현오는 문자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진이로부터였다.
바깥에 산책을 나왔어요. 시간을 좀 보내다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점심으로 칼국수를 해드릴께요.
유현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줄 알았는데. 그럼 그렇지. 혼자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정리하고난 후 아무렇지도 않을 얼굴로 귀가할 거야….
“미진이 아줌마, 너무 걱정말거라. 몇시간 후 들어올 거니까”
유현오의 말에 폴의 안색이 밝아졌다.
“미진이 아줌마 차 닦는다고 하셨죠? 얼른 숙제 끝내고 나올께요. 5분이면 돼요”
유현오는 고개를 끄덕하고 차 닦을 준비를 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미진이인가 싶어 전화기의 액정화면을 급하게 확인하던 유현오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바뀌었다. 전화를 해온 사람은 정선우였다.
“어딘가, 자네?”
“집이야”
“토요일인데 집에서 뭐하나? 안 바쁘면 잠시 만날 수 있겠나? 나 자네 집과 가까운 곳이야”
“…….”
유현오는 정선우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중요한 사안이 있다는 느낌을 감지했다. 왜냐면 정선우는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더라도 일단은 유쾌한 농담부터 시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선우는 농담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만날 것을 종용했다.
“지나가던 길인데 자네를 꼭 좀 만났으면 해서…”
무슨 일일까. 옷을 갈아입으면서 유현오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미진이 일때문일 거라는 짐작이 가긴 했다. 그러나 유현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정선우가 미진이 일로 자기를 만날 이유가 없었으므로.
정선우는 미진이가 유현오의 집에 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유현오가 미리 귀뜀을 해놓은 까닭이다. 미진의 처지를 잘 알고 있던 정선우. 가엾은 여자이니 잘 보살펴주라는 당부까지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정선우가 와 있는 도너스집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반가와 하면서 유현오가 평소에 마시는 소이 라테 한잔을 가져왔다. 유현오는 무거운 기분으로 우선 정선우 어머니의 안부부터 물었다. 정선우가 대답했다. 그냥 그러셔. 노환으로 온 치매인데 갈수록 나빠지지 차도같은 게 있겠나.
소이 라테를 한모금 마시고나서 유현오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미진씨는 어때?”
“잠깐 산책을 나갔어”
“내 말은 미진씨가 지금 독립할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를 물은 거야”
유현오는 정선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게 뭐가 중요해서 휴일아침에 날 불러내서까지 물어보는 건가?하는 표정을 하고서.
독립. 미진이가 아파트를 얻어나갈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유현오는 모른다. 일단은 돈을 모으는 게 급선무일터인데 그래봤자 한달 월급을 모았을 뿐일 것이다. 그마저도 반찬거리들을 사느라 지출을 했을 것이다. 유현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미진은 매일 저녁마다 아시아나 마켓에서 식료품들을 구입해왔다. 그리고 그 식료품들로 만든 요리를 폴과 유현오에게 내놓았다. 싱싱한 물오징어회일 때도 있었고 곱창전골일 때도 있었고 콩나물잡채일 때도 있었다. 솜씨가 썩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남자가 대충 만든 것에 비할까. 유현오와 폴은 미진이 덕분에 매일 저녁마다 색다른 요리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미진씨에게 차를 사주었다며?”
“….”
유현오는 정선우가 왜 뜬금없이 자기를 보자고 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니가 정선우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미진이에게 퍼부은 것도 모자라 정선우에게까지 전화해서 하소연을 한 것이다. 아저씨 어떡해요?그 여자 어떡해요? 저희집에 이상한 여자가 들어와 있는데 아저씨가 나서서 쫒아내 줄 수는 없나요? 유현오 아저씨가 그 이상한 여자한테 폭 빠져있는 것 같아요. 세상에, 차까지 사주었대요. 저러다가 결혼까지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저는 그렇다치고 제 동생 폴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니가 뭐라고 하던가”
“자네가 짐작하고 있는대로지”
유현오는 한숨을 쉬었다. 미진이에게, 정선우에게 전화하기 전에 나한테 먼저 할 수는 없었을까….
“이제 미진씨를 그만 내보내는 게 어떤가”
“...”
“차까지 사주었으니 자네로서는 최선을 다한 셈인 것 같은데”
“….”
