휑뎅그레한 집을, 볼 것도 없는 집안을 한바탕 구경하고 나가서 근사한 저녁을 얻어먹었습니다. 오픈한지 얼마 안 되었는데 평일에도 손님들의 줄이 길다는 한식집에서. 다시 집으로 들어오자 동생이 네 다리 달린 상을 펴더니 맥주랑 이것저것 안주거리를 차렸어요. 본격적으로 한 잔 하자 이겁니다. 보기엔 궁상맞은데 그 네 다리 달린 상이 참 효율적이더군요. 바닥에다 놓고 상을 중심으로 동생 부부, 부산친구 부부, 그리고 나 다섯명(동생의 두 딸은 서울에 유학 중)이 흥부 자식들 처럼 머리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앉을 수 있었으니까. 각자 편하게 퍼질러 앉아 주거니 받거니 맥주를 마셨지요. 한국에서 사흘 째 밤. 정말로 여기가 내 고향이구나하는 푸근한 마음이 들더군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라서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할 것 같지요?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끼리가 더 많아요. 한국 마켓에 갔더니 고등어가 싱싱하고 싸더라, 오랜만에 지인을 만났는데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얼굴이 많이 상했더라, 옆집이 타주로 출장을 가서 잔디를 대신 좀 깎아줬더니 맛있는 케잌을 답례로 구워주더라 등등 미국에 살면 누구나가 보고 겪고 이해할 만한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미국과 한국. 그 먼 거리만큼 그쪽 사람들과 이쪽 사람들의 사이도 먼 것 같습니다. 처음엔 형식적인 안부를 묻고 최근 근황을 서로 물은 다음엔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될지 감이 안 잡혀요. 서로 공감할 이야기가 없거든요. 현재 그들이 처해있는 생활을 내가 모르고 그들 또한 미국에서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전혀 모르니까 말입니다.
나나 친구나 동생이 꽤 수다스런 편인데도 같이 나눌 만한 화제거리가 없으니 대화가 뚝 끊기고 맙니다. 그저 잠자코 맥주잔이나 기울이고 과자나 으적으적 씹고 오징어 다리나 뜯을밖에. 그런 부자연스럽고 거북스런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나. 그런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데 일가견이 있는 나입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하고 기뻤던 때가 언제였었냐는 질문을 하면 되거든요. 사실 그런 질문들이 분위기를 쇄신하는 효과가 있기도 합니다만 ‘사람’에 관심이 많은 나는 실제로 굉장히 궁금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 80억 인구 중에서 어떠한 이유로 엮였든 간에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실체가. 그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왔는지 어떤 일들을 겪으며 살아왔는지 삶의 철학은 무엇인지 가치관은 무엇인지.
내 질문이 아주 뜻밖이었나 봅니다. 아무도 선뜻 대답을 못하네요. 모두 눈만 꿈벅꿈벅하면서 내 얼굴을, 그리고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봐요. 내가 재차 묻습니다.
“가슴이 터질 듯한 엄청난 기쁨이 아니라도 좋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기쁘고 행복했었던 일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가장 후회스런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들은 언제였을까요.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들은 찾아 오니까. 준비를 했든 돌발적이든간에 교통사고처럼 크고 작게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사니까요.”
나의 계속 된 질문에도 대답을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네 명. 그래도 그 중 친구가 제일 먼저 약간 어이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항변했습니다.
“니는 그런 생각도 하고 사나? 나는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안해봐서 잘 모르겠다. 생각을 안 해봤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누구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서 당황스럽기도 하네…”
친구의 항변에 힘 입은 동생 역시 같은 대답입니다.
