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 밤.

이 날은 내게 아주 특별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얼굴의 반은 가릴 커다랗고 두꺼운 안경..

동네 미장원에서 돈 만원 주고 중간 롯드로 말았음에 분명한 아줌마 파마..

감히 그 외양으로 피아노까지 쳐 가며 어떤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던 당시,

별 탈 없이 잘 사귀고 있던 나와 그는 시월의 마지막 밤에 꼭 한 번은

헤어져 보고 싶다는 허접한 이유로 별 일 아닌 걸로 시비 붙이고 딴지 걸다가

진짜로 시월의 마지막 밤에 이별을 했고 그 길로 완전 남남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가 암만 생각해도 뭣 땜에 ‘헤어지자’라는 말을 꺼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난다.

누가 먼저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딱 이 노래 말 그대로다.

그 뜻모를 이야기는 여적지 뜻 모르는 채다.

아무리 이유가 허접해도 꼴에 ‘이별’이라고

그 뒤로 나는 괜히 또 3일을 가출하는 오버행각을 벌였다.

아무 죄 없는 우리 부모는 그 허접한 이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 남자친구를 호출해서

종적을 감춰버린 딸이 남긴, 무슨 뜻인지 모를 짧따리한 편지 한 장을 앞에 두고

어찌된 일인지 캐보기 위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문구녕으로 도청한 남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3일 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은 아무 말 않고 하품하며 문만 따주셨다.

헤어진 이유가 너무 허접해서 별 일 없으리라는 결론을 얻으셨음에 분명했다.

아무튼 난 그 때, 기억도 잘 안 나는 허접한 이유로 3일을 어디론가 헤매고 다녔다.

헤매고 다닌 장소마저 잘 기억이 안 난다.

술을 무지 펐다는 기억은 난다.

술집 앞에서 꽥꽥 먹은 걸 확인해내는데 누군가 등을 두드려 준 기억은 난다.

희한한 건..

친구들 죄 물어도 자기가 아니라는 거다.

뭐..평소 한 오지랖이 남태평양인 사람이 지나가다 그 오지랖 관리 못하고 벌인

친절인가보다 결론짓고 말았다.

아무튼 나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이유로 벌인 이별에도 나는 3일 동안을 눈 튀어나오게 울고 다녔다. 그 시월의 마지막 밤에 나는 오로지 슬픔에만 올인했다.

그로부터 더도 덜도 않고 20년이 지나고 다시 시월의 마지막 밤이다.

사랑하는 친구의 남편이 폐암으로 멀쩡하다 두 달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전화통화를 하는 내내 펑펑 울었다. 울다가 전화를 끊고

스페인어 시험에서 100점도 아니고 101점을 받았다는 딸아이를 보면서는 또

퉁퉁 부은 눈으로 팔불출같이 웃었다.

두 번째 소주병을 따면서 이번에도 후배가 먼저 승진했다고 말하는 남편 말에

소주 따라주면서 한숨 쉬었다. 안주로 쥐포나 튀겨야겠다고 일어서는데

한국에 있는 올케에게서 전화가 와 직장 잃었던 남동생이 재취업을 했다하니

펄쩍펄쩍 뛰며 꺅꺅 소리를 질렀다. 그 전화 끊고는 튀긴 쥐포 들고 와

남편 앞에서 또 한숨 쉬었다.

이건 뭐..당췌...

뭐 하나에 올인이 안 된다.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 안 나는 남자와 허접하다는 것밖에 전혀 감이 안 잡히는

이유의 이별이 남긴 여파에도 3일을 올인했건만..

이제 나는..

털이 없어야 할 곳에 털이 나는, 생각만 해도 찝찝한 신체변화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울다가 웃기’를 시도 때도 없이 반복한다.

이런 내 증상에 대해 이야기했더니

이미 주량을 넘어서서 혀가 디지털 파마를 한 남편이 한 마디 한다.

“허..그런 게 인생이지. Welcome to Life!"

어쭈구리..혀에 파마하니 평소 영어 발음이 묵은지 고추가루를 털어내고 빠다를 발라 되려 좀 낫다는 생각에 한숨 쉬다  또 웃었다.

식탁 위에 퍽 고꾸라지는 남편을 보며 이런 두 가지 생각을 했다.

하나. 감정에도 세월이 흐르는구나.

둘. 당신이 그 때 그 남자가 아니라 참 좋다.

앞으로 또 다시 20년이 지난 시월의 마지막 밤..

그 때 나는 또 어떤 인생의 맛을 느끼고 있을까..

청년기를 보내고 중년에 들어선 미씨들이여..

 

Welcome to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