“미진씨도 이제 더 이상 자네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 같고. 일단 차가 생겼으니 말이야”
유현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해야겠지.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미진이를 붙잡아 둘 수는 없을 테니까. 결혼하지도 않을 거면서 같은 집에 언제까지 살 수는 없을 테니까. 결혼하지도 않을 거고, 라고 생각하는 데 유현오의 가슴 한복판에 찌릿한 아픔이 왔다.결혼하지 않고 미진이랑 같이 살 수는 없을까…
“제니도 제니지만 소문이 안 좋아”
정선우가 입술을 몇번 달싹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하기 많이 망설였다는 뜻.
“벌써 아시아나 마켓 직원들 사이에 소문이 다 났더군. 미진이가 자네 집에 머물고 있는 것”
유현오는 정선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떻게?어떻게 소문이 났을까 하는 의문의 표시를 담고. 미진이가 우리집에 와 있는 걸 아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는데?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좁네. 부엌에서 일하는 분 하나가 자네 동네근처에 사나 봐. 미진씨가 자네 차를 타고 다니는 걸 몇번 보았다나 봐. 나란히 같은 집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걸 보았다고 했던가, 하여튼 그랬어….”
한번도 우려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남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 볼 거라는 걱정은 전혀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남편의 악행과 무능을 견디지 못해 집 나온 여자를 도와주고 있을 뿐인데. 어려움에 처한 여자를 그냥 도와주고 있을 뿐인데. 손 한번 잡지 않고 이상한 행동 한번 하지 않고 순수하게, 말 그대로 그냥 순수하게 도와주고 있을 뿐인데.
“박 매니저까지 걱정을 하더군”
“….”
정선우가 또 망설이는 듯 입술을 아까처럼 몇번 달싹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박 매니저는 걱정을 아주 많이 해. 미진씨나 자네 품성으로봐서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무슨 안 좋은 일? 하고 물으려다가 유현오는 입을 다물었다.유현오도 짐작하고 있는 게 있었다. 얼마전에 한국신문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한 사건. 한국마켓 경리부 여자의 공금횡령 사건.
“그래서 말인데 미진씨를 자네집에서 내보내는 게 좋겠네.하루라도 빨리 말이야”
“….”
“총각의 몸으로 아이가 둘이나 딸린 여자와 결혼한 자네의 순애보가 이번 미진씨 일로 인해 다 망가지고 있어. 내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미진씨도 아이가 둘이잖아.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네. 유현오는 아이 둘 딸린 여자와 얽히는 게 전문인 사람이냐고…”
“그래서?”
유현오가 정선우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라니?”
“그 사람들이 뭐라하건 나와 무슨 상관인데?”
정선우가 의혹에 찬 눈길로 유현오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자네 설마…설마 미진씨와 어떻게 해보려는 것은 아니겠지?”
“왜 어떻게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가?”
어이없다는 정선우가 헛, 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그리고 나서 정선우는 유현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된다는 법은 없지. 그렇지만 남의 눈이란 게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닌 이상 남의 이목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 인생에 그들이 아무것도 보태준 것 없는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대화를 이끌어 갈 수가 없지, 이 사람아. 자네의 레페테이션(reputation)에 관계된 일이야. 앞으로 자네가 이 동네에서 사업을 하는 이상 남의 이목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말일세 ”
정선우의 목소리가 간곡해졌다. 그는 덧붙혔다.
“사람들이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그 사람의 사생활을 은근히 따진단 말이야. 자네가 지금까지 사람들한테 평판이 좋아 일감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자네의 순애보가 한몫을 했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 전처의 자식을 둘이나 키우고 있다는 순애보”
“ 다른 동네로 이사할 수도 있지. 사람들의 평판이 문제라면”
툭 내뱉듯한 유현오의 마지막 말에 정선우가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제니 엄마와 결혼하면서 밟았던 그 전철을 또 한번 밟을 자신이 있다는 뜻 같은데?
“못 할 것도 없지”
정선우가 자신을 아끼고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 잘 아는 유현오였다. 그러나 반발심과 함께 짜증도 나는 유현오였다. 왜 한국 사람들은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을까.왜 주제넘게 이래라 저래라 쓸데없는 조언들을 할까. 유현오는 일어섰다.
“나는 그만 가보겠네. 산책나갔던 미진씨가 들어 올 시간이 됐어”
정선우가 유현오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유현오는 커피값을 계산하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그때 유현오의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미진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신기루처럼 영영 사라져버렸다는불길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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