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출발을 며칠 앞둔 날, H가 놀러 왔습니다. 앞 편 글에 썼던, 안 지는 몇 년 되었지만 최근 들어 친해진 독자. 나를 언니라 부르는. 그녀가 물었어요.
“한국 갈 준비는 다 하셨소? ”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지요.
“준비고 자시고 뭐 할 것 있나. 옷가지만 몇 벌 싸면 되는데. 오, 파운데이션을 하나 샀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데 기미가 잔뜩 낀 꾀죄죄한 얼굴을 보여줄 수 없어서 말이야. 내 얼굴색과 잘 맞을지, 잘 밀착될지 걱정이네.“

아닌게 아니라 걱정이었습니다. ‘99센트 온리’ 스토어에서 산 1불 25전짜리 파운데이션이었거든요. 비싼 것을 사기는 싫었습니다. 여기선 생전 화장을 안 하는지라 한국에서만 몇 번 바를 거니까요. 그동안 쓰던 것도 지인 거였습니다. 자기 얼굴색이랑 안 맞다면서 던져 준 거였어요. 어쨌든 한국갈 때마다 잘 썼었는데 지난 봄에 바닥을 보여서 버리고 왔지요.

H가 아연실색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1불 25전짜리 싸구려를 샀냐고. 중국제임이 분명할 건데 뭐가 첨가되었을 줄 알고 얼굴에 함부로 바르냐고. 1불 25전짜리 파운데이션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해보자면서 얼른 가져와 보래요. H는 내가 갖다 준 파운데이션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기가 차는지 얼른 자기 핸드백에 넣어버립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아낄 걸 아끼소, 제발! 공항 면세점에서 질 좋은 걸로 하나 사요!

졸지에 파운데이션을 뺏겨버린 나는 그저 망연자실 할밖에. 속으로 괜히 보여줬다고 후회를 했지요. 천상 ‘99센트 온리’ 스토어에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나, 그런데 이게 웬일. 다음날 H가 또 왔습니다. 작은 종이백에 파운데이션, 쿠션 등 온갖 색조화장품을 가득 담아서. 세계의유명 메이커만 쓰는 멋쟁이 딸의 화장품들 중 새 것들로만 골라왔답니다. 그리하여 나는 평소라면 꿈도 못 꾸던 비싼 색조화장품을 파우치 가득 가지고 한국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돌아올 땐 옛다 너도 써봐라하고 한 친구에게 다 주고 오긴 했습니다만 유명 메이커가 좋긴 좋더군요. 발색도 좋고 오래 가고 용기도 근사하고.

언제 한 번 글에 썼던 S. S어머니가 신기하게 나랑 동갑입니다. 재작년, S집에 방문 온 그녀를 만나긴 했지만 따로 연락을 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요. 작년 봄, 한국에 가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습니다. S어머니입니다. 내가 냉증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딸로부터 들었다며 ‘생강청’을 갖다주겠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생강청이라니까 얼른 받겠다고 했습니다. 유리병에 담긴 무거운 생강청을 들고 호텔로 찾아 온 S어머니. 필요한 것 다 샀냐고 묻길래 내가 대답했습니다. 부채를 좀 구입하고 싶었는데 오만 군데를 다 다녀봐도 없어서 포기했다고. 그때가 5월이었습니다. 더위가 시작되기 전이라 부채 파는 데가 없습니다. 운전할 때 햇빛 가리기 용도로 부채가 딱이거든요.

다음 날,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있는데 S어머니가 왔습니다. 양손 가득 부채를 들고 말입니다. 자기도 동네 시장, 백화점 등을 다 다녀봤지만 찾을 수 없어서 인사동에까지 가서 사왔답니다.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부채라 무늬와 재질과 모양도 고급스럽습니다. 집에서 그냥 흔하게 막 쓰는 싸구려 부채를 찾았던 나는 뜻밖의 비싼 선물에 미안하고 고마워서 몸둘바를 모를 수밖에요. 미국에서 두 번, 한국에서 딱 한 번 만난 나를 위해 힘든(S의 어머니집에서 인사동까지 1시간 거리, 인사동에서 인천공항까지는 또 1시간이 넘는 거리입니다) 수고를 아끼지 않는 S의 어머니였습니다. 생강청을 건네 받고는 그냥 지나갈 인연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네요. 그 이후부터는 가끔 연락을 하는데 내가 한국에 나갈 때마다 S의 어머니는 반드시 호텔까지 찾아 옵니다. 이것저것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을 바리바리 가져 오고 무당친구를 도와 내 짐을 꼼꼼하게 싸줍니다.

이번 한국방문 첫날, 내가 묵는 호텔로 S의 어머니가 왔습니다. 여느 때는 출국을 며칠 앞두고 만났었는데 이번엔 방문 목적이 친구인지라 도착하는 날 바로 S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지요. 셋이 같이 보자고. 대구에서 올라온 친구도 합류를 했습니다. 항암 받고 병원에서 바로 나온 친구와 S의 어머니와 대구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음날, S의 어머니랑 시내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가 서울 안내 가이드를 자처했거든요. 미국 촌놈인 나와 대구 촌놈인 친구는 S의 어머니 덕분에 줄 서서 먹어야 한다는 유명 분식집의 가락국수와 메밀국수 맛을 볼 수 있었고 청와대, 북촌, 경복궁, 광화문 광장 등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다니는 걸 싫어하는지라 둘만 가라고 고집을 부렸던 나였지만 막상 나가서 구경하니까 참 좋더군요.

다음날 친구는 대구로 돌아갔고 나 혼자 수서에 위치한 삼성병원으로 갔어요. 석 달마다 몸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부산친구와 삼성병원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병원에 도착했는데 S의 어머니가 또 삼성병원으로 왔습니다. 양산을 고쳐서 가져 왔답니다.

서울구경을 나가던 날, 하늘은 잔뜩 흐렸지만 그런 날일수록 자외선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양산을 쓰려고 폈더니 고장이 나 있었어요. 새 양산인데. 아깝지만 그냥 버리려고 했더니 S의 어머니가 자기 가방에 넣어요. 뭐 그런가 보다 했더니 하룻만에 새 것처럼 고쳐서 가지고 왔네요. 호텔로 가져다 주려 했는데 내가 삼성병원에 있다니까 그곳까지.

몸보신 하라며 늘 홍삼을 선물로 주던 친구 영선이는 이번에는 고급 화장품 세트를 주더군요. 나는 전생의 신분이 ‘무수리’였는지 남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지갑을 열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는 좋은 것을 써본 적 없는데 영선이가 이를 눈치챘나 봅니다. 화장품도 모자라 멋진 구두까지 사 주는 영선이.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임이시여’라는 제목의 노래는 1982년, 가수 김연숙 씨가 불렀습니다.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때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노했는데 살아보니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나보다 더 나를 염려해 주고 안타까와 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요.

- 왼쪽이 S 의 어머니. 광화문 쪽을 향해 걷고 있는데 대구 친구가 몰래 찍었네요. 나는 S어머니의 우산을 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