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핑크색 옷을 입었을 때 가장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연구결과가 있답니다. 핑크. 정말 예쁜 색이지요. 이름마저 예쁩니다. 나 또한 가장 좋아하는 색을 꼽으라면 핑크입니다. 예전에는 연보라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바뀌어졌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 핑크색 옷을 잘 소화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잘 사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스카프나 스웨터 정도. 핑크색 원피스가 한 벌 있긴한데 이를 입을 땐 반드시 까만 스웨터나 까만 쟈켓을 걸쳐야 합니다. ‘쨍’하는 느낌을 죽여야 하니까.

내 친구 미연이 또한 어지간히 핑크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래 위를 전부 핑크로 입는 걸 많이 봤지요. 어떤 땐 모자까지 핑크 일색으로 맞춥니다. 립스틱은 물론 항상 핑크색이고. 참 재밌는게 자칫 잘못 걸쳐 놓으면 동네 대폿집 주모같아 보이는 핑크색들이 미연이한테 가면 안성맞춤으로 제 역할을 잘 합니다. 미연이의 피부가 희고 고와서인지 분위기를 확 살게 하거든요. 미연이는 핑크 외에도 빨강, 노랑, 파랑 등 눈에 뜨이는 화려한 원색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연예인같이 과감하고 ‘튀는’ 차림새를 선호합니다. 평범한 사람같으면 엄두도 못 낼.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옆으로 구멍이 쭉 뚫린 바지라든지 색깔이 다른 짝짝이 운동화라든지 반짝이나 쇠징이 달린. 한 번은 열 손가락에 전부 반지를 끼고 있는 걸 봤는데 아주 묘하게 잘 어울렸습니다.

미연이 못지않게 핑크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내 고모입니다. 미연이처럼 빨강, 파랑도 좋아하는 것 같지만 가장 좋아하는 색깔은 무조건 핑크입니다. 아주 오래전 부터 그랬던 것 같아요. 처녀 때부터.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한 번도 고모가 무채색 계통의 옷을 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젊었을 땐 귀엽기도 하고 나름 봐 줄만 했었던 고모의 핑크 사랑. 그런데 팔순을 넘긴 할매의 핑크 사랑은 좀 아니다 싶네요.

7,8년 전. 집전화만 가지고 독야청청 하리라 고집을 부리다가 시류에 굴복해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카톡’을 하게되면서 미국오고 나서 소식이 끊어졌던 고향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되었어요. 창기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가서 30년여년 만에 만난 창기와 점심을 먹은 후 바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고모를 보러 가야했거든요. 체류기간을 일 주일밖에 잡지 않는지라 만남도, 모임도 짧게 후딱후딱 해치웁니다. 창기가 아쉬워하길래 그럼 고모 만나는 데 동행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예전 글에 쓴 적있지만 고모는 고모부랑 시골로 낙향했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혼자 상경해 서울역 앞 동네의 반 지하에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 딱 가본 집이라 찾아갈 수가 없어서 근처 농협 앞에서 고모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농협 화단에 앉아 창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 멀리 언덕에서 어떤 여자가 걸어 내려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핑크로 색을 맞춘. 시력이 지독히도 안 좋은 나는 그녀가 고모일 줄은 꿈에도 모른채 창기에게 혀를 끌끌 차면서 흉을 봤지요. 참 기괴한 차림의 여자도 있네. 나이 들수록 점잖고 고상하게 입어야지 세상에 저게 뭐꼬? 그랬는데 여자가 가까이 오더니 ‘계숙아’하고 나를 부르는 겁니다.

참 가관이었어요. 핑크 모자에 핑크 블라우스에 핑크 쟈켓과 바지에. 신발, 핸드백도 핑크. 고모는 안경을 썼는데요, 놀랍게도 안경테까지 핑크. 목에 맨 스카프도 핑크 꽃무늬. 아무리 핑크를 좋아하기로서니 나이들어서까지 그렇게 칠갑을 하고 다닐 줄은 생각도 못했던 나는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쳐다만 볼 수밖에. 눈 앞에 펼쳐진 핑크의 항연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라서 말이지요. 창기도 많이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고모가 인물 좋고 박식하고 유머감각 넘치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잔뜩 자랑을 해놓았거든요. 몇 분후.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겨우 한 마디했습니다.
”차림새가 그게 뭐요? 무당도 아니고…“

옷차림은 유난스럽지만 재주와 재능이 여러모로 뛰어나 팔방미인 소리를 듣는 고모입니다. 사람을 포복절도하게 하는 유머감각으로 주위로부터 항상 인기가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집에 걸린 표구나 액자 내용의 뜻풀이를 다 할 정도의 높은 한문 실력에다 영어도 능통해서 미 8군 부대의 한 부서에서 매니저로 일했습니다. 역학 및 주역(周易)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혼자 책을 보고 공부했다는데 사주, 관상, 손금 보는 일은 당장 역술인으로 나간다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입니다.