“살기 바빠 죽겠는데 언제 그런 우아한 생각을 해. 언니는 시간이 많으니까 가능하겠지만 우리같은 서민은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안 해요. 아니 못하지. 아파트 대출금 갚을 날짜, 아이들 등록금 내야 할 날짜가 언제인지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릿속이 온통 꽉 차 있는데…”
동생 남편과 친구 남편은 약간 멋쩍은 표정입니다. 그러나 대답을 같네요. 한 번도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미래를 위한 목적을 정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도 숨이 차서 지난 세월을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었다고 . 내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눈코 뜰새없이 바쁘다 해도 가끔은 조용히 혼자 있는 시간이 있을 것 아닙니까. 화장실에 앉아 있는 시간. 잠들기 바로 직전의 시간. 홀로 운전하는 시간. 그때 무슨 생각들을 하세요. 미국의 제 친구들한테 물어보니까 첫 아이, 특히 첫 아들이 태어났을 때가 가장 인생의 가슴벅차고 기뻤던 순간들이라고 하던데. 나는요. 내 인생이 참 안 풀린 케이스라고 부모 원망을 많이했었는데 지나놓고 보니 천정에 펄쩍 뛰어오를 만큼 찬란하게 기뻤던 순간이 참 많았어요. 미국 오기 전 전국여성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을 때 . 미국와서 중앙일보에 기자로 취직이 되었을 때. 버벅거리는 영어로 미국직장에 입사했을 때. 그 직장에 들어가서 3개월 만에 ‘이달의 직원’으로 선정되면서 정식사원이 되었을 때. ‘미시유에스에이’ 측으로부터 칼럼을 쓰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내 ‘드림 카’를 샀을 때. 한국의 유기견이었던 ‘블루’를 이동봉사자로부터 공항에서 인계받아 처음 안았을 때 등등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고보니 나는 참 축복받은 인생인 것 같아요…”
모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내 말을 듣고 있었는데 친구 남편은 조금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자주 끄덕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가 말했습니다.
“오, 난 어마어마하고 거창한 일을 꼽는 일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군. 지금 처제 말을 듣고 (그는 나를 처제라고 부릅니다)가만 생각하니 내게도 기뻤던 순간들이 참 많았네. 내 첫 아들을 안아 들었을 때가 내 인생의 가장 기뻤던 날이었고 승진했을 때도 그에 못지 않게 기뻤고 첫 아들이 배우자를 처음 소개시켜줬을 때도 대견한 마음에 울컥했었지. 그날 기분 좋아서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셨던지…”
친구 남편에 질새라 바로 동생의 경험이 줄줄 나옵니다. 몇 년의 셋방살이 끝에 첫 집을 장만했을 때. 지진아가 아닌가 걱정했을 정도로 학업이 부진했던 아이가 처음으로 만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왔을 때. 그리고 그 아이가 왕따를 당하면서도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하고 좋았던 때라고. 안 먹어도 배부르고 입가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었던 때라고.
동생의 말이 끝나자 꿈에서 깨어난 듯한 얼굴로 친구가 말했습니다.
“모두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손 꼽을 일이 참 많네. 그런데 왜 나는 그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순간들을 되새김질 해보지 않았을까. 뒤돌아 볼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지금까지 살아왔네. 그저 앞만 보느라고.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 가려고. 남들보다 더 뛰어나려고 죽을둥 살둥 앞만 보고 달리느라 그랬겠지. 이제는 니 말대로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내 인생을 반성해 보고 통찰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슬펐던 일은 물론 죽음과 관련된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동생이, 동생이 죽었을 때입니다. 그리고 십 몇년을 키우던 강아지를 안락사시켰을 때. 그때는 정말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동생을 따라, 강아지를 따라 같이 가고 싶었어요.
후회스런 일도 몇 가지 있는데요. 그중 한 가지는 사람을 가려서 사귀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한테나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내 진심을 퍼부었던 것. 아주 좋지 않은 사람이라며 옆에서 말릴 때도 내 할 탓이라며, 나는 얼마든지 핸들할 수 있다면서 고집을 부리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 불시에 뒷통수를 꽝하고 맞았지요. 그 여파가 지금까지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상흔은 가끔 나를 불면의 밤을 보내게 합니다. 언제 한 번 그 일에 대해 자세하게 털어놓을께요.
너 나 할 것 없이 눈 앞에 당면한 여러가지 일로 지치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인생은 고해니까. 그럴 때 지난 날을 가만히 들추어 보세요. 현재의 삶이 남루하고 초라할지언정 내게도 소나무처럼 푸르고 햇빛처럼 찬란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들이 자양분이 되어서 현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걸어온 길이 너무 바쁘고 빨랐다 싶으면 숨을 고르고, 한 박자 쉬고요. 시궁창같던 날도 물론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지금 어떠세요? 다 지나갔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숨을 못 쉴 만큼 비탄스럽던 일도 돌아서서 보니까 먼지같이 하찮은 일일 뿐이지요.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물처럼 흘러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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