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한테 카톡을 쏘았다. 좀체 없는 일이었다. 남편 카톡의 status message는 '오늘도 즐겁게’ 다. 그래서 오늘도 즐겁고 행복하고 재밌고 기쁜 시간이 되라는 기원구를 보냈다. 밑에는 Love wife까지 덧붙여서…

오후의 까칠했던 심보를 다듬어 진정성 있는 가슴으로 문자를 보내기까지는 몇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은 현재 1박 2일로 친구들과 여행중이다. 

한국에 오니 그런 낯 선 이벤트들이 많았다. 주로 가족 모임 위주였던 미국과는 달리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만나는 모임이 잦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살았으면 그러려니 했을 일이나 아직은 이 문화가 서운하고 낯설고 안타깝고… 그렇다. 아무래도 가족끼리 같이 행동하는 패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아까 남편이 집 문을 나서는데 '나한테 미안하다고 안 하숑?’ 이라고 심퉁맞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남편은 진심이 하나도 안 배인 맹랑한 목소리로 ‘쏘리!'를 내뱉고 둥둥 떠나갔다.

부엌으로 돌아와 설거지를 하는데 모야, 그 태도는… 이라며 내 안의 악마가 빈정거렸다. 미국에서 같았으면 눈빛, 말투, 손끝에까지 미안한 기색을 묻혀 살갑게 인사했을 텐데... 그러면 나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아서 꽤나 쿨하게 잘 다녀오시오,하고 배웅했을 텐데... 이래서 ‘아' 와 ‘어’ 는 속마음에서부터 갈라진다. 속마음이 다르니 말(투)도 다르고 그래서 듣는 사람은 그 차이를 느끼고 서운하거나 화가 나는 것이다. 한국생활 만 1년을 채운 남편은 이미 이러한 일상에 길들여진 능구렁이가 되어 이 풍년 세상을 마음껏 즐기는 눈치다. 하지만 내게는 이 풍진 세상이 되어 10년이 지나도 요것 문화에는 익숙해지고 싶지가 않다. 생각해보니 그래서 많은 한국 아내들이 미국 생활을 좋아라 하는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오니 아이들 학교 행사에도 대부분 엄마 혼자 오고, 선생님과의 면담도 주로 엄마들이 한다. 드물게 아빠들이 보이기도 하지만 익숙한 풍경은 아닌가 보았다. 수개월 전에 있었던 작은 아이 학교 면담시간에는 남편이 먼저 교실문을 열자, 우리 예약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으셨다. 내가 따라들어가며 인사하자 그제서야 어머나, 아린이 아버님이셨군요,하며 겸연쩍어 하셨다. 또 큰 아이 담임은 수녀님이셨는데 아버님과 말씀을 나누려니 불편해서 어머님하고 연락했으면 했어요,라는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학부모란 엄연히 부와 모를 포함하는데 한국은 그만큼 아이들 교육에 모의 전담화가 이루어졌다는 소리일 것이다. 이후로는 남편도 학교에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게 된 것 같다.

몇 주 전에는 법륜스님의 즉문즉답 강연회를 다녀오는데, 가는 길은 몰라도 오는 길이 쓸쓸했다. 하버드대에서 열렸던 토크콘서트에 함께 다녀왔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그때처럼 좋은 말씀을 나란히 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손도손 할 뒷이야기도 많았을 걸… 아쉬움이 한가득이어서 인지 문득 미국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그 날, 홀로 혹은 삼삼오오 짝지어 나오는 여인들의 행렬을 보면서 문득 한국문화가 예로부터 남녀를 심히 갈라놓기는 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 7세 부동석이요, 외간 남녀는 내외를 해야 미풍양속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나랏일은 남자, 가사는 여자, 바지는 남자, 치마는 여자, 갓은 남자, 비녀는 여자… 마치 종이 다른 동물 사이처럼 남과 여는 그렇게 다른 세계를 지켰다. 현재는 세상이 바뀌어 남존여비가 여존남비로까지 진화했지만 그 두 성 간의 가정내 역할분담은 아직도 확연하다. 그 대표적인 예는 명절날이다. 여자는 부엌, 남자는 거실, 여자는 요리하고 설거지하다가 어깨 두드리고 남자는 먹고 마시면서 배를 두드린다, 2014년에도...

한국에 온 남편은 자연스럽게 '나홀로 모임’에 자주 출석하게 되고 남정네들의 늦은 퇴근 풍속도에 맞추어 저녁도 함께 먹는 날이 드물어졌다. 미국에선 꼬박꼬박 넷이서 같이 먹던 저녁을 큰 아이는 야간 자습으로, 남편은 퇴근이 늦은 탓에 작은 아이와 둘이 먹게 된 일은 서글펐다. 주말에나 겨우 마주앉는 밥상인데… 게다가 오늘의 외출이 딱히 마딱찮았던 이유는 이 모임이 신혼시절엔 부부동반이었던 때문이다. 자식이 하나,둘 태어나고 그 아이들 양육을 전담하느라 아내들의 외출은 부자유스러워지고 그래서 남자들만 모이는 것이 당연한 형세로 자리잡은 모양이었다. 새삼스레 왜 여자들은 결혼과 동시에 제 삶을 이리도 변형시켜야 하는가… 에 생각이 미치고… 아무튼 그래서 심통이 불뚝거렸던 것이다. 

하루가 저물고 창밖에는 파릇파릇 달빛이 피어났다. 봄꽃 내음이 퐁퐁 창틈을 비집고 올라오는가 싶더니 내 얄궂어 딱딱해진 마음이 느물느물 풀어지고 순간 늑대소년의 탈바꿈처럼 나는 착한 아내로 변신한다.

남편의 외출이 내게 상해를 입혔던가?

남편의 외출이 나를 불행으로 몰았던가? 

남편의 외출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가? 

언뜻 이 심경의 변화가 달빛과 꽃향때문인가 했지만 실은 법륜스님 말씀 덕이었다.

법륜스님은 아무리 부부지간이라해도 나와 상대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다. 내가 남에게 화를 내거나 노여워할 수 있는 조건은 상대방이 내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혔을 때를 빼면 없다고 하셨다. 예를 들면 자식이 공부를 안하고 놀기만 하는 일은 화를 내거나 혼낼 일이 아니라 안타까운 일이라 하셨다(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업적인양 자랑삼을 속셈이 아니라면 그건 이치적으로 맞는 말씀이다). 아이가 공부를 안 하는 것은 그 아이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주지만 부모에게 직접적으로 해를 입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스님의 법칙에 따르면 학생이 수업시간에 조는 일은 안타까운 일이지 혼낼 일은 아니다. 허나 수업시간에 떠들어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입히면 그건 야단맞을 일이 되는 것이다. 즉 상대의 행동이 내게 직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행위가 아니면 상대에게 노여워하거나 원망을 해선 안 된다. 

그 원리를 상기하자 남편의 외출은 내가 빈정거리거나 삐칠만한 일이 아니었다. 짧은데다 통통해진 내 종아리가 더이상 예쁘지 않다는 솔직함도 그랬다. 나는 변해버린 이 안팎의 환경에 적응을 하느라 하루하루 도를 닦는다. 내 생존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