노래 실력은 어릴 때부터 동네 콩쿨 대회에서 일등을 맡아놨을 정도로 탁월하다는데요. 소문만 들었던 고모의 노래를 삼십몇 년 전, 한국에서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 사촌의 결혼식에서요. 당시엔 드물게 야외에서 결혼식이 진행되었는데 순서가 모두 끝나고 피로연장으로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고모가 마이크를 잡은 겁니다. 제목은 기억 안 나는데 창인지 타령이었을 겁니다. 민요가수 ‘김 세레나’ 씨는 저리 가라할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매끄럽게, 그리고 구성지게 잘 넘어가던지요. 전문 소리군을 초대한 거냐고 모두들 웅성거리는 속에 흥을 참지 못한 몇몇은 앞에 나가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자리에 앉은 사람의 어깨는 연신 들썩거리고요. 노래가 끝나자 감탄과 탄성이 섞인 앵콜 요청이 하늘을 찔렀고 고모는 무려 다섯 곡이나 연달아 부르고야 리사이틀을 끝냈습니다. 혼주의 재촉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날 고모의 독무대는 몇 시간이고 지속되었을 겁니다.

그때 고모의 옷차림은 또 얼마나 그 노래와 함께 잘 어울렸던지요. 옛날 사람답지 않게 1미터 70 가까운 큰 키에 미색 치마저고리를 떨쳐입었는데 머리는 조선시대 여인처럼 쪽을 찌고 옥비녀를 꽂았습니다. 정말로 범상치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고급 기생같다고 해야 할까. 그때 나는 생각했습니다. 천상 연예인 팔자로구나. 저런 끼를 발산하지 못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평범하게 살아가려니 고난과 역경이 많을 수밖에. 고모의 인생은 책 서너권은 거뜬히 맬 만큼 굴곡이 많았습니다. 고모가 주역을 공부하게 된 것도 왜 자기 인생이 그렇게 험난한지 알아보려고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공부를 해보니 알겠더랍니다. 고모는 연예인 아니면 화류계, 그렇지 않으면 무속인이 될 팔자(‘팔자’라는 말이 진부하면 성향이라고 해 둡시다)였다는 것을요.

요즘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리고 뒷받침이 잘 되었더라면 연예인으로 크게 성공했을 만큼 재능이 남다른 사람들이 많은데 미연이도 그렇습니다. 미연이의 노래솜씨도 고모와 견주어 손색이 없습니다. 미연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전율이 아직도 생생해요.

호텔에 찾아온 창기와 태규와 미연이랑 처음으로 노래방에 갔을 때입니다. 나는 음주가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노래는 안(못)합니다. 대신 맡은 역할이 따로 있지요. 노래를 입력시키는 일. 내 나쁜 눈이 노래방에선 활약을 합니다. 작은 글씨의 노래 목록을 잘 읽으니까요. 제일 먼저 내가 좋아하는 노래인 ‘나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넣었습니다. 반주가 시작되자 미연이가 마이크를 잡았는데 그때까지 그녀의 노래 실력을 알리 없던 나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더랬습니다. 그랬는데 노래가 시작되자 나는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미연이는 한이 절절이 담긴 듯한 깊은 음색과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있었어요. 호흡도 길었고요.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가사가 내포한 처절함을 잘 살리고 있었습니다. 기성가수처럼 한 소절 한 소절마다 적절한 제스츄어와 애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부르는 미연이의 노래는 내 가슴을 헤집어 놓기 충분했습니다. ‘나 하나의 사람은 가고’ 를 수많은 가수가 불렀지만 원가수인 임희숙 씨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데 미연이는 임희숙 씨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와,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더군요. 노래가 중간 쯤에 이르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빛나던 젊은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가슴이 먹먹했던 적은 있지만 그렇게 눈물을 줄줄 흘려본 적이 없던 나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미연이가 한때 가수의 꿈을 꾸긴 했더군요. 그 꿈을 접고 지금은 그냥 평범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긴 어릴 적 꿈을 이룬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너 나 할 것 없이 삶이란 소용돌이에 휩쓸리면서 꿈을 잃고 살지요. 꿈이란 말 그대로 꿈에 불과하다고 자조하면서 말입니다.

그랬는데요. 타고난 끼는 어쩔 수가 없나 봐요. 최근, 미연이는 각설이 품바패에 합류해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공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미연이. 무대에서는 무아지경에 빠져 세상근심 걱정을 다 잊는다는 미연이. 울긋불긋 현란한 색상의 옷을 입고 무대에서 신나게 춤추고 있는 미연이의 사진과 영상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늦게라도 제 갈길을 가는구나 싶은 마음에 오히려 반갑고 기뻤습니다. 예순의 나이에도 꿈을 찾아 훨훨 나는 미연이.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해도 실행할 의욕 조차 없는 나는 미연이가 마냥 부럽습니다. 미연이의 그 패기와 열정이.


- 왼쪽에서 두번 째가 미연이