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의 한 판이 데려다 줄 미래
별 잔소리없이, 별 반항없이 조용히 살던 우리 모녀사이에 불화가 시작된 것은 딸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터였다. 전에 없던
no소리를 듣기 시작한 것은 딸아이가 열 두살이 되는 해였다고 기억한다. 정확한 일화는 생각나지 않지만 열 두살된 아이가 억지를 부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엄마의 말에 순순히 따랐던 아이의 갑작스러운 반항은 자기장에 밀리는 같은 극의 반응처럼 나를 휘청거리고 돌게 만들었다.
딸은 no소리를 입에 달기 시작한 것처럼 잠도 달고 살기 시작했다. 놔두면 24시간도 깨지 않을 것 같이 잠의 폭풍 속에 들어앉았다(청소년기에 급작스럽게 많아진 성호르몬은 소년에게는 생식기로 뜨거운 피가 몰리게 하고 소녀에게는 잠구덩이에 빠지게 한다는 의학계 보고가 있다).
아침이면 깨우지 않아도 벌떡벌떡 일어나던 아이가 잠에 취하기 시작하는데 아, 이제 어린아이의 몸피를 벗는구나,란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약간은 측은해졌다. 벌써 인생의 고달픈 트랙 위에 얹혀지다니… 왜냐하면 나는 어린시절,
구체적으로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참으로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행복,
고뇌따위를 느낄 수 없었던 세계…
청소년기로 접어든 나는 어린이였던 지난 시절을 그렇게 추억했고 이후부터 죽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어린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동네골목을 휘저으며 섬머슴처럼 뛰놀다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급 조신한 소녀로 탈바꿈해 가방을 두 손으로 모아들고 새초롬히 눈을 내리깔기 시작했던 배후는 알고보니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호르몬이었고 이후 나는 원하던 원치 않던 성숙의 산을 거침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
교정의 등나무 아래를 하염없이 걸었고,
촛불을 켜고 몇 시간이고 불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 일쑤였다. 창밖의 모든 풍경에 취해 눈으로 세상을 샅샅이 훑었고 하이틴 로맨스책에 빠져 언젠가 내게도 근사한 왕자님이 나타날 거라는 몽상을 꾸었다. 그런 나를 보고 너, 뭐하냐? 라고 누군가 소리치면 그때서야 현실로 돌아오곤 했으니 그때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동시에 살았음에 틀림없다. 성적표마다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선생님들의 평이 있었던 것도 그런 일상의 증명이리라.
그런 나의 사춘기 시절을 반추해 보았을 때, 내 눈에는 딸아이가 여러가지로 기이해 보였다. 급 조신해져서 참하다는 평을 들었던 나와는 상반되게 아이는 메니큐어, 페디큐어는 물론 가끔 화장도 하고 향수도 상용했다. 교복을 입기도 했지만 엄마가 사주신 옷을 별 말 없이 입었던 나에비해 우리 딸은 자신이 직접 고른 옷만 입는다.
제일 기겁할 일은 가슴골이 보일만큼 파인 옷들이 아무렇지 않다는 점이다. 속옷 끈이 보이는 일이 아무렇지 않고 핫팬츠와 훌립훌롭이 의례 여름의 일상복이 되었다.
사실 그것은 미국 청소년들의 일반적인 행보이다. 오죽하면 중학교 오픈하우스에서 선생님들이 말씀하셨을까.
‘하의의 길이는 팔을 쭉 뻗었을 때 손톱 밑으로 내려와야 하고 끈다리는 입을 수 없으며 민소매인 경우 손가락 네개를 붙인 너비만큼의 어깨폭을 가질 것. 되도록이면 코롱 사용을 금할 것. 운동이나 땀을 흘린 후엔 깨끗이 샤워할 것…‘
그런 세세한 지침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냥 웃었다. 그때만해도 남의 집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나는 사색이나 내면적 성숙과는 거리가 멀고, 보이는 세계에 탐닉하기 시작하는 딸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전쟁은 그래서 시작되었다.
‘엄마는 대학생 때도 별로 화장을 하지 않았고 남자들 많은 곳에 가면 긴 치마나 긴 바지를 입었어. 윗 옷이 조금 파였다 싶으면 할머니한테 단추를 달아달라고 부탁드렸고. 몸은 항상 청결하게 씻었고 그러면 향긋한 비누향이 나니까 향수같은 건 안 써도 되고… 메니큐어를 바르면 손톱에 숨이 안 통하고 두꺼워져서 손톱색이 미워져.
화장한 얼굴보다 맨 얼굴이 이쁜 게 진짜 이쁜 거야…’
시대의 변화와 환경의 차이는 어따두고 내 고리짝 이야기를 그렇게 읊어댄 걸까? 어쩌면 나는 내 안에 갖혀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딸은 내가 아니고 딸은 나처럼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고 딸은 나처럼 1980년대를 살고 있지 않은데… 그렇다고 소위 나쁜 짓을 한다거나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저버린 일도 없는데… 딸아이를 강 건너에 세워두고 하염없이 손짓을 하는 나와 그 메아리가 터무니 없이 공허하게 들렸을 나의 딸… 어느날 딸내미는 말했다.
“나는 내 딸한테 엄마처럼 하지 않을 거예요.”
쿵! 그 한마디는 내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 문장이 함축하는 의미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엄마는 보수적이고 이해심도 부족하며 구시대 여성이고… 나는 말 속에 숨은 그런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나도 파티가 있으면 엄마랑 같이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하고 새 드레스와 하이힐을 신나게 고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다른 친구들은 모두 그러는데 나만 못 그래…”
그랬구나… 그럴 수도 있겠구나…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 입술은 다른 말들을 꺼냈다.
”파티에 가서는 친구들이랑 추억 쌓고 재밌게 노는 것이 중요하지,
불편한 하이힐 신고 새 드레스때문에 신경 쓰고… 그런 것들이 진짜 중요할까?”
엄마 말 역시 틀리지 않다는 사실을 딸도 머리로는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슴이 열리는 눈치는 아니였다.
우리의 다툼은 늘 이런 식이었다.
서로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녀. 1980년대와 2010년대를 살아가는 격차와,
미국과 한국이란 땅의 괴리, 가슴골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 격차와 차이와 괴리를 인정하지 않고 게다가 아직 어린 딸에게 너무 형이상학을 들이대는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줄줄 모르는 고리타분한 엄마임에 확실하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런 argument가 데려다 줄 우리 모녀의 미래가 그다지 외롭지 않을 땅임을…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서로의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가져다주는 선물이란 이런 것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